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0> (60/180)

<60>

캄보디아에서 출발한 전용기를 타고 이탈리아 남부 시칠리아까지, 10시간. 아니? 11시간이 훌쩍 넘는 비행을 하는 동안 하나가 한 일은 기내식을 먹고, 자고, 싸고, 또 먹고 자고. 그러다가 갑자기 뭔가에 홀린 듯 비행기 후미에 처박혀 줄리오 파렌티와 그렇고 그런 불미스러운 짓거리를 자행한 것이 다였다.

오랜만에 병으로 마신 와인이 문제다. 모든 것이 끝났다는 후련함 때문일까. 그녀는 평소보다 빨리 취했고 줄리오 파렌티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변태 같은 놈.

그렇게 지끈대는 두통을 느끼며 눈을 떴을 땐, 기체 아래 펼쳐진 코발트 빛 지중해 풍광에 눈이 멀 것 같은 감동을 받았다.

사실 그녀가 시칠리아에 대해 아는 건 크게 없었다. 마피아의 도시, 이탈리아 본섬에서 뚝 떨어진 섬. 제주도의 10배 크기란 것 정도?

하지만 전용기에서 내려 처음으로 시칠리아에 발을 디디는 순간 깨달았다. 이곳은 마피아의 도시가 아니었다.

고즈넉한 휴양지이자, 역사와 예술의 섬. 그리고 아름다운 항구도시였다.

“시칠리아는 마피아의 도시가 아니라 나의 고향일 뿐이야. 이제 이곳에 마피아는 없어.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범죄를 저지르는 마피아는 없지. 그러니 여기는 천국이라고 해야 할까.”

탁 트인 마짜로 해안 도로를 따라 달리는 내내 하나는 창밖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새까만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게 마음에 들었는지, 불쑥 셔츠를 잡아 내린 그가 그녀의 어깨를 깨물었다.

“읏, 하지 마. 구경할 거야.”

“에트나가 보여? 1년 내내 연기가 나지. 제우스가 100개의 머리를 가진 티폰을 에트나에 가뒀어. 헤파이토스의 대장간도 저 아래에 있으니, 저렇게 끊임없이 타오르는 거야.”

하나는 할짝대는 감각에 피식피식 웃으며 고개를 비스듬히 틀었다.

“너, 그거 아니? 달에 떡방아 찧는 토끼가 두 마리 사는 거.”

“장난해?”

“네가 먼저 시작했다? 로맨틱한 설명도 좋지만, 리얼하게 해. 과학적인 사실이 나는 더 좋아.”

“흠…. 그럼, 내가 깨물 때마다 여길 세우는 걸 과학적으로 설명하면 되나?”

손을 가슴 앞으로 가져온 그가 도드라진 유두를 부드럽게 덧그린다. 하나는 웃음을 꾹 참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 몸에 대한 고찰은 패스.”

운전대를 잡은 로렌조가 룸미러를 통해 두 사람을 힐끔 보곤 욕설을 쏟아냈다. 하지만 이내 둘의 싸늘한 시선을 받으며 다시금 운전에 집중한다.

타오르미나 지역의 언덕길을 가득 채운 검은 SUV 다섯 대. 언덕의 꼭대기에 오른 차들을 발견한 육중한 철문이 열렸다. 덕분에 차들은 속도를 줄이지 않은 채 곧장 고성과도 같은 저택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하나는 신전을 본떠 만든 듯한 중앙 홀을 발견하곤 헛웃음을 터트렸다.

“연봉 100배, 너무 적은 거 같아. 1,000배 해 줘.”

억울한 말투에 큭큭대며 웃음을 터트린 그가 로렌조에게 손짓해 차에서 내리게 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거칠게 내린 로렌조가 담배를 꺼내 물더니, 몰려드는 사내놈들에게 고갯짓한다.

하나는 그대로 시트에 짓눌렸다. 그녀를 마주 안은 그가 웃음을 멈추지 않으며 자그마한 귓불을 깨물고 목덜미를 핥아 내려가 콱 씹었다.

얇은 반바지 안으로 들어온 손이 젖은 틈새를 문지르며 만족스러운 듯 탁하게 속삭였다.

“1,000배 해 줄 테니 이런 거 말고 내가 원하는 거 입어. 그래 준다면 1,000배가 뭐야. 다 가져, 너.”

“으음, 제안은 좋은데…. 그래도 손해 보는 기분이야.”

“까탈스럽긴.”

하나는 어깨를 으쓱 올리곤 줄리오의 목덜미에 팔을 둘렀다. 그러자 손을 뺀 그가 허리춤을 끌어안으며 서서히 안은 팔에 힘을 준다.

“까탈스러워도 좋으면서. 좋아, 뭘 입힐 건데?”

***

괜히 쫄았네.

하지만 일평생 절대 입지 않았을 옷이라는 것엔 이견이 없다. 차라리 이리저리 다 찢겨서 야하기만 했다면 괜찮았을지 모른다.

이건 뭐, 오드리 헵번이 입었을 법한 정숙한 차림인 것도 모자라 머리카락까지 길게 늘어트려 목덜미를 가려 버렸다.

하나는 와인잔을 들며 숨 막히게 아름다운 주위를 둘러보았다. 영감의 생일 파티라고 들었건만, 장소는 어느 섬의 버려진 신전 같은 곳이었다.

천장이 없어 뻥 뚫린 곳. 곳곳이 무너진 기둥 너머로 보석 같은 바다가 출렁이고, 라틴계 미녀들이 반쯤 발가벗은 채 새파란 풀 안으로 뛰어든다.

대한민국의 흔한 영감님들 생일 파티와는 확실히 다르다. 하나는 흘끔대는 여자들의 시선이 제 옆의 남자에게 향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눈치챘다.

“나만 옷 입고 있는 거 같아.”

그녀의 투덜거림에 와인병을 빼앗은 줄리오가 고개를 들이밀더니 입술을 깨물었다.

“걱정 마. 돌아가면 입고 있을 시간 따윈 안 줄 거니까.”

“더운데.”

“영감 얼굴만 보고 갈 거야. 오래 있을 생각 없어.”

“혹시, 영감이란 분이 저분이야?”

멀리서 백발에 가까운 남자가 젊은 남자들의 부축을 받으며 다가오는 게 보였다. 그에 고개를 끄덕인 줄리오가 일어났다. 따라 일어난 하나는 하나도 닮지 않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자 사람 좋게 웃으며 다가오던 노인이 그녀를 보곤 얼굴에서 미소를 지웠다.

“기어이 외지인을 데려왔군, 줄리오. 가문에 외지인을 들인 적은 없다고 그리 말했건만.”

쯧, 하고 혀를 찬 노인이 줄리오의 맞은편에 앉았다.

하나는 대놓고 자신을 무시하는 노인을 내려다보며 피식 웃었다. 어차피 유럽 문화권에서의 차별은 질리도록 겪어 봤던 터라, 이정도는 애들 장난 축에도 끼지 않았다.

“그럼 제가 첫 번째가 되겠군요. 말씀드렸다시피, 이 여자가 아니면 이제 서질 않아서. 영감님은 결정권이 없네요.”

“허, 줄리오. 언제 철들게야. 저런 쪼그만 계집애를 어디에다가 써. 성인은 맞아?”

“영감님이 부른 쟤네보다 나이 많습니다. 영감님이야말로, 70번째 생일이 너무 경박한데요? 우리 클래식하게 살죠.”

하나의 나이가 보이는 것 이상이란 말에 노인의 미간이 구겨졌다. 그에 그녀는 생긋 웃으며 일어났다.

원래 집안 문제는 피 섞인 놈들끼리 해결해야 하는 법.

“화장실 좀. 줄리오, 영감님 설득 못 하면 평생 수절하고 살아야 하는 거 아니야?”

소름 끼치는 말에 그가 고개를 저으며 콧날을 가볍게 구긴다.

“다녀와. 그리고 조심해. 음흉한 놈들이 많아서.”

어깨를 짚은 그녀의 손등을 부드럽게 어루만진 그의 이마에 입술을 누르자, 지켜보던 노인의 눈썹이 삐딱하게 치솟았다.

하나가 산뜻하게 웃으며 돌아선 뒤에야, 고개를 튼 줄리오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입이 험하시네요. 선물 받기 싫으신가 봅니다.”

“줄리오, 네 아버지를 생각해. 외지인을 들여서 좋을 거 없어. 저런 애는 정부로 둬도 되잖아.”

“이미 업무 이전 시작했습니다. 내 재산을 지키려면, 저 여자를 지켜야 하는데. 어쩌죠.”

“너!”

“진정하세요. 명대로 사셔야지…. 재촉하지 마시고.”

“허, 다 너를 아끼니까 하는….”

그때였다. 가볍게 인상을 찌푸린 줄리오가 고개를 들더니 천천히 입꼬리를 휘어 올렸다.

부드러운 클래식이 흐르고, 풀에는 요란하게 떠들어대는 여자들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한쪽에선 음식을 만드는 셰프들이 끊임없이 움직이는 중이었으며,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적당히 청량했다.

그 안에 미세하게 섞인 균열. 하나가 화장실로 향한 방향이었다.

“실수하신 겁니다.”

싸늘한 줄리오의 경고에 밀로 영감의 얼굴에 승리의 미소가 번질 때였다.

쿵!

우지끈-!

시커먼 정장을 입은 한 놈이 그들의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꺄악!”

“꺄아악!”

사방에서 울리는 비명.

피칠을 한 남자의 얼굴을 알아본 영감의 눈이 희번덕대고, 줄리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꿈틀대며 핏물을 토해 낸 놈의 관자놀이에 총구를 댄 줄리오가 물었다.

“그녀는 어디 있지?”

그러자 간신히 2층을 가리킨 놈이 결국 눈을 뒤집고 기절했다.

밀로는 피가 거꾸로 솟는 걸 느끼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곳엔 조금 전 줄리오의 곁에 앉아 생글거리며 웃던 여자가 싸늘한 미소 띤 얼굴로 턱을 괸 채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혹시 죽었어? 안 죽이려고 했는데.”

태연자약한 그녀의 말에 줄리오가 어깨를 으쓱 올렸다.

“그게 무슨 상관이야. 네 몸에 손댔나?”

“목을 그으려고 하더라고. 할아버지, 내가 사는 나라는 노인 공경이 기본이라 우대권 사용하실 수 있게 해드린 거예요. 그런데 여기까지예요. 내 몸에 칼 대지 말고, 함부로 총 겨누지 마요. 다음에는 저놈 머리통 하나로 안 끝납니다.”

“허!”

밀로는 정수리를 짓누르는 압박감에 놀라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러며 제 뒤에 멍하니 서 있는 놈에게 서슬 퍼런 얼굴로 당장에 치우라며 고함쳤다.

그에 줄리오는 노인의 앞으로 로마노가 가져온 서류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지금 지내고 계신 섬의 소유권 양도 서류입니다. 키워주신 은혜, 모두 갚았으니 여생은 조용히 죽은 듯이 즐기면서 사세요. 어린애들이랑 증손주 같은 자식도 보면서.”

그는 부들부들 떠는 영감을 뒤로한 채 성큼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유혹적인 눈길을 보내던 여자들이 사신을 마주한 것처럼 시선을 피한다.

그는 하나가 내려올 계단 앞에 서서 담배를 꺼냈다. 불을 붙이려다 말고 그녀가 한 말이 떠올라 그대로 바닥에 버려 버린 뒤, 주머니 안으로 라이터를 쑤셔 넣었다.

하얀 로마 양식의 계단을 걸어 내려오는 이하나는 지옥에서 온 매혹적인 여신 같았다. 아름답고 치명적이며, 위험한.

다가간 그가 새하얀 손등에 입 맞추자, 한숨 쉰 그녀가 짜증스럽게 혀를 찬다.

“이래서 난 쪽수로 밀어붙이는 게 싫어.”

“가지. 근사한 식사 하러.”

헬리포트에 도착해 대기 중인 헬기에 몸을 싣자, 줄리오 파렌티의 단단한 팔이 그녀의 허릴 감싸 당겼다. 하나는 붕 뜨는 느낌과 함께 그의 무릎 위에 올라앉았다.

입술이 맞닿는 순간 눈이 감기고, 혀가 엉기는 끈적함에 몸이 달아오른다. 헬기의 요란한 프로펠러 소리에 귀가 멀 것 같았지만, 더 크게 들리는 것은 누군가의 심장 박동이었다.

잡아먹을 듯이 혀를 빨아들일 때마다 그녀가 흘리는 신음에 정신이 아득해진다.

꿈속의 풍광 같은 절경이 두 사람의 발아래로 펼쳐지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떨어진 입술 새로 고혹적인 태양 빛이 흘러들었다.

“아무래도 너한테, 눈이 먼 것 같아. 사랑해.”

“그걸 이제 알았어? 난 예전에 알았는데.”

***

3개월 뒤, 캘리포니아 teonimo 본사.

건물 옥상에 자리한 검정 양복을 입은 몇몇과 메카닉 복장을 한 이들이 안절부절못하며 하늘에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당장에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주저앉아 있는 사람은 F1 그랑프리 챔피언 막시무스였다. 지난해 teonimo를 우승으로 이끈 그였지만, 지금은 다 함께 망연자실한 상태로 누군가를 기다렸다.

그때였다. 멀리서 두 대의 헬리콥터가 빠른 속도로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반색한 이들이 너도나도 거리를 벌려 헬리포트에서 벗어나 자리를 만든다. 이제야 살았다며 서로 얼싸안고 기뻐하며 눈물까지 펑펑 흘렸다.

막시무스 역시 마찬가지. 헬기가 착륙하며 만들어 낸 거센 바람에도 꼼짝하지 않은 막시무스는 어서 문이 열리기를 바라며 발을 동동 굴렀다.

조금 더 늦었다가는 정신 나간 갱들에게 목숨과도 같은 머신을 강탈당하고 말 것이다.

현재 teonimo의 기술 센터를 점거한 건, 아메리카 대륙을 점령 중인 신흥 갱단의 일원들이었다. 그들은 teonimo의 소유주가 줄리오 파렌티라는 것을 알면서도, 대담하게 연구소와 기술 센터로 쳐들어가 무차별 난사를 시작했다.

그에 teonimo의 관리자들은 공권력을 동원하는 대신, 그들의 보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육중한 소릴 내며 돌아가는 프로펠러. 검은 문이 열리고, 그 안에서 걸어 나온 건 한 명의 여자였다.

몸에 딱 붙는 슈트와 검정 마스크. 새카만 머리카락을 높이 올려 묶은 채, 장갑을 당겨 끼우며 다가온 여자가 막시무스를 보더니 짧게 코웃음 친다.

“울보 새끼, 또 있네. 울지 마라. 엉덩이에 털 난다.”

“하나!”

“씁, 시끄러워. 질질 짜지 마. 다들 대기. 위치는?”

귀에 건 이어 마이크를 건드리자 내부 CCTV 화면을 확보한 관리부의 음성이 들려왔다.

「지하 8층, 32명 예상. 계단에 둘, 로비에 잠복 한 명.」

하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성큼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그녀의 등장에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사색이던 이들 모두, 구세주를 만난 표정으로 이제 살았다며 얼싸안고 기뻐한다.

하나는 아직 상공을 선회 중인 헬기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승강기 타고 이동합니다. 27초 뒤 합류.”

「롸저.」

승강기 앞에 선 그녀의 뒤로 막시무스가 졸졸 따라와 주먹을 굳게 말아 쥐더니, 화이팅을 외치며 요란하게 굴었다.

하나는 그런 막시무스를 귀찮은 듯 째려봐 준 후, 도착한 승강기 안에 몸을 실었다.

“야, 막시무스.”

“어? 예?”

“내가 너 살려 줄 테니까, 이번 시즌 우승 못 하면…. 죽어.”

담담하면서도 진지한 미소에 막시무스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하나는 생긋 웃으며 승강기 문을 닫았다.

눈을 감자 지하를 향해 하강하는 느낌이 온몸으로 전해진다.

‘다 갈겨 죽여도 돼. 대신, 네 몸에 피 한 방울 묻히지 마. 나 미치는 꼴 보고 싶지 않으면.’

캘리포니아 본사에 갱단이 들었단 소식을 전하자마자 하는 소리가 고작 그거라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하나는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그러곤 있는 힘을 다해 천장으로 점프했다. 조명 박스를 뜯어 그 위로 올라간 그녀가 하강하는 힘에 맞서 몸을 낮춘다.

까만 머리카락이 허공으로 치솟는 사이, 어느덧 지하 8층에 다다른 승강기가 멈추었다.

서서히 열리는 문. 문이 열림과 동시에 빗발치듯 쏘아진 총탄이 승강기 벽에 그대로 박혔다.

27초, 합류.

피식 입꼬릴 끌어올린 그녀는 철봉에 거꾸로 매달리듯, 넋이 나간 놈들의 방향으로 양손에 든 총을 겨누며 환하게 웃었다.

“Ciao.”

『딜레탕트(Dilettante)』 마침.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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