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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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05. 정의로운 빌런

갑판에 다다른 승강기 문이 열린다. 탁 트인 바다 대신, 복잡한 복도가 먼저 나왔다.

하나는 눈앞이 하얘져 한 걸음도 내딛지 못했다.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아 큭큭거리며 웃었다.

“악당은 너잖아, 강무진….”

[아, 저는 착한 사람에겐 악당 짓 안 합니다. 혹시 밤 수영은 자신 없나?]

“응… 내가 밤눈이 어두워서. 그리고 네가 두이한테 손댔다며. 내 거래 대상은 멀쩡한 이두이야.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실망이네?”

[이런, 미안합니다. 전혀 몰랐네요. 동생한테 하도 집착하기에 살아만 있으면 되는 줄 알았어요.]

죽여 버리고 싶을 만큼 화가 나 이가 갈렸다.

조작된 목소리지만, 의심하고 싶지 않은 누군가의 비아냥을 닮은 말투.

주저앉아 고개를 푹 숙인 그녀의 턱이 들렸다. 통화하는 걸 지켜보던 줄리오였다.

하나는 그의 눈을 빤히 쳐다보며 강무진과의 통화를 이어나갔다.

“재밌어? 정말 이해가 안 되네. 나한테 원하는 게 뭐야? 너는 캄보디아에서 마약 쿨거래를 했고 마피아의 이름을 사칭했어. 내 동생이 그런 너를 쫓는 게 기분 나빠서, 무서워서, 잡힐까 봐 두려워서. 그래서 죽이려고 한 거 아닌가? 왜 안 죽이고 데리고 있어?”

기분이 이상했다. 줄리오가 한국말을 알아듣지 못할 거란 걸 알면서도, 모든 것을 꿰뚫리는 기분이었다.

“대답해. 네 대답에 따라, 내가 갑자기 밤눈이 좋아질지도 모르잖아.”

[널 닮아서. 너랑 닮았더라고. 처음엔 잘 몰랐는데… 볼수록 닮았네, 두 사람.]

“아…. 나랑 닮아서? 너, 나 아는구나.”

[잘 알지. 그래서 얘기해 주는 거야. FBI가 줄리오 파렌티를 제1 용의자로 지목했어. 그리고 그 외 다수의 악당을 상대로 체포 명령을 내렸지. 잡힐 거야, 줄리오 파렌티는.]

“너… 찌질한 놈이었어? 그렇게 안 봤는데…. 네 형은 너 죽은 줄 알고 울며불며 여론 조작하는데 재미 들렸더라? 그런 거 보면서 배우는 거 없니?”

[그러게. 난 죽었다고 한 적 없는데, 형님은 내가 죽길 바라셨나 봐. 너무 슬프게 우시더라. 살아 있다고 나설 수도 없게.]

“무진아, 너…. 살아 있는 걸 후회하게 될 거야. 다음에 다시 전화해. 그땐, 네 진짜 목소리로. 그럼 나도 이 배에서 기꺼이 뛰어내려 줄게.”

하나는 줄리오의 눈을 빤히 직시하며 전화를 끊었다.

이상하게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그러고 강무진이 누구인지 100%에 가까운 확신이 들었다.

사람들 모두 제 뒤통수만 노리고 있었던 것 같다. 그것도 가장 가까이에서, 제가 의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 두고 가열하게 후려쳤다.

“말해…. 너 알고 있었지. 그래서 유은성 놔준 거지. 일부러, 보낸 거잖아.”

줄리오는 그녀의 눈가를 문질렀다. 하나는 제가 울고 있었는지 의식하지 못했다. 평생 잘 흘리지도 않았던 눈물이 요즘 들어 자주 터졌다.

그것도, 이 남자 앞에서만….

“놈은 게빈 스미스의 전화기로 연락한 거야. 좌표 추적이 가능하거든. FBI에게 내 좌표를 넘기는 게 목적이겠지.”

“그런 거 말고. 대답해…. 언제부터 알고 있었어? 유은성이 강무진인거!”

다급한 질문에도 줄리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를 잡아 일으킨 그가 손을 당겨 복도 밖으로 이끌었다. 멍하니 따라 나간 그녀의 머리카락이 바닷바람에 흔들린다.

분명 승객들로 가득할 줄 알았던 갑판은 개미 새끼 한 마리 없이 횅했다. 하지만 여전히 소음이 들렸다. 사람들의 말소리, 물에 뛰어드는 소리, 아이 우는 소리. 그런 것들이 소름 끼치게 생생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이건 유리 페트로프의 유령선이지. 페트로프는 이 배를 감시망에서 사라지게만 할 거야. 생채 신호도, 소리도. 모두 가짜라더군.”

“미친놈아, 대답이나 하라고.”

힘주어 뇌까린 말에 줄리오가 작게 실소했다. 하나는 그와 함께 갑판 끝에 섰다. 마주 선 남자가 담배를 꺼내더니 불을 붙이며 고개를 기울인다.

하나는 줄리오를 죽일 듯 노려보는 걸 포기하고, 멀어지는 불빛을 보며 난간을 움켜쥐었다.

“네 동생은 무사해. 문제가 생겼다면, 내게 벌써 연락이 왔겠지. 적어도 죽지는 않아. 내가 그 목숨값, 지불했으니까.”

“무슨 소리야, 그게…. 네가 뭔데 내 동생 목숨값을 지불해. 누구에게?”

“죽음에게.”

그가 피식 웃으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진다. 그에 가슴이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녀가 용병으로 일하던 시절 종종 듣던 농담이었다.

살기 위해 죽음에게 돈을 지불한다는 발렌타인 데이 식의 농담.

“발렌타인 데이가 놈의 곁에 있어. 로건 발렌타인이 자본주의의 노예라 다행이더군. 로건이 리우를 감시할 거야.”

“강무진도 로건의 고객이야.”

“돈을 더 많이 내는 쪽이 진짜 고객인 거지.”

눈앞이 핑 돈다.

갑작스럽게 너무 많은 감정을 느꼈다. 이마를 짚은 채 난간에 기대 있던 그녀가 말했다.

“강무진은… 내가 죽여. 넌 손대지 마. 이 판에 넌 끼어든 적 없는 거야. 난 가진 게 없어서, 그런 것 밖에 못 해줘. FBI 앞에서 증언해 줄게. 줄리오 파렌티는 피해자라고. 그러니까… 두이, 살려.”

치켜뜬 까만 눈동자엔 어느새 슬픔 대신 투지가 자리했다.

그는 난간 모서리에 담배를 비벼 끄며 웃었다.

“좋은 거래야. 나는 네게 이용당한 착한 악당이고, 넌…. 악당을 이용한, 나쁜 악당이 되는 것.”

그래, 네게 악당은 나였지…? 잊을뻔했네.

입술을 깨물며 숨을 가다듬자, 잇새에 물려 있던 입술을 엄지로 당겨 뺀 그의 눈동자에 소름 끼치는 열기가 치솟는다.

“그렇게 말해 줄 줄 알았나? 아니. 네가 FBI 앞에 서는 일은 없을 거야. 내가 그렇게 만들지 않아.”

***

“시뇨리나.”

우물쭈물하는 목소리에 돌아보자 배를 감싼 로렌조가 멋쩍게 웃으며 다가왔다.

하나는 아무도 없는 야외 풀장 앞 선베드에 앉아 있었다. 절뚝거리며 다가선 로렌조가 눈물범벅이 된 하나를 보더니 한숨을 내쉰다.

“너 울면, 곤란한 일이 생긴다니까.”

“네가 곤란한 거지, 내가 곤란해? 근데 너… 벌써 움직여도 돼? 상처 깊던데.”

“하루 푹 쉬었으니 괜찮아. 근데 넌 왜 이렇게 저기압이야?”

“몰라서 물어? 네 보스가 내 목에 주사 꽂았잖아. 배신 때렸다고.”

“에이, 아니야. 그냥 네가 너무 다루기 힘들어서 그런 거야. 우리도 갑자기 철수 명령 받고 움직이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는데, 줄리오라고 답이 있었겠어?”

“너, 오늘따라 되게 줄리오 편 많이 든다? 내가 그 남자 싫어하면 너희들한테는 좋은 거 아니야? 날 떼어 낼 수 있잖아.”

턱살이 흔들리도록 고개를 저은 로렌조가 그녀의 어깨를 짚으며 옆 베드에 풀썩 앉았다. 통증이 심한지 로렌조의 인상이 구겨진다.

“줄리오가 변했어. 나는 그게 로즈 때문인 줄 알았거든? 물론, 로즈 때문에 변한 것도 있겠지. 그런데 좀… 달라.”

“뭐가. 내 앞에서 그 새끼 변호하지 마. 어떤 상황이었든, 나까지 여기로 데려올 이유는 없었어.”

“오, 시뇨리나. 이유를 아직도 모르겠어?”

마치 배우라도 된 것처럼 과장된 표정을 지은 로렌조가 하나의 양쪽 어깨를 잡았다.

“줄리오는 너를 잃기 싫은 거야.”

“정말 죽기라도 했을 거라고 생각해? 내가?”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찾아와. 그리고 기절한 널 안고 이 배에 도착했을 때, 아무도 줄리오에게 가까이 가지 못했어. 우린 다들 네가 잘못되기라도 한 줄 알았지. 근데 아니었어. 줄리오는… 감정 표현에 미숙해. 분노와 경멸 외에는 표현해 본 적 없어. 그러니까 한 번만 믿어 줘. 네 뒤통수를 친 게 아니라, 널 살리려고 그런 거라고.”

입술을 달싹이던 하나는 로렌조의 손을 쳐내곤 선베드에 길게 누웠다. 그러다 가슴 안쪽이 답답하고 짜증이 치밀어, 더는 참지 못한 채 벌떡 일어났다.

“네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겠는데. 그래도 내 동생 잘못되면… 나, 그 남자 용서 안 해. 줄리오는 내가 아니라 두이를 선택했어야 했어.”

로렌조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DE:A의 로고가 박힌 갑판 위로 비가 한 방울씩 떨어진다. 하나는 고민 없이 실내로 걸음을 내디뎠고, 로렌조는 배를 채워야겠다며 수영장 한쪽에 마련된 바로 향했다.

갑판은 금세 비에 젖어 번들거렸다.

이 복잡한 마음이 뭔지 안다. 줄리오 파렌티가 감정 표현에 미숙한 것처럼, 저 역시 솔직한 표현을 해 본 적 없었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마찬가지다. 가식적인 미소로 대하거나 치가 떨리도록 무시하곤 했다.

게다가 줄리오 파렌티의 트라우마를 이용해 반쯤 미치게 만들고 싶다는 의도 또한 있었다.

그래서 그 남자 때문에 웃음이 날 때마다, 속물이 된 것 같은 죄책감이 함께 찾아왔다.

하나는 승강기를 타고 16층에 도착했다. 그녀를 발견한 줄리오의 부하들이 긴장한 표정으로 길을 낸다.

실은 밤새 찾아오지 않으려 했는데….

남는 게 객실이니 아무 데나 들어가서 아침이 올 때까지 버티려고 했다.

하지만 빌어먹을 로렌조의 말에 영업 당해 버린 것 같다. 살리려고 그랬을 거라는 로렌조의 주장에, 줄리오의 대답이 듣고 싶어졌다.

“줄리오, 안에 있어?”

“어, 있는데. 어, 그게….”

“왜?”

우물쭈물하는 놈의 표정을 보자, 안에서 일어나고 있을 일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로즈가 왔어?”

“어?”

“로즈가 왔냐고.”

“어.”

“열어, 그럼. 너네가 생각하는 일 없을 거야.”

“하나.”

“부탁이야. 열어 줄래, 문 좀?”

미호라고 했던가?

이름이 정확히 떠오르지 않는 남자가 문을 열자, 탁 트인 밤바다가 제일 먼저 보였다. 그리고 테이블에 앉아 있는 장세이와 소파에 앉아 그녀를 올려다보는 줄리오의 모습이 뒤를 이었다.

무슨 대화를 하고 있던 건지, 줄리오는 넋을 놓은 채 세이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탈리아어로 열변을 토하는 장세이. 영어에 이어 러시아어에 이탈리아어까지. 말도 안 되는 여자의 능력에 기가 차 멈춰 섰다.

‘꼬리 튀어나오겠다, 아주.’

하나는 문설주에 기대서서 녹는 듯한 눈빛을 한 줄리오를 응시했다. 저 남자가 유일하게 무장해제 되는 상대. 장세이 쪽은 사랑이 아니었겠지만, 분명 줄리오 파렌티는 여자를 사랑했다.

그 마음이 지금은 어떻게 변화했는지 몰라도, 여전히 그 애정의 밀도는 달라지지 않았다.

저와는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다.

처음부터 자신은 남자에게 선을 그었다. 그리고 줄리오는 그 선을 지킨다고 거짓말하며, 자유롭게 넘나들었다.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걸 의식할수록 더욱 강하게 손을 잡는 남자. 그래놓고 첫사랑의 존재 앞에 한없이 나약해지는 남자의 이름, 줄리오 파렌티.

속이 뜨겁다. 체하기라도 한 것처럼 기분 나쁘게 쓰렸다.

뒤늦게 그녀를 발견한 세이가 반갑게 손을 든다. 줄리오는 여전히 넋이 나간 채였다.

그래서 하나는 남자의 시선을 무시하곤 침실로 들어갔다. 질투한 꼴이었단 사실에 자괴감이 든다. 몇 초 뒤, 장세이가 나간 건지 남자의 발소리가 침실로 이어졌다.

하나는 바다의 부표를 노려보며 말했다.

“24시간도 안 남았어. 약속한 대로 이두이 찾아내. 그러려고 네 장단에 맞춰 놀아 준….”

유리에 비친 남자가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당황한 하나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하얀 목덜미에 입술을 누른 그가 눈을 치켜떠, 유리에 비치는 그녀와 시선을 맞췄다.

사냥을 나선 짐승처럼 형형한 본능이 정확히 그녀에게 향한다.

“이제 알겠군…. 그래, 이제… 알겠어. 이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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