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볼일을 마치고 욕실을 나선 하나는 그의 손에 들린 바지와 속옷을 턱 끝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쪽이 벗겼으니, 다시 입혀.”
“손은 닦았나?”
“장난해? 수갑을 풀어 줘야 닦든 말든 하지!”
“아….”
줄리오는 어처구니없어하는 그녀를 다시 욕실로 데리고 갔다. 그러곤 세면대 앞에 세우더니 수도꼭지를 열었다.
손이 뒤로 묶인 탓에, 하나는 고스란히 그에게 안긴 자세가 되어 버렸다. 그녀의 동그란 이마와 입술이 줄리오의 가슴팍에 눌린다. 소독약 냄새와 애프터 셰이브 향기가 섞인 체향이 숨을 쉴 때마다 밀려들었다.
곧 미지근한 물이 손바닥을 간질인다.
그는 아이의 손을 닦아 주듯, 비누칠까지 꼼꼼하게 해 주었다. 미끌미끌한 감촉이 손가락 사이를 파고든다. 깍지를 끼워 잡는 것처럼 교차되었다가 거품을 내며 빠져나갔다.
상체를 조금 기울인 탓에 그녀의 귓가 즈음에 닿은 그의 입술.
기분이 이상했다. 분명, 순순히 안긴 듯한 자세 때문일 터.
비누가 묻은 손바닥을 엄지로 문질러 편 남자가 수도꼭지 방향으로 손을 끌었다. 그 때문에 팔이 당겨지며 몸이 젖혀진다. 자연스럽게 턱을 들자, 미지근한 물에 비누 거품을 씻어내던 그가 속삭였다.
“밑도 닦아주길 원해?”
어쩐지, 너무 정상적이다 했지.
“그쪽이 성욕 넘치는 나이인 건 알겠는데, 너무 노골적이면 오히려 안 꼴리는 거 몰라?”
“아, 그럼 은근하게 꼬시면 되나?”
“아니. 아무리 꼬셔도 그쪽이랑은 안 할래. 목숨 아까워서, 못하겠어.”
“그건 내가 할 말 아닌가? 키스하다가 칼 맞은 사람은 난데.”
“난 목이 졸렸거든. 이거 안 보여? 시퍼렇게 멍든 거.”
“잘 어울려.”
미친놈.
“그래, 그쪽도 칼빵이 참 잘 어울리네.”
하나는 어깨를 비틀어 그의 가슴팍을 툭 밀어냈다. 그러자 키득 웃으며 물러선 남자가 타월을 꺼내 물기를 닦아 주었다. 그녀는 성큼성큼 욕실을 빠져나와 침대 위에 털썩 앉았다. 그러곤 바닥에 떨어진 바지와 속옷을 발끝으로 가리켰다.
“입혀 줘.”
적신 수건을 들고 욕실에서 나온 그가 바닥을 힐금 보더니, 하나의 어깨를 툭 민다. 무방비 상태로 균형을 잃은 그녀가 뒤로 넘어갔다.
다시 일어나려 했지만, 가슴을 가로지른 남자의 팔이 그러지 못하게 막았다.
“뭐 하는…!”
하나는 가랑이 사이에 닿은 축축한 감촉에 소스라치게 놀라 얼굴을 시뻘겋게 붉혔다.
“벌려.”
젖은 수건이 가지런한 음모를 지나 도톰하게 갈라진 틈새로 파고든다. 하나는 허벅지에 힘을 주었다. 수건 한 장을 사이에 두고 그는 천천히 음부를 문질렀다.
그녀는 가쁜 숨만 몰아쉬며, 나른한 눈빛을 직시했다.
“포로한테 이런 서비스도 해 주고. 대단한 봉사 정신인데?”
그녀의 붉어진 눈가에 시선을 고정한 그의 입술이 느슨하게 올라간다.
“어디까지 봉사할 수 있는지 보여 줄까?”
“아니. 미안하지만, 나 중산층이거든. 봉사는 필요 없어.”
줄리오는 웃음을 참는 게 분명한 얼굴로 고개를 틀었다. 그러더니 젖은 수건을 바닥에 툭 던지곤 그녀의 위로 올라왔다. 하나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무릎을 벌려 가두더니, 시퍼렇게 멍든 목을 어루만진다.
“이 목을 꺾어버릴 걸 그랬어.”
시트를 지탱한 손등 위로 푸르스름한 핏줄이 도드라졌다.
“죽이지 않길 잘했단 생각을 하게 될 거야.”
“얌전하게 굴면, 선물을 줄 생각인데.”
하나는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주머니에 손을 넣은 그가 꺼낸 물건을 본 그녀의 두 눈이 커다랗게 뜨인다.
“줘!”
줄리오가 꺼낸 건 두이의 휴대 전화였다. 검은 플립폰을 눈앞에서 흔들어 보인 그가 피식 웃더니, 다시 주머니로 넣으려 했다.
‘안 돼.’
붉은빛이 깜빡이는 게 보인다. 메시지나 부재중 연락이 도착했다는 뜻.
마음이 급해진 하나는 충동적으로 상체를 세워 그의 입술로 직진했다. 살짝 벌어진 남자의 입술을 뭉개며 다릴 벌려 허릴 감쌌다. 그의 균형이 무너지는 순간, 있는 힘을 다해 몸을 회전시켰다.
“하!”
순식간에 뒤바뀌어 버린 위치. 그를 깔아뭉갠 그녀가 환해진 얼굴로 휴대 전화를 입에 물려 할 때였다.
하나의 뒷머리 쪽으로 커다란 손이 파고든다. 강한 힘에 뒷덜미를 잡힌 그녀는 속수무책으로 끌려가 줄리오 파렌티와 입술을 부딪쳤다.
이와 입술이 부딪쳤는지 얼얼한 감각이 묵직하게 퍼진다. 훅 밀려들어 온 혀가 입 안을 헤집기 시작했다. 허리와 뒷머릴 감싼 그로 인해 하나는 옴쭉도 하지 못한 채 혀를 빨렸다.
숨이 막힐 정도로 끈질기고 집요한 키스였다. 그때, 허리를 감쌌던 손이 아래로 내려가 그녀의 엉덩이를 쥐었다.
강하게 움켜쥔 피부에 빨간 자국이 생겨난다. 충동에 잡아먹힌 눈빛이 뜨겁다. 하지만 그것은 애정을 기반으로 한 열렬한 시선이 아니었다.
엉덩이 골을 더듬듯 움직이던 손이 촉촉하게 젖은 틈새를 벌렸다.
하나는 찰나, 그의 입술을 있는 힘껏 깨물었다. 왈칵 피 맛이 난다.
“파렌티!”
마치 흡혈귀가 된 것처럼 입가가 붉다.
열락에 취해 있던 그의 눈빛이 서서히 돌아오자, 하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상체를 세웠다.
“나를 네 정부와 착각하지 마. 이딴 짓은 그 여자한테나 가서 해.”
줄리오는 씩씩거리는 그녀의 입술로 손을 올렸다. 그러곤 제 피가 번진 부분을 느릿하게 문질렀다. 찰나의 시간이 억겁처럼 길게 느껴졌다.
“그렇군. 너 따위가… 그녀와 닮았을 리 없지.”
순간, 묘하게 시큰거리기 시작한 가슴.
몸을 일으킨 남자는 주머니에서 꺼낸 열쇠로 그녀의 수갑을 풀어 주었다.
하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를 따라 시선을 움직였다. 줄리오는 언제 흥분했냐는 듯, 평소와 다름없이 서늘한 미소를 머금은 채였다.
두이의 휴대 전화를 돌려준 그가 침대 아래로 내려가 바닥에 떨어진 속옷과 바지를 툭 던진다.
“입고 나와. 손님이 와 있으니.”
“손님이라니?”
하나는 두이의 휴대 전화를 소중하게 품에 안은 채 물었다. 그러자 그 모습을 무심하게 응시하던 그가 돌아섰다.
“네가 포로 생활을 끝낼 수 있게 도와줄, 구원 투수.”
***
방 밖에서 기다리던 줄리오와 함께 1층으로 내려온 그녀는 응접실 소파에 앉아 있는 세 남자를 발견하곤 헛바람을 들이켰다.
“어?”
놀란 건 그들도 마찬가지인 듯,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벌떡 일어났다.
손님은 로건 발렌타인과 오슬로 한센. 그리고 유은성이었다.
피맺힌 입술을 손수건으로 누른 줄리오가 걸음을 옮기자, 그녀도 자연스럽게 그를 따라 움직였다. 세 남자의 시선은 줄리오의 왼쪽 손목에 채워진 수갑에 닿아 있었다. 남은 한쪽이 채워진 건, 이하나의 오른쪽 손목.
로건은 웃음기 없는 표정으로 하나의 얼굴을 응시했다. 턱 아래 시퍼런 멍 자국만 보더라도 그녀가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 알 수 있었다.
“앉지.”
줄리오의 말에 무표정하게 서 있던 유은성이 말문을 열었다.
“이하나 씨는 이리로 와요.”
그에 수갑이 채워진 손을 들어 보인 하나가 말했다.
“가고 싶어도 못 가요. 꼴이 이래서. 나, 지금 포로예요.”
태연자약한 반응에 오슬로의 우락부락한 얼굴이 시뻘겋게 변했다. 당장에라도 줄리오 파렌티의 머리통을 날려 버리고 싶은 기색이었다.
“파렌티 씨, 혹시 이하나 씨가 실수한 게 있습니까?”
로건은 능숙하게 대외용 미소를 띤 채 물었다.
“아, 보기에 좋지 않겠군. 하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자유롭게 풀어 놨다가는 내 부하들 목숨이 경각에 달릴 것 같아서.”
로건과 오슬로는 작게 탄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한 태도에 하나가 혀를 찼다.
“세 분, 여긴 어쩐 일이세요?”
“파렌티 씨가 연락하셔서. 근데… 괜찮은 거 맞아?”
“괜찮아요, 난…. 파렌티 씨의 어깨에 칼을 쑤셨거든요.”
“뭐?”
“진짜 괜찮아요.”
하지만 빨갛게 충혈된 눈을 발견하지 못한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하나는 최대한 그들의 시선을 피했다.
그러자 수갑으로 연결된 손을 불쑥 뻗은 줄리오가 그녀의 눈가를 어루만진다.
“손수건 필요하면 말해. 빌려줄 테니까.”
“닥치지? 질문이나 해. 내 정체가 궁금하다며.”
가볍게 고개를 주억인 그가 다리를 꼬더니, 표정 관리에 능숙한 로건에게 물었다.
“이하나가 One입니까.”
순간, 로건과 오슬로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게 왜 중요합니까?”
“질문은 내가 먼저 했습니다. 로건 발렌타인 씨, 이하나가 정말로 One입니까?”
유은성의 눈빛이 짙어진 걸 알아챈 건 로건 뿐이었다.
로건은 마지못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아닙니다만, One이라고 불렸던 적이 있습니다.”
“FBI가 아니란 뜻이겠군요.”
“아닙니다.”
하나는 그것 보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줄리오는 부어 버린 입가를 만지작거리며 세 남자의 얼굴을 천천히 훑었다. 그러다 이하나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 유은성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익히 알고 있는 종류의 눈빛이다. 동류는 서로를 알아본다고 했던가.
하나를 응시하던 유은성은 줄리오와 시선을 맞추며 입꼬릴 느슨하게 끌어 올렸다.
“그럼…. 발렌타인 데이에 의뢰를 하나 하고 싶은데.”
줄리오는 테이블에 놓여 있던 스카치를 잔에 따랐다. 가득 채워지는 액체를 보는 그의 눈빛이 게임을 앞둔 사람처럼 위험하게 빛났다.
“이하나 씨를 경호해 줄 한 명이 필요합니다.”
그 말에 가장 놀란 건 하나였다.
“경호라니? 나한테요?”
“제가 하죠.”
막 술잔을 입에 댄 줄리오의 눈동자가 유은성 쪽으로 향했다. 이번엔 오슬로와 로건이 되레 놀라며 주먹을 움켜쥔다.
“유은성 씨, 그건….”
“제가 하겠습니다, 로건 씨. 함께 오두막에서 지내며 정이 들기도 했고, 시간이 제법 많이 남아서요.”
하나는 태연히 스카치를 삼키는 줄리오의 잔을 빼앗았다. 그러곤 얼굴을 가까이 댄 채 이를 갈았다.
“왜 끌어들여. 내 일이야. 아무도 끌어들이지 마.”
하지만 무시당했다. 그녀가 빼앗아간 잔에 입술을 댄 그가 고개를 기울여 술을 삼킨다.
씩씩거리던 하나는 있는 힘껏 술잔을 던졌다.
벽에 부딪혀 산산이 부서져 버린 술잔의 파편이 사방으로 퍼진다.
“줄리오!”
“이러니, 내 부하들을 붙일 수는 없지. 마피아도 목숨 귀한 줄은 알거든. 그쪽, 이름이 뭐지?”
줄리오의 질문에 흘러내린 앞머리 사이로 하나를 보던 은성이 오른손을 내밀었다.
“유은성이라고 합니다.”
줄리오는 악수 대신 빈 잔을 쥐여 주었다. 그러곤 술을 따라 준 뒤, 고개를 까딱였다.
유은성은 줄리오가 따라 준 스카치를 입에 털어 넣으며 내리깐 눈으로 이하나를 보았다.
줄리오 파렌티의 손에 꽉 붙들린 그녀의 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