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 (37/180)

<37>

[대한민국의 정의를 지키는 비밀 요원입니다! 해외 범죄를 수사하고, 강력 범죄로부터 우리 국민을 지키는! 그런 요원이 범죄자들에게 당했습니다. 한 명은 폭탄 테러에 연루되어 사망했으며, 또 한 명은 생사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또한, 살해당해 바다로 버려진 故강무진 씨는 저의 혈육이기도 합니다. 무운해운의 대표 이사이자 오래도록 숨겨왔던… 제 배다른 동생이었습니다. 예, 콩가루 집안이라고 욕하셔도 좋습니다. 하지만 저는 제 동생을 살해하고 시신을 훼손한 범죄자들을 정의로 심판할 것입니다! 이미 FBI와의 공조를 요청해 놓은 상태입니다. 범죄자들은 특정되었으며, 곧 그들의 신변이 공개될 예정입니다.]

화면 속 강무호는 가슴을 치며 눈물을 펑펑 쏟았다.

은성은 자신의 형님이 이토록 연기에 능한 사람인 줄 처음 알았다. 유튜브를 통해 퍼져 나간 동영상은 각종 해시태그를 달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사람들은 정치권의 가짜 선동이라 떠들기도 했고, 자국민을 지켜야 한다며 큰소릴 내기도 했다. 공통적으로는 집안이 콩가루라든가, 회장이 좆을 함부로 놀렸다며 비아냥거리는 반응이 대다수였다.

“재밌네.”

강무호에게 가짜의 죽음을 알리자마자 벌어진 언론 플레이. 그것도 기다렸다는 듯 쏟아지는 발언들은 아무 때나 볼 수 없는 대단한 코미디였다.

은성은 차가운 생맥주와 육즙 가득한 만두를 받아 플라스틱 테이블에 앉았다.

그가 있는 곳은 파라솔이 쳐진 센트럴 지역의 유명 만둣집이었다. 휴대전화로 유튜브를 보며 뜨거운 만두를 깨물자 혀를 적시는 육즙이 주르륵 흘러나온다. 은성은 깊은 고기 맛을 음미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강무호의 영상을 제멋대로 해석한 가짜 뉴스가 판을 친다.

강무호가 제공한 떡밥을 문 물고기들이 수면 위로 튀어 올랐다.

뜨거운 날씨에 뜨거운 만두. 그에 반하는 차가운 맥주를 꿀꺽꿀꺽 들이켜는데, 눈앞으로 커다란 그림자가 졌다.

은성은 본능적으로 총을 꺼내 들려다 말고 상대를 보며 산뜻하게 웃었다.

“로건 발렌타인 씨.”

이 더운 날씨에도 정장을 갖춰 입은 로건이 손수건을 꺼내 이마에 흐른 땀을 닦는다. 그러자 어느새 뒤로 나타난 오슬로가 휴대용 선풍기를 슬그머니 내밀었다.

작은 프로펠러가 제법 시원한 바람을 만드는 것에, 고개를 주억인 로건이 선이 분명한 입술을 열었다.

“계약 해지합시다. 발렌타인 데이의 요원들을 타깃 삼을 거란 말씀은 없으셨습니다. 엄연히 룰 위반입니다.”

“아아, 미안하지만…. 그거 내가 지시한 거 아닙니다. 배에 FBI가 있었어요. 그쪽 요원들을 적으로 간주한 것 같던데요?”

“FBI? 그럴 리가요!”

FBI라는 말에 로건의 표정이 바뀌었다. 은성은 휴대전화 화면을 로건의 방향으로 내보이며 직원을 불렀다. 그러곤 로건과 오슬로 몫의 만두를 추가로 주문했다.

“이미 강무진은 죽었습니다. 사람들은 줄리오 파렌티와 그 외의 범죄 집단을 처벌하고 싶어 하죠. 자… 한 나라의 시선을 집중시켰어요. 그럼, 누가 유리할 것 같습니까?”

로건은 각국의 언어로 번역되어 퍼지고 있는 강무호의 인터뷰 영상을 보았다. 그러며 기가 찬 표정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정말 이 남자가 원했던 대로 비정상적인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이게… 가능합니까?”

“눈으로 보고도 몰라요? 가짜는 제가 죽였어요. 하지만 나머지는 아닙니다. 뭐, 오슬로 씨의 머리에 레이저 포인트를 쏜 건 인정하죠. 이하나랑 너무 딱 붙어 있더라고요.”

그 말에 두 눈을 부릅뜬 오슬로가 벌떡 일어나려 했다. 로건이 아니었다면 멱살을 잡아 둘러치고도 남았을 터.

은성은 싸늘한 표정으로 오슬로를 노려보며 서빙된 만두를 내밀었다.

“만두는 제갈량의 계책으로 태어난 음식이죠. 수신에게 바칠 사람의 머리 대신, 만두를 사람 머리 모양으로 빚어 바다에 바쳤다고 합니다. 사람, 머리. 그것도 바다에 바쳐진.”

의미 모를 말을 중얼거린 은성이 젓가락으로 집어 든 만두를 입에 넣고는 우물우물 씹었다. 로건과 오슬로는 앞에 놓인 만두와 은성을 번갈아 보며 치미는 욕지거릴 삼켰다.

“어쨌든, 더 이상 무운해운의 의뢰는 받지 않겠습니다. 만약 일을 의뢰하시려면 몸값을 3배로 올려 주셔야 할 테고요. 거래, 하시겠습니까?”

로건은 능숙하게 나무젓가락을 반으로 가르며 유은성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짧게나마 생각에 잠겼던 은성이 편안한 자세로 등받이에 기대더니 맥주잔을 들었다.

“5배 올려드리죠. 단, 해 줘야 할 일이 있습니다. 이하나와 관련된 위험 수당이 붙어서 5배입니다. 발렌타인 씨야말로, 나와 거래하겠습니까?”

블랙은 위험신호다.

이하나로부터 검정이 얼마나 위험한 색인지 배운 이들은 유은성의 까만 눈동자에 한기가 들어차는 것을 경고로 인식했다.

“One을 해치는 거라면, 못합니다.”

로건을 대신해 대답한 건 오슬로였다. 그에 유은성은 맥주까지 깨끗하게 비운 채 계산서를 들었다. 그러자 어디선가 종업원이 다가와 카드를 받아간다.

“걱정 말아요. 해치는 게 아닙니다. 그 반대지.”

그렇게 말하곤 자리에서 일어서자, 생각에 잠긴 로건이 두 눈을 치켜뜨며 묻는다.

“듣자 하니 무운해운의 보안실 직원들까지 처리하셨다던데요.”

“내 얼굴을 봤거든요. 아, 그쪽은 내가 약점을 갖고 있으니 괜찮아요. 우린 동류니 말입니다.”

유은성은 힘을 숨기고 있다. 그걸 알기에 오슬로는 말아 쥔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은성은 그런 오슬로에게 싱긋 웃어 준 뒤, 카드와 영수증을 받아 들었다.

“승낙으로 알고, 연락하죠.”

다섯 배라면 발렌타인 데이의 1년 매출과도 맞먹는 수준의 의뢰비다.

로건 발렌타인이 거절할 리 없는 금액이기에 그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자리를 뜬 은성은 택시를 타고 호텔로 돌아와 곧장 욕실에 들어갔다.

에어컨이 돌아가며 실내의 열기를 몰아내는 동안, 그는 변기를 붙들고 토악질을 했다.

만두는 맛이 좋았지만, 결국 소화시키지 못했다.

토악질을 하는 내내 머릿속엔 계속해 동생을 잃었다며 울부짖는 강무호의 얼굴이 재생되었다.

속에 있는 것을 모두 게운 후에야 차가운 물 아래 선 그는 입을 헹군 뒤, 보디클렌저를 꾹꾹 짜 몸에 발랐다.

지난밤, 이하나가 약에 취한 줄리오와 함께 방으로 들어가더니 몇 번이나 물건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은성은 밤새도록 방문 앞에 서 있었다.

방음 시설이 좋은 탓에 대화 소리가 들린 건 아니었다. 그저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나 벽에 부딪히는 소리. 이따금 그만 좀 하라며 소리 지르는 이하나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새어 나올 뿐이었다.

머리 위로 차가운 물이 쏟아져 내려온다.

은성은 타일 벽에 이마를 대곤 천천히 성기를 움켜쥐었다. 손을 움직일 때마다 갈라진 등 근육이 움찔거리며 형태를 드러냈다.

자극이 더해질수록, 그는 이하나의 환상을 좇았다.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것 같은 여자가 다릴 벌린 채 제게 박히는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절정은 급박하게 찾아왔다.

우는 얼굴이 얼마나 예쁠지, 절정에 달했을 때의 표정은 또 얼마나 환상적일지.

물론, 그녀를 생각하며 좆을 잡고 흔드는 걸 알면 기함하며 주먹부터 날리겠지만, 이하나는 그만한 가치가 있는 여자다.

적어도, 마피아 같은 쓰레기가 넘볼 여자가 아니다. 이하나는.

“씹….”

거친 숨을 몰아쉬며 욕설을 흘린 그는 움켜쥔 손안에 사정했다.

끈적하고 미끄덩거리는 정액이 뚝뚝 흐른다.

“하아, 하아….”

차가워진 머릿속에서 시작된 자괴감이 자연스럽게 전신으로 번졌다. 은성은 미지근해진 물로 비누 거품을 닦아 내며 이성을 되찾았다.

그래, 이 정도면 아직은 버틸만하다.

제법 개운한 마음으로 수건 한 장만 두른 채 욕실을 나서는데, 낯선 기척이 느껴졌다. 욕실 입구에 놓인 콘솔을 연 그의 눈빛이 벼려진다.

넣어 둔 총이 보이지 않았다. 상대가 방을 뒤졌다는 뜻.

“더럽게 오래 씻는군.”

1인용 의자 방향에서 들려온 목소리의 주인공은 줄리오 파렌티였다.

은성은 자신의 총을 만지작거리는 줄리오를 보며 짐짓 태연하게 미소 지었다.

“방을 잘못 찾아온 것 같은데요.”

“왜 그렇게 생각하지?”

“천하의 줄리오 파렌티가 남자의 방을 찾는 건, 죽일 때와 경고할 때. 둘 중 하나 아닙니까?”

피식 웃은 줄리오가 고개를 주억인다. 그저 가벼운 수긍의 제스처였지만, 은성은 모든 신경을 줄리오 파렌티를 향해 곤두세웠다.

총을 테이블에 내려놓은 줄리오가 꼬아 올린 무릎 위에 깍지 끼운 손을 얹는다.

“리우, 당신. 해고야.”

거울 앞에 서서 머리를 털던 은성은 황당한 표정으로 돌아섰다.

이건 또 생각지 못한 서프라이즈다.

“왜입니까?”

“그건 네가 더 잘 알 텐데.”

“내가… 신경 쓰입니까?”

은근한 유은성의 목소리에 웃은 줄리오가 그를 올려다본다. 그러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타월을 목에 건 유은성은 선뜻 걸음을 내디뎠다. 그러곤 줄리오 파렌티를 거만하게 내려다보며 앞에 섰다.

관자놀이를 나른하게 문지르던 줄리오가 유은성의 다리를 걷어찬 것도 동시였다.

무릎이 꺾여 앞으로 주저앉을 뻔한 은성은 남자의 허벅지를 움켜쥔 채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러자 다리를 벌린 줄리오가 감정 없는 표정으로 유은성의 머리채를 쥔다.

“이하나가 그러더라. 본인한테 풀지 말고 사내새끼한테 박고 오라고. 근데… 아쉽게도 안 꼴리네.”

힘으로 버텨 보려 했지만, 뒤통수를 누르는 힘이 보통이 아닌지라 은성의 얼굴은 줄리오의 앞섶에 파묻히기 직전이었다.

이를 간 그가 비릿하게 웃으며 줄리오를 도발했다.

“미안한데, 난 박히는 취미 없습니다. 박으면 몰라도.”

“나도 마찬가지야. 그래서… 해고라는 거지. 넌 박히는 새끼가 아니라서.”

그의 머리채를 잡은 줄리오가 벌떡 일어났다. 은성은 곧장 손을 꺾었다. 하지만 이내 놓치곤 그대로 카펫 위에 미끄러졌다.

‘젠장!’

가까이에 숨겨 둔 나이프를 꺼내 던지려 하자, 줄리오는 조금 전 앉아 있던 의자를 집어 들어 벽으로 내동댕이쳤다.

와장창 소릴 내며 부서져 버린 의자.

순간, 문이 벌컥 열리더니 사색이 된 로건과 이하나가 뛰어든다.

“뭐 하는 짓이야!”

“뭐 하시는 겁니까, 두 분!”

바닥에 뻗어 있는 유은성에게 뛰어가려던 그녀의 허리가 잡혔다.

줄리오가 그대로 하나의 눈을 가리고는 번쩍 안아 든다. 그녀는 줄리오의 머리채를 움켜쥐며 이를 갈았다.

“목 꺾어 버리기 전에 내려놔! 왜 허구한 날 리우랑 싸움을 하냐고!”

“마음대로 해. 네가 내게 헤드록을 걸어도 안 내려놓을 생각이니.”

“야!”

“발렌타인!”

줄리오는 강경한 목소리로 로건을 부르며 제 어깨를 깨무는 하나의 허벅지를 강하게 조였다.

로건이 피로 물드는 줄리오의 셔츠를 보며 인상을 찌푸린다. 보는 것만으로도 이토록 아픈데, 줄리오 파렌티는 익숙한 태도로 유은성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거 회수해. 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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