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 (76/180)

<16>

양손을 묶인 채 의자에 앉혀졌다. 발악하듯 힘을 줬지만, 그럴수록 수갑은 더욱 죄어들어 손목엔 빨간 자국이 남았다.

의사는 줄리오의 어깨를 소독하며 맞은편의 그녀를 힐끔댔다. 하필 오염된 디너 나이프를 꽂은 탓에 상처 치료에 애를 먹고 있었다.

“꼴 좋다.”

하나는 제 목에 냉찜질을 시도하는 간호사의 손을 어깨로 쳐냈다.

“내 몸에 손대지 마십시오.”

“그래도, 혈관이….”

“손끝 하나 대지 마요. 이대로 괜찮으니까.”

치료를 거부하는 그녀의 태도에 줄리오가 코웃음 치며 고개를 기울인다. 상의를 벗은 채 의사에게 어깨를 맡긴 그는 생살을 꿰매면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되레 지루하다는 듯 팔걸이에 비스듬히 기대어 담배를 문다. 불붙은 담배 연기가 자욱하게 뿜어졌다. 비흡연자의 고통을, 저 자식이 알 리가 없겠지.

“보내 줘.”

하나는 줄리오를 똑바로 노려보며 말했다. 그러자 창문 방향을 응시하던 그의 시선이 움직인다.

“안 되겠는데.”

“네가 안 된다고 하면, 내가 못 나갈 거 같아?”

“아니, 충분히 나갈 것 같아. 그래서 묶어 놓은 거, 몰랐어?”

“풀어. 분명… 경고했어.”

“그러게 내 목을 노렸어야지. 어깨를 쑤시니 이런 일이 생기는 거야.”

그는 엄지로 입가에 묻은 피를 문지르곤 혀로 핥았다. 빌어먹을 마피아.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고개를 젖혔다. 고급 리조트 특유의 화려한 천장, 라탄으로 만든 거대한 조명이 구(毬)처럼 둥둥 떠 있다.

뭐가 잘못된 건지 이제 알 것 같다.

그녀는 줄리오 파렌티를 일반적인 마피아로 정의했었다. 그래서 조금만 자극하면 쉽게 복수에 동참할 거라고. 위험이 따르겠지만, 그 정도는 감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모두 오산이었다.

줄리오 파렌티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아까 그 남자, FBI라고 했나? 게빈 스미스?”

하나는 천장을 바라보며 담담히 물었다.

“정보가 사실이라면, 지금은 FBI가 아니겠지.”

“그럼 어떻게 찾을 수 있는지 알아?”

“마음먹으면, 찾을 수 있을지도.”

“그 남자는 왜 널 죽이려 하는데?”

“내가… 그놈의 동생을 죽였거든.”

그녀는 천천히 젖혔던 고개를 내렸다. 줄리오 파렌티는 조금의 죄책감도 느껴지지 않는 표정으로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느릿하게 새어 나온 연기가 두 사람의 시야를 흐리게 만든다. 뒤로 묶인 하나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때마침 치료를 마친 의사가 메모지에 무언가를 적어 로마노에게 내민다. 근처 약국을 찾아가 처방 약을 받아오라는 것 같았다.

하나는 의미 없는 눈싸움을 그만두기로 했다.

정말 남자의 동생을 죽였는지 몰라도, 그의 답은 엄연한 도발이자 시험이었다. 그래서 먼저 시선을 피했다.

“그럼, 나는 언제 풀어 줄 거야.”

“내가 널 믿을 수 있을 때. 그때까지 널 인질 취급하기로 했어.”

“하, 언제는 인질이 아니었던 것처럼 말하네?”

“그럼, 포로라고 해 두지. 언제든 죽일 수 있는.”

몸을 일으킨 그가 새 셔츠를 받아 팔을 꿰었다. 그러자 뒤로 다가온 남자 둘이 그녀를 잡아 일으켜 세운다.

하나는 잠시 고민했다. 곁의 두 놈을 제압하면, 방에 남는 건 줄리오 파렌티와 의사, 로마노뿐이다. 무기가 없다는 가정하에, 이대로 받아 버린 뒤 창문으로 뛰어내리면….

그녀의 눈동자가 창문 방향으로 움직일 때였다. 총열이 움직이는 소리와 함께 뒤통수에 차가운 총구가 닿았다.

“그쪽 생각은 모두 읽혀. 그러니 얌전히 방으로 가. 우리도 무례하게 굴지 않을 테니, 예의를 지켜.”

하나는 입술을 잘게 깨물며 로마노를 돌아보았다.

“마피아도 어린애와 여자를 죽이나 봐?”

“상황에 따라 다르지.”

“그쪽… 나 싫죠.”

“여기서 당신 좋아하는 사람은 없어.”

“다행이네.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서.”

의미를 읽으려는 로마노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새겨졌다.

“방으로 안내해. 그리고 나라면, 절대 총을 그런 식으로 안 잡을 거야. 난… 분명 경고했다? 다시는 내 뒤통수에 총구 박지 말란 뜻인 거 알지?”

줄리오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어깨를 들썩였다. 손으로 눈과 입을 가리고 큭큭거리며 웃는 남자. 그에 로마노가 짜증스러운 손길로 그녀의 어깨를 당겼다.

“따라와.”

***

거울을 응시하며 서 있던 줄리오는 문을 열고 들어오는 로마노에게 물었다.

“이하나는.”

“말도 마! 빌어먹을…. 침대에 묶어 놨어. 그렇게 안 하면 2층에서 뛰어내리고도 남을걸?”

“흠…. 그래.”

줄리오는 한쪽에 둔 이하나의 가방을 열었다. 그 안에는 휴대 전화 두 개와 한국어가 잔뜩 적힌 노트 한 권. 그리고 USB를 비롯한 여분의 탄창과 비상약 등이 들어 있었다.

그는 그중 프로젝터를 꺼내 들었다. USB 안의 영상은 확인했지만, 이건 처음이었다.

로마노는 줄리오를 대신해 능숙하게 기계를 조작했다. 그러자 붉은 선으로 얽히고설킨 관계도와 몇 명의 이력이 벽면에 뜬다.

줄리오는 중심에 놓인 자신의 사진을 발견하곤 피식 웃었다.

“허스키는 유리 페트로프일 테고…. 게빈 스미스도 조사했군. 이건 뭐라고 읽지?”

그 질문에 로마노는 휴대 전화 사전을 찾아 한글 이름을 검색했다.

“강무진.”

“알아볼 수 있나?”

“해 보지.”

줄리오는 팔걸이에 팔꿈치를 괴곤 자신의 입가를 어루만졌다. 아직도 피 맛이 입 안에 맴돌았다. 여자와의 키스에서 피 맛이 난건 처음이다.

‘발렌타인 데이, One. 그쪽은 모를걸? 씨발, 내가 뭐라고…. 나도 내가 FBI 같은 거였으면 좋겠네.’

발렌타인 데이는 영국의 PMC다. 현재는 서유럽과 북유럽까지 세력을 확장해, 민간 군사 기업의 정점에 선.

그곳 소속 용병들의 정보는 대외적으로 알려진 것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One이라는 첩보원은 제법 이름을 날렸다. 우스갯소리로, 친구의 뒤통수를 치기 위해선 One을 아군으로 만들라는 말이 떠돌 만큼.

“로건 발렌타인의 연락처, 알아봐.”

“그놈은 왜.”

“이하나가… 발렌타인 데이 출신이더군.”

로마노는 못들을 소릴 들은 사람처럼 얼굴을 구겼다. 이어, 어쩐지 위험한 여자 같았다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줄리오는 이하나의 가방에서 나온 두 개의 휴대 전화를 챙겨 일어났다.

하나는 평범한 스마트폰이고 다른 하나는 15년 전 나온 구식 전화기였다.

여섯 바늘을 꿰매 뻐근한 어깨를 좌우로 움직여 푼 그가 문을 열다 말고 물었다.

“근데, 침대에 묶어 놨다고 했나?”

“응.”

“하루 정도는 그냥 둬. 물 한 모금 주지 말고.”

고개를 끄덕이며 USB 속 자료를 확인하던 로마노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화면엔 파란색 야구 모자를 눌러쓴 남자가 건물을 나서고 있었다.

“근데 이거, 게빈 스미스인 것 같은데…. 그래서 아까 그 여자가 게빈에 대해 물은 건가?”

줄리오는 방문을 활짝 열곤 걸음을 내디뎠다.

“찾아야 할 사람이 많겠어, 로마노. 죽여야 할 놈들도, 많고.”

손에 든 휴대 전화의 불빛이 깜빡이고 있었다.

***

철컹, 소릴 내며 수갑이 침대 기둥을 긁었다.

수갑에서 손을 빼려면 엄지 뼈를 분리해야 한다. 그 고통이 얼마나 끔찍한지 알기에 하나는 욕설만 삼키며 머리 위의 기둥을 움켜쥐었다.

“미친놈들…. 도망 안 간다니까.”

괜히 어깨를 찔렀나?

만약 줄리오에게 손대지 않았다면, 이렇게 묶이는 대참사는 벌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벌써 하루가 지났다. 지난밤엔 목이 터질 듯 소릴 질렀고, 새벽엔 화장실에 가고 싶다며 발버둥 쳤다. 하지만 방문을 열어 주는 사람은 없었다.

악을 써 봤자 들어주는 사람도, 도와줄 사람도 없다. 이대로 줄리오 파렌티의 마음이 바뀌길 기다리는 수밖에.

‘물이라도 마셔둘걸….’

하나는 마른 숨을 내쉬며 지난 새벽 정리한 것들을 다시 떠올려 보았다.

줄리오 파렌티 덕분에 새로운 정보를 얻긴 했지만, 현재로선 너무나 한정적인 것들에 의지해야 했다. 두이가 만난 사람이 정말 게빈 스미스라면 관계도 안에 있는 인물 모두가 그녀의 타깃이었다.

물론, 이미 저세상으로 가버린 놈들을 제외하면… 남은 건 강무진과 레드마피아인 유리 페트로프. 둘 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놈들이다.

하나는 불현듯 유리 페트로프와 줄리오 파렌티가 하나의 선으로 묶여 있던 이유를 깨달았다.

“…치정 한번 제대로네.”

하지만 유리 페트로프 같은 유명인이 줄리오 파렌티를 사칭할 가능성은 낮다.

그렇다면 남은 사람은 강무진 한 명이었다. 그것도 마음껏 사칭해도 엮이지 않을, 완벽한 타인.

만약 강무진이 줄리오 파렌티를 사칭해 마약을 유통해 왔다면 두이의 행동들이 이해가 됐다.

하나는 실타래를 풀듯 사건 개요를 짚어 나갔다. 물론 이두이가 결백하다는 전제 없이는 불가능한 추론이었지만, 그녀는 제 동생을 믿었다.

“문제는 FBI인데….”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천장의 한 점을 고요하게 노려볼 때였다. 문이 열리더니 산뜻한 애프터 셰이브 향이 풍긴다. 고개를 들자, 묶여 있는 그녀를 발견한 줄리오가 헛웃음을 흘리며 걸어 들어왔다.

“웃겨? 웃기면 좀 풀어주지? 쪽팔린데.”

“안 웃겨. 보기 좋은데? 잠은 좀 잤나?”

“너 같으면 잤겠니? 빨리 풀어줘. 진짜 도망 안 간다니까?”

“도망칠 게 무서워서 그런 건 아닌 거 같은데….”

“나 화장실 급하다고!”

그가 굳게 닫혀 있던 커튼을 열었다. 창 너머, 동쪽 하늘에서 해가 뜬다. 의식하지 못한 사이 아침이 되었다.

하나는 다시 몸에 힘을 풀었다. 그러며 반항하듯 뇌까렸다.

“그냥 싸버릴걸.”

“17만 달러짜리 매트리스를 망가트리려면 그러든지.”

“나한테 교체 비용 청구라도 하게?”

“아니, 그 자리에 계속 묶여 있어야 하니까 하는 말이야.”

다가온 그가 경악하는 그녀의 얼굴 옆에 앉았다. 그러곤 머리 위로 모아 당겨진 손목을 한 손으로 움켜쥐었다. 하나는 기대에 찬 눈으로 수갑이 채워진 방향으로 고개를 젖혔다. 이제 곧 풀려날 거란 희망 때문인지, 정말로 다리 사이가 저릿해 몸을 배배 꼬기 시작했다.

“빨리.”

숨이 가빠지고 얼굴이 달아오른다.

줄리오는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냈다. 허벅지를 모은 채 입술을 깨무는 그녀의 가슴이 빠르게 들썩인다.

그는 탁하게 읊조렸다.

“돌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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