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 (78/180)

<18>

떨리는 마음으로 플립폰을 열었다. 메시지함에 불이 들어와 깜빡거리는 게 보였다.

하나는 심호흡을 하곤 메시지함을 열었다.

만약 두이가 보낸 메시지가 맞다면, 아직 살아 있다는 의미. 그 사실 만으로도 그녀는 신께 기도하고 싶었다.

“이게 뭐지…?”

두이가 보내온 건 사진이었다. 화소가 현저하게 떨어져 선명하진 않지만, 발끝이 보이는 걸 보아 바닥을 찍은 거였다.

하나는 두이가 무엇을 이용해 연락을 하는 건지 궁금했다. 이렇게 간간이 연락을 할 수 있다는 건, 통신 장비를 갖추었거나 조력자가 있다는 뜻.

줄리오에게 전직 FBI가 연루되었다는 말을 들어서인지 어째 더 복잡해진 느낌이 들었다.

하나는 방 한편에 놓아둔 배낭을 열었다.

조금 전 줄리오의 부하가 돌려주고 간 그녀의 짐이었다. 그는 여권과 신분증을 제외한 모든 것을 돌려주었다. 하물며 총까지 들어 있는 것을 보곤 헛웃음이 나왔다.

어쨌든 하나는 노트를 꺼내 최대한 두이가 보내온 사진과 비슷한 그림을 그려 보았다. 픽셀을 모으듯 형태를 합치자, 일반적인 바닥을 찍은 게 아니란 느낌이 들었다.

“무운해운이네요.”

하나는 갑작스럽게 들려온 유은성의 목소리에 놀라 펜을 놓쳤다. 이렇게 감이 떨어졌나? 어떻게 다가서는 기척조차 느끼지 못한 건지….

그에 팔을 내보인 그녀가 인상을 찌푸렸다.

“소름 돋은 거 보이죠? 제발 기척 좀 냅시다. 일부러 그러는 거 아니면.”

“분명 노크했는데, 이하나 씨가 못 들은 거예요.”

“그래요?”

하나는 고개를 빼 의미 없이 방문을 힐끔 보았다. 그러곤 내키지 않는 투로 되물었다.

“이 바닥만 보고 어떻게 알아요?”

“바닥이 아니라, 로고. 문양이 새겨져 있잖습니까.”

그는 작은 화면을 툭 건드렸다.

유은성의 말대로 바닥 카펫에 반쯤 가려진 건 회사의 로고 같은 거였다. 흑백에 가까운 사진만 보고 한 번에 알아챈 그의 눈썰미에 하나는 내심 감탄했다.

“정말 그렇네요.”

“근데 이 핸드폰 뭡니까? 오래된 거 같은데.”

“그냥, 제 취향이에요. 아날로그 좋아해서.”

그가 미심쩍은 표정으로 그녀와 휴대 전화를 번갈아 보더니 창가로 가 밖을 살폈다.

하나는 정장 차림인 그를 지나 침대 앞 소파에 앉았다. 그녀에게 이 방은 꽤 위험한 곳이었다.

줄리오 파렌티와 이곳에서 저지른 일을 떠올리면 지금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그저 두이의 휴대 전화를 빼앗으려 한 것뿐인데, 대체 어떤 행동이 그의 스위치를 누른 건지.

게다가 그 남자는 힘을 흘리는 법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마치 제대로 된 훈련을 받은 사람처럼. 그건 총만 갈기는 마피아가 아니란 뜻이기도 했다.

“혹시, 유은성 씨. 줄리오 파렌티에 대해 좀 아세요?”

“음…. 줄리오 파렌티는 GIS 출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파렌티 가문의 장남이고 손속이 잔인하죠. 말했듯이 검은 머리카락에 민감합니다. 디테일한 건 모르겠지만, 모친과 관련이 있다고 하네요. 레드마피아를 증오하는 이유도 마찬가지고요.”

“모친이요? 그럼 다른 건요?”

“데이비드 메이어의 사망 사건 이후, 한동안 요양을 했습니다. 시칠리아에 있는 저택에 머물렀다고 들었습니다만, 사업은 계속해 왔다고 하죠.”

“그는 뉴욕 테러 사건 이후 의료용 마약 공급밖에 안 했다고 했어요. 적어도 합법적인 일들만 손댄 것 같더라고요. 아무래도 국제사회의 관심이 쏠렸을 테니 부담스러웠을지도요.”

“혹시, 그를 믿어요?”

생각에 잠겨 있던 하나는 묘하게 호전적인 은성의 말투에 고개를 틀었다. 창가에 기댄 그가 커튼을 닫는다. 이어 은은한 어둠이 깔리자 그녀가 질문했다.

“무슨 뜻이에요?”

“말 그대롭니다. 마피아를 믿어요?”

“신뢰와 믿음은 다르다는 전제하에, 난 줄리오 파렌티의 말을 믿어요. 하지만 그 남자 자체를 신뢰하진 않아요. 유은성 씨도 마찬가지예요. 나는 나와 내 가족만 신뢰해요.”

유은성은 잿빛 어둠 속에 서 있었다. 하나는 그의 눈빛에 오두막에서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그때와 비슷한 느낌이다.

“유은성 씨, 왜 날 경호한다고 했어요? 끼어들지 않는 편이 도와주는 건데.”

냉정하게 들릴 법했지만, 유은성은 조금도 타격받지 않은 투로 대답했다.

“걱정 마십시오. 이하나 씨, 방해 안 하니까.”

“그 약속 지켜요. 정말로 방해하면 안 돼요.”

“이런 대접, 진짜 처음인데 말입니다.”

“제가 좀 사람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어서요. 기분 나쁘면 지금이라도 로건에게 돌아가요.”

유은성은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더니 전화가 걸려온 건지, 발신자를 확인하곤 방에서 나갔다.

하나는 이곳에 온 지 3일 만에 처음으로 노트북을 열었다. 자료를 헤집은 흔적은 있지만, 다행히 모두 무사했다.

무운해운.

핫스팟을 찾아 연결한 그녀는 구글 검색창에 무운해운을 검색했다. 그리고 사업 규모와 대표 이사의 이름을 찾아낸 순간, 잠시 숨을 참았다.

대표 이사 강무진.

얼굴도, 나이도. 하물며 성별도 모르는 사람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의심의 화살이 한 곳으로 향한다. 이두이가 조사하던, 강무진….

그가 두이를 납치한 건지, 두이가 제 발로 찾아간 건지 몰라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지금 두이는 강무진의 배에 있다.

하나는 손톱 끝을 잘근대며 회사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다음 문제는 과연 어떤 배에 두이가 타고 있냐는 것이었다.

무운해운이 소유한 배는 무려 컨테이너선, 자동차 운반선, 가스선과 유조선, 살물선, 잠수함, 보조함, 여객선 등 통합 300척이 넘었다.

게다가 전 세계에 걸쳐 흩어진 배를 모두 뒤질 수도 없는 노릇. 캄보디아 근해에서 움직인 배를 찾아내기 위해선 특수 정보가 필요했다.

“하…. 산 넘어 산인데.”

하나는 비틀대며 침대 위에 풀썩 엎어졌다.

마른세수를 하는데, 손바닥에서 은은한 비누 향이 난다. 제 손에 비누칠을 해 주던 남자의 향기가 침대 위에도 묻어 있었다.

멍하니 눈을 깜빡이던 그녀는 발작이라도 일으키듯 벌떡 일어났다. 그러곤 유은성이 닫아 놓은 커튼을 걷고 창문을 열었다. 더운 바람이 후끈하게 불어 든다. 몸을 쓰기 좋은 최고의 날씨였다.

***

“차라리 여자를 사.”

줄리오는 소매를 걷다 말고 로렌조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부글부글 끓는 표정을 한 로렌조가 다가오더니 조금 전 하나가 있던 자릴 가리켰다.

“그 여자는 아니야. 네 꼴을 보라고!”

“내 꼴이 어떻지?”

“처참해.”

줄리오는 소매를 마저 걷은 뒤, 걸음을 내디뎠다.

“그리고 넌… 게빈의 동생을 죽이지 않았잖아.”

“내 가족이 죽였으니, 내가 죽인 거나 마찬가지야. 네가 살인을 했대도 내가 죽인 거고.”

“줄리오!”

로렌조는 가슴을 두드리며 신경질적으로 담뱃불을 붙였다. 그러며 조만간 여자들을 불러들이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실소한 그는 응접실에서 나와 2층으로 이어진 계단을 올랐다.

처음 만난 이하나는 자신을 죽이러 온 사신이었다. 핏물을 뒤집어쓴 여자의 광기 어린 눈빛에서 그는 해방감을 느꼈다.

어쩌면, 방아쇠를 당겨 주길 바랐던 것일지도….

그만큼 시선을 빼앗겼다. 그간 느껴 보지 못한 오싹함이 피부를 훑고 지나갔다.

“파렌티 씨.”

계단을 오르던 그를 부른 건, 2층 계단참에 기대서 있던 유은성이었다. 옅게 쌍꺼풀진 긴 눈매와 날렵한 이목구비가 빌어먹을 레드마피아 놈을 떠올리게 한다. 다른 점이라면, 유은성의 머리 색이 아주 까맣다는 것. 그래서 더욱 불쾌하게 느껴졌다.

“무슨 일이지.”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내게?”

줄리오는 천천히 계단을 올라 유은성과 마주 섰다.

“하나를 구해 주셨더군요.”

“개소릴 하는군.”

“하긴, 그녀가 강하긴 하죠. 그러나 약할 때도 있습니다.”

여전히 부어 있는 입술의 상처를 만지작거리던 줄리오의 눈동자가 유은성에게 향했다.

“무슨 뜻이지?”

그러자 난간을 짚은 은성이 돌연 짜증 난다는 표정으로 한걸음 다가왔다.

“아무리 당신이어도, 남의 것에 함부로 손대면 안 되죠.”

“이하나가… 네 것이다?”

“목과 손에 난 자국, 당신 짓 아닌가?”

줄리오는 큭큭대며 웃기 시작했다. 그러곤 입술을 문지르던 손을 주머니에 꽂아 넣은 채 유은성을 스쳐 지나갔다.

“재미 좀 보려 했는데, 흥미를 잃었어. 잘 해봐. 플라토닉하고 아름다운 사랑, 기대하지.”

***

“정말, 여기 써도 돼?”

하나의 질문에 말단으로 보이는 이탈리아노가 고개를 끄덕이며 ‘si.’라고 답한다.

그녀는 실내 수영장 안에 들어서며 드레스 셔츠 단추를 풀었다. 벌써 3일째, 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하나는 속옷 차림으로 레인 앞에 섰다. 유리로 마감된 천장에서 은은한 빛이 흘러들어, 실내는 조명하나 없이도 밝은 편이었다. 가볍게 몸을 푼 그녀는 숨을 고른 후 주저 없이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포물선을 그리며 완벽하게 잠수한 그녀가 무호흡 상태로 길게 뻗어 나간다.

로건을 불러 정체를 확인하고 포로에서 조력자로 승격된 그날부터였다. 낯선 여자들이 찾아든 건.

‘왜 이렇게 시끄러워?’

‘보면 몰라? 여자들을 불렀어. 피를 봤으니, 즐길 때도 있어야지.’

‘이런 상황에?’

‘어이, 너와 우린 달라. 동생을 찾으려 혈안이 된 건 너뿐이고, 우린 이제 곧 이탈리아로 돌아갈 거라고.’

‘좋아. 그럼 줄리오를 만나게 해 줘.’

‘하아, 시뇨리나. 여자들을 불렀다고 했잖아. 그런데 줄리오를 어떻게 만나.’

‘…무슨 소리야?’

‘줄리오의 여자들 역시 불렀단 소리야.’

‘얼마나 오래 기다려야 하는데?’

‘줄리오가 만족할 때까지.’

묻고 싶은 말도 있고, 알려 주고 싶은 것도 있었다.

여자들이 돌아갈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했지만, 그로부터 3일이 지나도 줄리오는 하나에게 독대의 기회를 주지 않았다.

아직까지 만족을 못 한 건지, 로렌조가 제게 거짓말을 한 건지 모르겠다. 그녀가 아는 사실은 여전히 별장엔 여자들이 있고, 밤낮으로 붙어먹는 소리가 사방 천지에서 들려온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오늘은 건물과 떨어진 곳에 따로 마련된 실내 풀을 찾았다.

잠영으로 레인 끝에 다다른 그녀는 조금도 지친 기색 없이 턴을 했다. 그러곤 벽을 밀어내며 출발 지점으로 돌아왔다.

“푸하!”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자 참았던 숨이 단번에 터져 나온다. 가쁜 숨을 몰아쉰 하나는 입구에서 들려오는 왁자지껄한 소리에 인상을 썼다.

그것은 남자와 여자가 한데 어울려 내는 소리였다. 혹시, 여기로 오는 건가?

하나는 이곳마저 빼앗겼다는 짜증을 누르며 물 밖으로 나갔다. 미역 줄기처럼 들러붙은 머리카락을 모아 꾹꾹 짜내며 걸음을 옮기던 때였다.

“그 꼴을 하고 어딜 가려고.”

목소리는 예상외의 방향에서 들려왔다. 천천히 돌아선 그녀는 술잔을 든 채 선베드에 기댄 줄리오를 발견했다. 그런 그의 곁엔 검은 머리카락에 흰 피부를 가진 여자가 반쯤 헐벗은 상태로 앉아 있었다.

“이리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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