소설리스트

<25> (85/180)

<25>

이하나에게서 산뜻한 비누 향이 난다. 얼마나 오래 씻은 건지 뺨이 발그레하고 머리카락은 채 마르지 않았다.

진통제를 물과 함께 삼킨 은성은 태연자약한 그녀를 화난 얼굴로 돌아보았다.

“뭐 하는 짓입니까. 줄리오 파렌티랑 기어이 붙어먹었어요?”

신경질적인 말투에 하나도 뾰족하게 받아쳤다.

“내가 누구랑 붙어먹든, 유은성 씨가 상관할 일은 아닐 텐데요.”

“경고했잖습니까. 파렌티는 당신한테 질 낮은 장난질을 하는 거라고!”

“그건 이쪽도 마찬가지예요. 나도 파렌티한테 저급한 장난질 하는 중인데. 몰랐어요?”

말이 통하지 않는다. 이하나는 한마디도 져주는 성격이 아니었다. 은성은 혈압이 올라 고개를 젖혔다.

천장을 올려다보는 그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크게 움직인다.

“이하나 씨, 나한테 왜 줄리오 파렌티와 싸웠냐고 물었죠.”

“아, 기억났어요?”

“내가 파렌티의 트리거를 건드렸습니다.”

트리거란 말에 딴청을 피우던 그녀가 고개를 튼다. 풋풋한 대학생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고운 얼굴이 그에게 향했다.

“트리거라뇨.”

“파렌티가 사랑하는 여자에 대해 거짓말을 했습니다. 도발한 겁니다. 필요에 의한 플랜이었는데, 그렇게 감정적으로 나올 줄은 몰랐고요.”

상처를 받았을지도 모른다. 조금 전까지 한 침대에서 뒹굴던 남자가 실은 홧김에 닮은 자신을 안았다고 생각할 테니까.

하지만 이미 알고 있다고 해도, 재차 알려 줄 필요성이 있었다.

“그럼… 아직 쓸모가 있겠어요.”

그녀의 입에서 나온 건 뜻밖의 대답이었다. 고개를 주억인 하나가 생각에 잠긴 듯 시선을 내리깐다. 실소한 은성은 테이블을 응시하는 그녀의 앞으로 다가섰다.

“무슨 소립니까. 쓸모라니.”

그에 고개를 든 하나가 무구하게 느껴질 만큼 담담히 웃었다.

“파렌티가 내게 그러는 이유는 그 여자 때문이에요. 사랑했다는 정부. 한 번도 본 적 없지만, 나랑 많이 닮았겠죠. 그러니 약해질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럼, 난… 이제부터 그 마음을 최대한 이용해야겠어요.”

“그게 무슨 뜻인지 알고 하는 말입니까?”

“네, 알아요. 그 남자가 날 정부로 생각하게 만들겠다는 소리죠.”

“미쳤어, 이하나!”

결국, 소리치며 여자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숨을 쉴 때마다 갈비뼈가 아프다. 금이 간 것 같단 의사의 말이 사실인가 보다.

은성은 욕지거릴 쏟아내며 그녀를 소파로 밀었다. 털썩 주저앉은 여자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든다. 그는 갈비뼈 부근을 감싸며 소파 테이블 위에 앉았다. 그러곤 다리 사이에 그녀의 무릎을 가둔 후 사납게 말을 이었다.

“대체 왜 그렇게까지 하지? 그렇게까지 해서 뭘 얻어 내려고!”

“말이 짧네요, 유은성 씨. 아마 내 동생은 조직에서 배신을 당했어요. 어쩌면 조직을 배신했을 수도 있고요. 그 말은…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단 뜻이에요. 그럼 난 누구를 끌어들여야 하죠? 머리가 안 돌아가요? 국가를 믿을까요? 아니면, 유은성 씨를 믿어야 하나?”

그녀의 까만 눈동자는 차돌처럼 단단했고 시린 냉기가 흘렀다.

은성은 양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눌렀다. 이토록 감정적으로 굴어본 게 얼마 만인지 모른다.

이 여자 앞에서 자꾸만 선을 넘는 제가 이해되지 않았다. 그냥 화가 난다고 해야 할까?

처음부터 제가 가지려 했던 여자다. 줄리오 파렌티보다 먼저. 그런데 코앞에서 보물을 빼앗긴 것처럼 기분이 더러웠다.

그렇다면, 다시 빼앗아야지.

“만약…. 만약 내가 이두이 씨를 찾아 준다면요.”

나직하게 가라앉은 말투에 하나의 얼굴 근육이 경직되었다.

“아주 작은 가능성에도 흔들리는 거 알면서, 말 쉽게 하지 마요.”

“쉽게 하는 말 아닙니다. 내가 당신 동생을 구해서 눈앞에 데려오면…. 나한테 올 생각 있습니까?”

불덩이를 삼킨 것처럼 명치가 뜨겁다. 그에 은성은 그녀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줄리오 파렌티와 키스할 때 명치가 뜨거웠다는 말을.

하…. 이런 기분이었나.

첫눈에 이끌린 끔찍함이 불러일으킨 통증. 하지만 그녀와 마찬가지로 사랑이나 애정 같은 종류의 감정은 아니었다.

그냥 이하나라는 생명체를 소유하고 싶을 뿐이다. 저 강하고 당당한 여자가 제 아래 깔려 우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회사 차려요? 스카우트?”

이하나는 능숙하게 말을 돌렸다.

“말 돌리지 마십시오.”

하지만 은성은 휘둘려 줄 생각이 없었다.

이하나에게 이두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대단한지 인정하겠다. 그런 동생을 찾기 위해 파렌티를 이용하는 거라면, 당사자인 자신은 더욱 확실하게 그녀가 원하는 바를 이루어 줄 수 있었다.

제 정체를 아는 모든 이들을 죽이면 된다. 모두 처리한 뒤, 유은성으로 살면 끝나는 일. 그에게 살인은 꼬마 아이의 손에 사탕을 쥐여 주는 것보다 쉬웠다.

그보다 간단하고 깔끔한 방법은 없다. 그리고 지금의 기분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동생 찾아 줄 테니까 한 번 대 달라는 말을… 되게 폼 잡고 하네요?”

은성은 하나의 싸늘한 말에 눈을 치켜떴다. 어느새 일어난 그녀가 서늘한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 번 대 달라고 안 했는데. 나한테 오란 말, 쉽게 뱉은 거 아닙니다.”

“정말로 나 좋아해요?”

“첫눈에 반한 건 처음이라.”

“첫눈에 반한 정체도 모르는 여자한테 맹목적인 거. 그거 이상한데요?”

“정체를 모를 거라고 생각합니까? 날 너무 쉽게 본 것 같습니다만.”

“저기요, 유은성 씨. 아까 목격한 일 때문에 좀 흥분한 거 같은데…. 고작해야 섹스예요. 남자와 여자, 뭐…. 취향 맞는 상대와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그러니까 급발진하지 마요.”

하나는 귀까지 빨개진 유은성의 턱을 잡았다. 그러곤 상처가 잘 보이도록 조금 돌렸다.

“눈까지 부었네. 아파요?”

“말 돌리는 것도 수준급이네…. 예, 진통제 먹었습니다.”

“식사도 안 하고 먹었죠.”

그녀의 손에서 익숙한 우유 향이 난다.

어색하게 답변을 회피하려는 이하나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둘이 함께 있는 걸 본 이후 마음이 쉽게 통제되지 않았다.

은성은 제 광대뼈 주변을 엄지로 문지르는 그녀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그러곤 잡아빼려는 손바닥에 코와 입을 묻었다. 밤새도록 맡았던, 그 향기다.

오두막 베개에서 맡았던 향이기도 했다.

“이하나 씨.”

가만히 그를 내려다보던 그녀가 대답한다.

“네.”

“내가… 당신 동생. 이두이 씨를 찾아 줄 테니, 파렌티에게 가지 마요.”

진지한 은성의 말에 입술을 깨문 하나의 눈빛이 흔들렸다. 입을 오물거리며 비스듬히 시선을 피하던 그녀는 무겁게 대답했다.

“…고마워요. 근데 진심은 부담스러워요.”

“가벼운 거 원하면, 가볍게 굴어 줄 수 있습니다.”

“둘 다 싫은데…. 비즈니스만 하면 안 될까요? 파렌티는 다시 보지 않을 사람이지만, 그쪽은 다르잖아요. 비슷한 직업군이기도 하고.”

은성은 입술을 달싹였지만, 결국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대신 하나의 손바닥에 이마를 댔다.

그녀의 말대로 제게 급발진은 어울리지 않는다. 지금껏 살면서 이토록 구석에 몰린 느낌을 받아본 적 없었다.

짜증스러운 마음에 손바닥에서 시작한 키스를 손목까지 이어 나갈 때였다.

“어이, 식사!”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온 로렌조가 소리쳤다.

하나는 은성에게 잡힌 손을 빼내고 로렌조를 돌아보았다.

“어.”

“밖으로 나와. 차양 설치된 곳으로.”

“야외에서 먹어?”

“그래.”

의심스러운 눈길로 두 사람을 번갈아 노려보던 로렌조가 방을 나선 뒤에야, 하나는 한숨 쉬며 은성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어쨌든 말이라도 고마워요. 그런데 유은성 씨, 강무진이 누군지만 똑똑히 알려 줘요. 그거면 충분해요.”

***

‘아… 불편해.’

하나는 로렌조가 안내한 자리에 앉으며 두 남자를 번갈아 보았다.

대체 유은성은 왜 갑자기 그런 소릴 한 걸까. 몇 번이고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 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머릴 다치더니 이상해지기라도 한 건지….

해가 쨍쨍한 한낮이지만, 건물 뒤쪽 차양 아래에 자리한 식사 장소는 그림자가 드리워 선선한 편이었다.

이곳에 온 후 이렇게 제대로 된 식사는 처음이었다. 정확히는 줄리오 파렌티의 어깨에 디너 나이프를 꽂아 최악으로 남은 날을 제외하고는.

마치 병 주고 약 주는 기분이다.

하나는 테이블 가득 차려진 음식을 둘러보며 시큰둥하게 말했다.

“독 든 거 아니지?”

그에 유은성을 노려보던 줄리오가 피식 웃으며 어깨를 가볍게 올린다.

“글쎄. 먹어보면 알겠지.”

“기미 상궁 없어?”

“그게 뭐지?”

“독 들었는지 왕 대신 먹어 보는 사람.”

당연히 농담이었지만, 줄리오는 마치 새로운 사실을 접한 것처럼 고개를 주억였다.

하얀 셔츠에 치노 팬츠를 입은 남자에게선 몇 시간 전의 방종함을 찾아볼 수 없었다. 굶주린 짐승처럼 제 밑을 빨던 남자가 지금은 금욕적으로 보일 만큼 단호한 눈빛으로 주위를 압도하고 있다니.

‘선천적인 거지, 저건….’

줄리오 파렌티는 지금껏 저렇게 살아왔다. 언제든 기호와 상황에 맞춰 바꿔 쓸 수 있는 가면을 쓴 채로.

‘내가 파렌티의 트리거를 건드렸습니다.’

그럼, 유은성에게 말려들어 제게 화풀이를 한 걸까? 정말로.

현실 파악은 빠를수록 좋다.

하나는 바삭하게 튀겨진 이탈리아식 돈가스에 레몬즙을 뿌렸다. 그러곤 줄리오가 하는 대로 그것을 작게 잘라 입에 넣었다.

어디선가 나타난 셰프가 세 사람의 잔에 와인을 따른다. 하지만 와인을 마시는 건 줄리오뿐이었다.

“굳이 자리를 마련한 이유가 있을 텐데요, 파렌티 씨.”

비스듬히 앉아 와인잔을 든 은성이 물었다. 그러자 하나와 은성을 번갈아 본 줄리오가 냅킨으로 입가를 닦더니 테이블에 팔꿈치를 댄다.

“마카오로 이동할 거야.”

그에 가장 놀란 건 하나였다.

포크와 나이프를 거칠게 내려놓은 그녀가 당황해 말을 더듬는다.

“마, 마카오라니! 지금 거길 어떻게 가. 내가 여기 왜 왔는지 잊었어?”

줄리오는 흥분한 하나를 빤히 보며 차분하게 말했다.

“이곳에서 출발한 크루즈선의 도착지가 마카오야. 그리고 초대받은 곳도 마카오고.”

“하, 그럼 그 크루즈는 언제 출발했는데?”

“보름 전.”

머릿속이 순식간에 복잡하게 엉켰다. 그녀는 차가운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캄보디아를 떠났을 거라는 생각은 한 적 없었다. 당연히 이곳에,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을 거라 막연히 추측했을 뿐이었다.

“그러니 준비해. 이곳으론 다시 돌아오지 않아. 마카오를 거쳐 이탈리아로 돌아갈 예정이야. 어쩌면… 오늘이 우리 셋이 마주 앉는 마지막 날일지도 모르겠군.”

줄리오가 가볍게 와인잔을 들어 보이며 창백하게 질린 하나를 응시했다.

“건배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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