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9> (39/180)

  • <39> 

    두이는 사라져 버린 신호를 막연하게 응시하다,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며 양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눈두덩을 눌렀다.

    게빈은 그런 두이의 등을 다독였다. 생사고락을 함께해서인지 몰라도, 그는 두이가 죽은 친동생처럼 느껴졌다.

    “두이, 이번 일 잘 마무리되면 FBI로 들어올 생각 없어?”

    “없습니다. 이번일 마무리되면 한국에 들어가서 살 거예요. 이하나랑.”

    두이는 본래의 단호하면서도 엄격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눈도, 코도 빨간 게 억지로 괜찮은 척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네 마음 모르는 건 아니지만, 일이 너무 커졌어. 네 누나는 마피아와 연결점이 생겼고, 너 역시 아직 범죄자야. 누명을 벗기 전까지는 일상으로 돌아가기 힘들어.”

    “누명은 벗으면 됩니다. 강무진이 줄리오 파렌티를 사칭했어요. 분명 최태준은 이하나에게 제가 파렌티 패밀리에게 당했다고 말했을 거예요. 그게 아니라면 누나가 마피아와 함께 있을 리 없잖습니까.”

    “네 말도 일리는 있지만, 강무진은 배에 있던 자신의 사람들까지 모두 죽였어. 이미 FBI의 타깃이라 한국에서 먼저 처벌받긴 힘들어. 그러니….”

    게빈이 설득을 이어나가던 그때였다. 본진과 연결된 휴대전화가 울린다.

    코드N. 요원인 티파니 커크의 코드명을 본 게빈의 얼굴이 밝아졌다.

    드디어 지원 요청이 받아들여진 건가?

    “코드K. 당신은?”

    [코드N. 게빈, 일이 복잡하게 됐어. 링크 보내 줄테니까 확인해. 아직도 새끈한 한국 남자와 함께 있나?]

    “그래그래, 새끈한 한국 남자와 함께 있어. 그런데 무슨 일이야. 무슨 링크. 지원 요청은?”

    [지원이 문제가 아니야. 너, 완전 물먹기 직전이라고.]

    심각해진 게빈은 두이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곤 고개를 까딱였다. 물먹게 됐단 말은 방해 요인이 생겼거나, 수사권을 박탈당했을 때 하는 말이었다.

    두이는 티파니가 보낸 링크를 태블릿을 통해 열었다. 그러자 유튜브에 업로드된 동영상이 재생된다.

    [저는 강무호입니다. 대한민국의 국회 의원이며, 한 가정의 가장이자 누군가의 아들이고 형입니다. 저는 오늘 국민 여러분의 알 권리를 보장하고자 이 자리에 섰습니다.]

    영상을 시청하던 두이는 사색이 되어 벌떡 일어났다. 영상 속 강무호는 동생 강무진의 억울한 죽음을 수사해 달라며 울부짖고 있었다.

    “이게 뭐야, 티파니. 지금 무슨 쇼를 하는 거지? 강무진은 살아 있잖아!”

    [그래. 근데 아무도 그렇게 믿지 않아. 아니, 일부러 죽음을 조작한 거 같아. 지금 위에서 난리야. 강무진 말고, 그 배에 있던 범죄자들 체포 명령이 떨어졌어.]

    “젠장! 그래서, 지금 제일 급한 건?”

    [이두이. 동료 살인미수 및 납치 범죄 가담. 또한, 특정 범죄에 연루된 혐의로 수배. 문제는 네가 이두이와 함께 있다는 걸 아는 놈이 한 명 있다는 거야.]

    “빌어먹을… 세르게이.”

    [튀어.]

    게빈은 전화를 끊자마자 곧장 커다란 가방에 자료들을 쓸어 담았다. 이미 눈치 빠른 이두이는 본인의 짐을 챙겨 등에 멘 뒤였다.

    그는 끊임없이 욕설을 내뱉으며 창고에 세워 둔 경차에 짐을 실었다.

    CIA의 독사라 불리는 세르게이가 수사권을 쥐었다면, 실적을 위해 제일 먼저 이두이를 잡아넣을 것이다.

    상황이 지독하게 불리해졌다.

    “누나, 누나는요? 당장 온다고 했습니다. 좌표 알려 줬고요!”

    “하! 다시 연락해!”

    “지금 연결 가능한 신호가 없어요!”

    “젠장!”

    게빈은 차에 타 시동을 건 후, 콘솔 박스에 넣어 둔 휴대전화 하나를 꺼냈다.

    발렌틴 오를로프로 위장 근무를 하던 시절 사용했던 휴대전화 속엔, 당시 거래하던 유리 페트로프와 줄리오 파렌티의 연락처가 들어있었다.

    하지만 그들을 배신한 이후론 한 번도 전원을 켜 본 적이 없었다.

    켜면 죽는다는 걸 알기에 지금껏 봉인해 왔던 휴대전화였다.

    ‘켤까?’

    중대한 결심을 한 게빈은 충전기를 연결한 뒤, 일단 두이를 태우고 창고에서 벗어났다.

    마피아에게 살길을 마련해 주는 건 내키지 않지만, 지금 파렌티가 잡히면 일이 완전히 어그러진다.

    휴대전화의 배터리 잔량이 3%까지 올라간 걸 본 그가 전원을 켜자마자 소리쳤다.

    “Siri. 파렌티 개새끼한테 전화 걸어!”

    ***

    로건은 호텔 앞에 세워 둔 자신의 메르세데스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 뒤를 느긋한 걸음의 유은성이 따랐다.

    단추 하나를 푼 셔츠에 정장 바지를 입고, 재킷을 팔에 건 남자의 머리카락이 헝클어지듯 쏟아져 눈가를 가린다. 로건은 빨갛게 피가 맺힌 유은성의 입술을 힐끔 보며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파악하려 애썼다.

    줄리오의 변호사에게 당장 호텔로 방문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줄리오 파렌티도 발렌타인 데이의 의뢰인이기에, 자신이 직접 움직인 차였다.

    유은성과 줄리오 파렌티가 몸싸움을 벌이고 있을 줄은 추호도 예상하지 못했다.

    “혹시, 줄리오 파렌티와 부딪친 이유를 여쭤봐도 될까요.”

    로건을 발견한 기사가 차에 시동을 걸고 문을 연 채 대기했다.

    입가를 엄지로 문지른 은성이 피식 웃으며 로건을 본다.

    “아마, 파렌티가 이하나에게 진심인가 보죠.”

    “예?”

    “이하나의 마음은 잘 모르겠지만, 파렌티 쪽은…. 제법 진지한 것 같습니다.”

    그는 메르세데스의 뒷좌석에 몸을 실으며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로건은 우려하던 일이 벌어졌다는 걸 예감하곤 주먹을 말아 쥐었다. 이어 그의 옆좌석에 올라탄 로건은 막 도착한 메시지를 확인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FBI 쪽에서 드디어 제대로 움직이나 봅니다. 그러지 말고 잠시 피해 계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뒤처리는 FBI가 하게 하는 편이….”

    “발렌타인 씨는 FBI가 줄리오 파렌티를 해치울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네이비실이 나서지 않는 이상, 난 불가능할 거라고 보는데.”

    “어쨌든 수사가 확대되는 건 좋은 방향이 아닙니다.”

    “혼자는 안 움직입니다. 어쩌면 파렌티가 진심이 된 것이 내게는 호재일 수도 있고요.”

    그래, 차라리 잘됐다고 은성은 생각했다.

    이하나의 곁에 머물며 얻는 정보가 꽤 쏠쏠했으나, 직접 움직이는 건 위험 부담이 너무 컸다. 하마터면 유리 페트로프와 동행한 여자에게 정체를 들킬 뻔한 순간도 있었다.

    그런 의미로, 파렌티에게 해고당한 지금은 좀 더 확실하게 구룡반도를 헤집을 수 있다.

    어두운 빅토리아 하버를 말없이 응시하던 은성은 옆 차선에 멈춰 서는 경차를 발견했다. 다 찌그러져 제구실을 하는지조차 의문스러운 차 안에서 익숙한 얼굴 하나가 보인다.

    ‘하, 뭐야….’

    그래, 이하나랑 닮은 저 얼굴을 왜 잠시 잊고 있었는지.

    은성의 검푸른 눈동자에 이채가 돌고, 입꼬린 비스듬히 올라갔다.

    언쟁을 벌이는지 버럭버럭 소리치던 경차 안의 두 남자는 신호가 바뀌자마자 쌩하니 메르세데스를 앞질렀다.

    벨트에 채워 둔 총을 꺼내며, 은성이 말했다.

    “은색 토요타. 따라갑니다. 무조건, 들이박아요.”

    탄창을 확인하는 모습에 당황한 로건은 본인의 총도 꺼내 들었다.

    그에 머릴 긁적인 유은성이 난처한 얼굴로 로건의 총열을 눌렀다.

    “단, 죽이진 않습니다. 이두이만 잡죠. 살아 있는 채로.”

    ***

    [호텔에서 당장 나와. 마티 세르게이가 너희 조지러 가니까!]

    발렌틴 오를로프의 이름을 몇 번이고 확인한 줄리오가 대답 대신 전화를 끊었다. 그러곤 곧장 페트로프에게 연락했다.

    “FBI야, 이동해.”

    [그러잖아도 움직일 생각이야. DE:A가 이곳을 지나가. 리펄스 베이. 그곳에서 합류해.]

    “네 배는 유령선인가? 안 다니는 곳이 없군.”

    [도움 필요 없으면, 그대로 출항하지.]

    “도움이 필요 없다고는 안 했어. 그런데 문제가 좀 있는데.”

    [하….]

    한숨 쉰 유리 페트로프가 한심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여자가 차고 있던 팔찌. 거기에 답이 있는데, 왜 망설이는 거지? 여자가 잘못되기라도 할까 봐? 걱정 마. 그거 소량의 프로포폴이거든.]

    “프로포폴?”

    [그래. 내가 세이에게 각성제를 쥐여 줄 거라고 생각했어?]

    “빌어먹을.”

    감히, 나를 속여?

    사나운 표정의 줄리오는 잘 정리된 주얼리 박스를 열었다. 그 안에는 지난번 사용하지 않은 팔찌를 비롯해 무기로 사용할 장신구가 가득했다.

    “15분 뒤. 리펄스 베이에서 만나도록 하지.”

    사납게 이를 간 그는 전화를 끊은 후 로마노에게 철수 명령을 내렸다. 그러곤 보석이 잔뜩 박힌 팔찌를 챙기며 잠시 고민했다.

    이것으로 이하나를 찌르면 이동은 편하겠지만 후환이 있을 테고, 설득하려 한다면 기어이 이두이가 말해 준 좌표로 달려갈 것이다.

    막을 수 없다는 걸 안다. 저 여자가 어떤 각오로 이곳까지 달려왔는지 알기에, 더더욱 설득할 자신이 없었다.

    줄리오는 클로젯과 연결된 욕실로 들어가 모자를 벗고 세수했다. 차가운 물이 얼굴과 앞머릴 타고 뚝뚝 떨어진다.

    반면, 쉬운 길은 따로 있다.

    FBI의 타깃은 자신뿐이다. 그러니 만약 여기서 이하나를 놓아준다면, 어쩌면….

    팔찌를 움켜쥔 그의 파리한 손등에 핏줄이 돋았다.

    “줄리오. 빨리 움직여. 더 늦으면 안 된다고!”

    문 너머에서 들려온 재촉. 거울을 노려보던 그는 팔찌를 가볍게 분리해 안에 든 장치를 뺐다. 그러곤 그대로 시곗줄 틈에 꽂아 넣은 뒤 밖으로 나갔다.

    젖은 얼굴을 본 그녀가 혀를 차더니 타월을 툭 던진다.

    “닦아.”

    “가지.”

    줄리오는 타월로 물기를 대충 닦곤 모자를 눌러썼다. 마스크를 썼음에도 이하나의 들뜬 표정은 숨겨지지 않았다.

    지하 주차장과 연결된 승강기를 타고 한 번의 멈춤 없이 내려가자 검은색 레인지로버가 시동이 걸린 채 대기 중이었다.

    줄리오는 운전석에 오르려는 하나의 팔을 잡았다.

    새삼 가늘고 여리다.

    이하나 앞에선 모든 것이 새삼스러워 당혹스러울 지경이었다.

    “운전은 내가.”

    하나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줄리오를 훑더니 순순히 조수석에 올라탔다.

    “좌표는 어딘지 알아냈나?”

    “스탠리 베이 근처. 창고 밀집 구역.”

    “확실해?”

    그가 하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한 갈색 눈동자에 그녀의 자그마한 얼굴이 비친다.

    “응, 확실해.”

    저 확신에 찬 눈동자. 정의를 행하지도 않으면서, 올곧게 반짝이는 눈빛이 거슬렸다. 처음부터 그러했다.

    그는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곤 차를 출발시켰다.

    타이어 짓쳐지는 소릴 내며 지하 주차장을 선회해 지상으로 올라간 SUV가 엄청난 속도로 복잡한 도로에 합류한다.

    건물의 화려한 불빛이 매끄러운 차량 표면에 반사되고, 핸들을 움켜쥔 손아귀엔 땀이 들어찼다.

    이토록 심장이 빠르게 뛰어본 적이 있던가?

    낯선 떨림이다.

    이하나는 독이었다. 눈을 뗄 수 없게 만들고,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손을 뻗게 하는 각성제 같기도 하다.

    ‘하, 빌어먹을….’

    스탠리 베이의 이정표가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간 순간, 그는 갓길 방향으로 핸들을 꺾었다.

    갑작스러운 급정거에 놀란 그녀가 손잡이를 움켜쥐며 소리쳤다.

    “야이, 미친 새…!”

    하지만 하나의 욕설은 포개진 입술 사이로 스며들어 사라졌다. 그녀의 모자가 뒤로 넘어가 등받이 방향으로 떨어진다. 그는 부드럽고 달착지근한 입술을 욕심껏 헤집어 파고들었다.

    감았던 눈을 뜨자, 질끈 감긴 여자의 눈가가 찡그려지는 게 보인다. 줄리오는 그녀의 턱을 움켜쥔 채 상체의 반을 조수석으로 기울였다.

    결정을 내린 두 눈이 선득하게 빛난다.

    그는 자신의 왼쪽 손목을 비틀었다. 제 목을 조르고 칼로 벤다 해도 결정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하얀 액이 맺힌 바늘을 그대로 목 뒤에 꽂아 넣자, 따끔함을 느낀 그녀의 눈이 번쩍 뜨였다.

    30초만 버티면….

    경악한 하나의 눈빛이 떨리는가 싶더니, 있는 힘껏 그의 목울대로 손을 뻗었다. 줄리오는 반항 없이 시선을 내리뜬 채 그녀를 보았다.

    “나쁜 새끼….”

    탁하게 읊조린 하나의 눈가에 말간 눈물이 맺힌다.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 이건 살면서 처음 느껴보는 기이한 통증이었다.

    “Scusami tan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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