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9> (59/180)
  • <59>

    이른 아침, 눈을 뜬 하나는 엉망이 된 실내를 대충 둘러본 뒤 다시 누웠다. 그러자 팔을 두른 그가 그녀를 꽉 끌어안더니 본능처럼 젖가슴을 주물렀다.

    마음 같아선 다시 잠들고 싶었다. 동트기 직전까지 시달린 것이 가장 큰 이유였지만, 요 며칠 늑장을 부렸다고 벌써 몸이 게으름에 익숙해졌다.

    하지만 밖에서 들려오는 어수선한 소리와 묘하게 익숙하면서도 맛있는 냄새, 옆방에 있을 유은성에 대한 생각이 그녀의 잠을 깨웠다.

    부스스한 얼굴을 비비며 일어난 그녀의 허리춤을 감싸 안은 줄리오가 허벅지에 입술을 누르며 눈도 뜨지 않은 채 중얼거렸다.

    “좀 더 자. 아직 준비 덜 됐을 거야.”

    뭔가를 아는 듯한 반응에 그녀가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준비? 밖에 뭔데?”

    “너한테 제대로 된 거 먹여야 한다고 혈안이 된 미친놈. 이제야 도착했나 보군.”

    궁금증을 이기지 못한 하나는 기어이 줄리오의 품에서 빠져나와 대충 잡히는 옷에 몸을 끼워 넣었다. 그러곤 문을 열자, 비가 그쳐 눈부시게 환한 하늘이 그녀의 눈을 찌른다.

    하나는 복도 난간 너머, 주차장 앞에 세워진 푸드 트럭 한 대를 발견했다. 누가 이탈리아노 아니랄까 봐 크림색 차양을 넓게 펼친 푸드 트럭 앞엔 둥근 테이블 위에 식기를 세팅 중인 로렌조가 있다.

    한쪽에 놓은 플라스틱 의자에 앉은 로마노가 종이 신문을 펴더니 읽다 말고 고개를 든다. 로렌조보다 먼저 그녀를 발견한 로마노는 눈썹을 추켜세우며 알은체를 했다. 하나는 작게 손을 흔들어 보인 후 땀을 뻘뻘 흘리는 로렌조를 감상했다.

    “넌 군인이 아니었으면, 사육사가 되었을 거야.”

    난간에 기대어 있는 그녀의 뒤로 다가온 줄리오가 어깨에 입 맞추며 잠이 덜 깬 목소리로 말했다.

    “근데 난 동물을 썩 좋아하진 않아. 손이 너무 많이 가거든. 그리고… 마음이 좋지 않다고 해야 하나? 그 애의 세상에는 나밖에 없는 거잖아. 난 좋은 주인이 될 수 없었을 거야. 여유가 없거든.”

    “이제는 그 여유가 생길 텐데. 개 한 마리 키워 보는 거 어때. 거친 놈으로.”

    “흐음…. 싫어. 내 인생에 미친개는 한 마리면 충분하거든.”

    하나는 줄리오의 어깨에 뒷머릴 기대며 슬그머니 입꼬릴 올렸다. 그 능청스러운 대답의 의미를 이해한 그가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귓불을 깨문다.

    “메뉴는 삼겹살과 김치찌개와 제… 아무튼, 무슨 고기라더군. 뭔지 몰라도 아주 오래 걸리는 음식이라니까…. 그때까지, 다시 침대로 갈까?”

    그녀는 낡은 난간을 지그시 힘주어 움켜쥐었다.

    줄리오의 음성이 나른해질 때마다 제가 감당하기 힘든 일이 벌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다.

    기진했던 지난 밤이 생생해, 하나는 불쑥 손을 들어 로렌조를 불렀다.

    “로렌조! 로오레엔조오!”

    그러자 테이블에 식기를 놓던 로렌조가 고개를 들더니, 보이지도 않는 꼬랑지를 붕붕 흔들며 3층까지 전속력으로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하나!”

    “흠, 네 뜻대로는 안 되지.”

    순간 그녀의 몸이 붕 떴다.

    “꺅! 야, 로렌조랑 재회 좀 하자!”

    “나중에 해!”

    “치사하게 굴 거야?”

    하나는 줄리오의 어깨에 걸쳐져 배가 아프도록 소리 내 웃었다. 로렌조가 3층에 닿기 전, 다시금 방으로 끌려 들어간 그녀는 침대 위에 철퍼덕 드러누우며 씩씩대는 줄리오에게 양팔을 벌렸다.

    “질투하긴, 이리와. 안아 줄게.”

    어처구니없다는 듯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그가 이내 고개를 저으며 무릎을 굽혀 매트리스 위로 기어오른다.

    하나는 겹치듯 안겨 온 그를 품으로 끌어당겼다. 데워진 피부에서 배어 나온 땀, 체온, 특유의 나른함을 닮은 중성적인 머스크향이 전신에 들러붙는다.

    그녀는 부들부들한 그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며 속삭였다.

    “이래서 동물은 키우고 싶지 않았다니까 그러네.”

    ***

    싸구려 모텔 주차장에서 먹는 최고급 한식 밥상이라니.

    로렌조는 정말이지 최고였다. 물론 한국 음식을 완벽하게 구현해 낸 것은 아니지만, 한번 먹어 보지도 않고 이렇게 비슷한 맛을 끌어내는 건 천재적이라고밖에 할 수 없었다.

    하나는 제육볶음에 흰 쌀밥을 세 그릇이나 비운 후에야 유은성의 존재를 상기했다.

    “테오, 어제 그 손님은?”

    테오는 처음 먹어 보는 한국 음식의 맛에 한 번, 모텔에 들이닥친 파렌티 패밀리에 두 번 놀라 넋이 나간 상태로 어깨를 으쓱 올렸다.

    “나도 잘 모르겠어. 혹시 죽은 거 아니야?”

    “걔 안 죽어. 줄리오, 넌 알아?”

    줄리오는 움찔거릴 때마다 하나에게 붙는 테오를 못마땅하게 노려보며 냅킨으로 입가에 묻은 소스를 닦았다. 귀엽게도 매운 걸 좋아한다고 큰소리칠 땐 언제고, 제육볶음 몇 조각에 땀을 뻘뻘 흘리는 중이었다.

    “약 기운 풀리자마자 떴어. FBI가 움직였거든. 리우가 살아 있다는 걸 게빈은 알고 있으니까.”

    “유예 시간이 다 됐다 이건가? 그럼 리우는 도망친 거야?”

    “아니, 제 발로 게빈에게 간 거야. 이제 곧 체포되겠지. 넌 리우 말고 네 동생을 더 걱정해야 하는 거 아닌가? 리우는 체포되고 1년 뒤쯤 나올 거야. 물론, 페트로프의 도움으로. 하지만 강무호는 여기서 개죽음을 당하느니 한국으로 도망칠 궁리를 하고 있는 것 같던데.”

    “음… 그래? 아쉽네. 감방 가기 전에 배라도 채우고 가지.”

    그러며 로렌조에게 밥 접시를 내밀자, 입이 찢어져라 웃어 보인 녀석이 고봉밥을 담아 그녀의 앞에 놓아 주었다.

    하나는 어처구니없어하는 줄리오를 흘겨보며 밥 위에 고기를 잔뜩 올렸다. 그러자 로렌조가 그녀의 앞에 초록초록한 풀 반찬을 밀어주며, 균형 있게 먹으라고 잔소릴 한다.

    것 봐, 얘는 개가 아니라 보모라니까?

    “하나, 전화.”

    이 더운 날, 뜨거운 커피만 홀짝이며 신문을 보던 로마노가 그녀의 휴대전화를 쓱 밀었다.

    하나는 한국에서 온 연락에 반색하며 전화를 받았다.

    “이하나입니다.”

    [한국에서 연락하는 거, 이렇게 막 받지 마. 어떤 새끼가 전화할 줄 알고 막 받아? 너, 그러면 안 되는 거 몰라?]

    “알아, 알아. 두이야. 나, 지금 뭐 하는지 알아?”

    [뭐하는데.]

    “제육덮밥 먹어! 대박이지, 그것도 마포에 있는 기사 식당 맛이랑 비슷하다?”

    [마피아 새끼가 별짓을 다하네.]

    “너는 어때. 거기… 복잡하지?”

    하나는 잠시 숟가락을 내려놓고 차가운 아이스티 한 모금을 삼켰다. 혼자 한국에 있을 두이를 생각하면 명치 끝이 꽉 막히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언젠가는 떨쳐 내야 할 감정이라고 사람들은 말했다. 결국, 동기간이라도 각자의 길을 걷게 될 거라고. 그러니 동생의 인생을 책임지려 하지 말라고.

    [유철 선배랑 공조 수사 중이야. 선배, 나름 파워가 있네. 검찰도 부릴 줄 알고. 강무진이 말한 지하를 팠더니 뭐가 나왔는지 알아? 필로폰 27kg에 신원 미상의 시신. 그것도 외국인 시신이라 인터폴에 실종자 명단 요청할 예정이야.]

    “걔는 정말 곱게 죽긴 글렀다.”

    [곱게 죽도록 안 둬. 개자식이 날 살인 청부해? 어쨌든, 누나는.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언제까지 거기 있을 거야?]

    “음… 나, 일단 움직이기 전에 배부터 채우고. 보아하니 공항으로 갈 거 같아.”

    [그럼…. 그럼 우린 언제 봐?]

    “네가 나 보고 싶을 때, 언제든.”

    […지금 여기 밥그릇 싸움 불붙기 직전이야. 그래서 제일 힘센 사람 옆에 붙어 있을 거야. 나도 내 목숨 귀한 줄은 아니까.]

    “잘 생각했어. 쉬는 김에 연애도 좀 하고, 여자도 만나고. 응?”

    웃음을 꾹 참는 하나의 얼굴 앞으로 줄리오의 손이 불쑥 나타났다.

    통화가 오래도록 이어지는 게 불만인지, 휴대전화를 빼앗아간 그가 그녀의 입에 밥을 떠 넣어 주더니 어깨와 귓바퀴 사이에 전화기를 끼운다.

    “네 누나는 걱정 말고 네 걱정이나 해. 강무호는 한국으로 도피할 거거든. 가자마자 너부터 칠 거야. 그 전에 원하면, 여기서 처리해 줄 수도 있고. 이젠 내 가족의 일이니 피를 보는 것쯤은 우습지도 않지.”

    하나는 순간 한국의 소화제 생각이 절실해졌다.

    말간 햇볕이 쏟아져 차양 위에 번지고, 테오는 남은 음식들을 그릇에 담아 모텔 냉장고를 채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저 그런 평범하면서도 조금 특별한, 기분 좋은 아침.

    찰나 두이의 서늘한 한국식 욕설이 수화기 너머에서 쏟아져 나왔다. 하나는 오랜만에 듣는 두이의 욕설에 엄지를 치켜들었지만, 다행히 줄리오는 한국어를 알아듣지 못했다.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치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누가 그랬는데. 이두이는 평소 무표정한 얼굴의 냉미남처럼 굴다가 한 번씩 눈 뒤집고 미쳐 줄 때가 제일 근사하고 섹시하다고.

    누구였더라….

    “처남이 화가 많이 났군.”

    수화기를 귀에서 뗀 줄리오가 어깨를 으쓱 올리더니, 태연히 휴대전화를 테이블 위에 엎어 두곤 포크를 들었다.

    아마 제육볶음을 저렇게 우아하게 썰어 먹는 사람은 세상에 줄리오 파렌티 밖에 없을 것이다.

    “버릇은 하루라도 빨리 고치는 게 좋아. 어서 먹어, 이제 곧 출국 시간이니.”

    부드럽게 미소 지은 그가 하나의 입술에 붙은 밥알을 떼어 주며 말을 이었다.

    “다시, 떠나야지.”

    ***

    밤인지 낮인지, 시간의 흐름조차 느낄 수 없는 안전 가옥 안.

    벌벌 떨던 강무호는 몽롱해지는 뺨을 두드리며 물을 찾아 걸음을 옮겼다. 작은 냉장고를 열자,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와 얼굴을 비춘다.

    안전 가옥을 소개한 사람은 로건 발렌타인. 100% 그를 믿을 수는 없지만, 업계 최고의 경호를 행한다는 점에서 선택권은 없었다.

    어쩐지 묘하게 적막한 숲. 새 울음소리밖에 들리지 않는 숲 한가운데 세워진 오두막엔 침대 하나와 간이 주방. 그리고 욕실이 다였다.

    강무호는 무거운 방탄조끼를 걸치며 물을 꺼내 들고 다시 의자에 앉았다.

    “빌어먹을 잡놈…. 곱게 죽진 못할망정, 나를 쳐? 개가 주인을 물어? 씨벌놈.”

    이곳에 다다르기 직전 나타난 유은성은 마치 지옥에서 살아 돌아온 악귀 같았다. 놈이 움직일 때마다 경호를 맡은 놈들의 몸에서 피 분수가 뿜어졌고, 몇 놈은 목숨을 잃었다. 겁에 질려 도망친 놈들을 제외해도 많은 수였지만, 유은성은 혼자서 경호원들을 상대했다.

    하지만 다행히 제게는 위협조차 가하지 못한 채 도망쳤다. 그 정도로 상처를 입었으니, 어디 가다가 자빠져 죽어 버렸으면 싶었다.

    그는 한국에 구조 요청을 해 놓은 상태였다. 그러니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 조금만 더 버티면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

    이곳에서 개죽음을 당하느니, 한국에 돌아가 적당히 형을 살고 재판을 통해 나오면 될 터. 도와줄 이들은 도처에 널렸다.

    “멍청한 새끼.”

    끌끌 혀를 차며 몸을 웅크리던 강무호는 등줄기를 훑는 스산함에 놀라 두 눈을 크게 떴다.

    누군가 자신의 뒤에 서 있었다. 고개를 들면, 칼이 뒷덜미를 벨 것 같은 서늘함. 마른침을 삼킨 그가 바닥을 내려다보며 식은땀을 한 방울 떨어트릴 때였다.

    “한국에 돌아가면 할 일이 있습니다, 형님.”

    소름 끼치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유은성이었다. 강무호는 애써 비죽비죽 웃으며 땀이 배어난 손을 말아 쥐곤 대답했다.

    “무진아, 나랑 한국으로 가자. 이러지 마. 너 이러면 진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되는 거야. 내가 너, 살려 주마…. 그러니까.”

    “웃기는군. 이봐, 강무호.”

    강무호는 천천히 눈을 치켜떠 정면에 놓인 거울을 보았다.

    시퍼런 칼날이 제 목덜미에 닿아 있는 모습이 보인다. 날카롭게 벼려진 유은성의 눈동자. 그 검푸른 빛에 긴장한 강무호의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오금이 저리고 소변을 지릴 듯한 공포가 발밑에서부터 기어오른다.

    “한국에 가면 자수해. 감옥에 들어가서 한 1년 정도 살고 나와. 넌 능력이 있으니, 그 전에도 나올 수 있겠지. 단… 건드리지 말아야 할 사람들이 있어. 이두이와 이하나. 그 이름을 네 머릿속에서 지워야 할 거야. 그렇지 않으면… 1년 뒤에, 형님의 침대 위에서 내 얼굴을 보게 될 겁니다. 그것도 아주 고통스럽게. 어쩌면 반쯤, 이 목이 잘려 나간 상태겠군요. 아시겠습니까?”

    “무, 무슨! 무진아!”

    “그러니 도망쳐. 울면서 기어. 그럼 혹시 모르지…. 내가 형님을 불쌍히 여겨, 손목 정도로 만족할지도.”

    스윽, 소름 끼치는 감각이 목을 벴다.

    후드득 떨어지는 뜨거운 피. 강무호는 피가 배어나는 뒷덜미를 움켜쥐었다. 깊게 베인 것은 아니었으나 그 공포는 하늘을 찌르고도 남았다.

    허옇게 질린 강무호가 돌아보았을 때, 유은성은 자리에 없었다.

    남은 건 의자를 적신 소변과 어깨를 타고 흐르는 핏물뿐.

    “아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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