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 (32/180)

<32>

“이, 이거 놓고…!”

“너, 누구냐고 물었어. 말해. 강무진 아니지.”

남자는 일반인이다. 그래서 하나는 힘 조절을 해야 했다. 숨을 쉴 수 있게 해 주되 양팔을 쓰지 못하게 무릎으로 누르자, 남자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아아악!”

“경호원 불러 봤자 소용없어. 저거, 너 지키는 경호원 아니거든. 널 감시하는 것뿐이지.”

“사, 살려….”

“진짜는 누구고, 어디에 있지? 널 여기에 보낸 사람. 누구야.”

“강무진, 강무진! 진짜는 강무진인데, 본적 없….”

“똑바로 말해!”

“전화번호! 캄보디아 번호로 연락이….”

씨발, 그럴 줄 알았지.

하나는 총을 꺼내 놈의 이마에 댔다. 그러곤 무릎으로 누른 팔을 놓아준 뒤, 재킷 안에 들어 있던 휴대전화를 배 위에 던졌다.

“걸어. 네게 연락한 놈한테.”

“사, 살려 주세요! 저 죽어요! 제발, 살려 주십시오!”

눈물까지 글썽거리는 게 딱 삼류 양아치에게 턱시도를 입혀 놓은 그림이 그려졌다.

하나는 그의 귀에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총알은 소파에 박혔지만, 총구의 열에 덴 남자가 비명을 지르며 발작한다. 하지만 그녀는 한 번 더 방아쇠를 당기며 놈의 턱뼈를 부술 듯 움켜쥐었다.

“걸어. 전화.”

“예예예! 예예!”

벌벌 떨며 휴대전화를 몇 번이고 떨어트린 남자가 저장된 번호를 찾아 누른다.

“스피커.”

“예예!”

지금쯤이면 관음증을 앓는 진짜 쓰레기는 사태 파악을 끝냈을 것이다.

하나는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다는 걸 알고 있기에, 부러 강경하게 행동했다. 만약 진짜 강무진이 이 모습을 보고 있다면 지금쯤 액션을 취했으리라.

곧 감도가 먼 신호음이 이어지고 그녀의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낼 때쯤, 통화가 연결되었다.

[입이 싸구려군요. 내가 딱 싫어하는….]

스피커에서 들려온 건 변조된 음성이었다. 왜곡된 목소리에 놀랐는지 가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말 좀 해 주세요! 진짜, 그냥 그 자리에 서 있기만 하면 된다고 하셨….”

“야.”

하나는 짜증을 섞어 말을 끊었다. 그러며 선득한 눈빛으로 가짜의 이마에 댄 총구를 힘주어 눌렀다.

“강무진.”

[…예. 이하나 씨.]

역시, 알고 있었던 건가?

그녀는 싸늘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네가 무슨 짓을 하든 신경 안 써. 나는 내 동생만 찾으면 되거든. 좋아, 그쪽. 복잡한 인생 사는 거 인정할게. 근데 하나만 묻자. 내 동생, 이두이…. 네가 데리고 있니?”

작은 코웃음 소리가 들렸다.

심장이 터질 것 같다. 목소릴 변조해야 할 만큼, 본인의 정체를 숨기는 데 사활을 걸었다는 것이 느껴졌다.

“대답해. 이 가짜 새끼 죽여서 네 대가리한테 뿌려 버리는 수가 있어.”

[내 뒤에 누가 있는지 알고.]

“누구겠어. 고매하신 국회 의원 강무호님이시지. 강무영 회장이 죽을 둥 살 둥 해도 안 될 지경이니 네가 나섰나 본데…. 너, 실수한 거야.”

상대는 잠시 대답을 하지 않았다.

[고개 숙여.]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위험을 감지한 그녀가 소파 아래로 몸을 숙임과 동시에 창문을 깨고 총알이 날아왔다.

퍽!

정확하게 가짜의 머릴 관통한 총알이 소파에 박히고, 남자는 눈도 감지 못한 채 생을 마감했다. 그에 분노가 머리 꼭대기까지 차올랐다.

“이, 개새끼야!”

[이두이를 내가 데리고 있진 않지만, 당신과 아주 가까이에 있다는 건 압니다. 어디 있는지 궁금해요?]

“말해. 말해, 당장! 두이… 살아 있는 거 맞지? 하, 그럴 줄 알았어.”

[흥분하지 마요. 이제 그만 파티를 끝내죠. 잘 잡아요, 떨어지지 말고.]

“뭐?”

[우린 꼭 만날 거예요, 이하나 씨.]

이 말투, 묘하게 익숙하다.

그녀가 다급히 가짜 강무진의 휴대전화를 챙긴 순간이었다. 닫혀 있던 문이 벌컥 열리더니 오슬로가 뛰어들어 왔다.

“젠장! 죽인 거야?”

“아니야. 내가 이런 놈한테 총알 낭비할 거 같아?”

“빌어먹을, 당장 피해. 난장판이 될 거야.”

하나는 나이프를 꺼내 거추장스러운 치마를 쫙 찢었다. 드레스를 짧은 미니스커트로 만든 그녀가 하이힐을 벗어 버린 뒤, 오슬로의 허리춤에 꽂혀 있던 휴대용 스코프를 빼앗아 착용한다. 그러곤 2층 난간에서 1층 방향을 훑었다.

이미 감 좋은 사람들은 분위기가 이상해졌다는 것을 알아챘는지 슬금슬금 행사장을 빠져나가는 중이었다.

이곳의 사람들을 모두 죽일 생각이 아니라면, 실력 좋은 저격수가 필요할 것이다. 만약 저격수를 배치하지 않았다면….

하나는 총을 빼 든 줄리오를 발견했다. 그는 누군가를 보호하고 있었다. 그것도 유리 페트로프와 함께 한 사람을 온몸으로 막고 서 있었다. 언뜻 검정 머리카락이 보이는 걸 보니, 그가 보호 중인 여자는 장세이다. 그에 안도감을 느낌과 동시에 이상하게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런 그들의 곁에는 누군가 피 흘린 채 쓰러져 있었다. 그녀는 줄리오의 재킷에 튄 피와 바닥에 쓰러진 남자의 얼굴을 차례로 확인하곤 순식간에 뒤로 다가서던 오슬로에게로 총을 겨눴다.

쓰러진 남자의 재킷에 꽂힌 발렌타인 데이의 배지.

찰칵, 소릴 내며 장전된 총의 방아쇠에 아슬아슬하게 검지가 걸렸다.

그녀의 지척까지 다가선 오슬로가 끈을 든 손을 어깨높이로 올린다.

“너, 나 납치하려고 했냐?”

“아, 아니… 그게 아니라.”

“타깃.”

오슬로에게 이하나는 공포다. 그녀는 성큼성큼 그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그만큼 물러난 오슬로가 보일 듯 말 듯 입술을 움직인다.

“다 보고 있을 거야. 젠장…. 그러니까 내가 널 덮칠게. 너를 저쪽으로 던질 테니까, 사각지대 확보될 때까지 제발 가만히 있어.”

“타깃이 누구냐고 물었어.”

“이하나, 제발. 시간이 없다고!”

“타깃!”

얼굴에 핏대를 세운 그녀가 일갈하자, 창백해진 오슬로가 1층 방향을 눈짓했다.

“파렌티.”

사칭한 새끼가 진짜를 죽이겠다고?

황당함도 잠시, 오슬로의 이마에 붉은색 레이저 포인트가 쏘아졌다. 그에 그녀는 커다란 덩치의 멱살을 당겼다.

두 사람이 뒤엉켜 바닥을 구르는 동안, 오슬로가 있던 자리에 날아든 총알이 박힌다. 석고 파편이 튀자 오슬로는 험악한 욕설을 쏟아냈다.

“나랑 붙어 있는 새끼들, 다 죽일 심산인가 보네. 이제부터 발렌타인 데이는 각개 전투야. 알아서 살아남아.”

“너는!”

“나는 쟤랑 약속한 게 있거든. 쟤가 내 동생 찾아 주기로 했어. 그럼, 나는 쟤를 살려야겠지?”

“넌 미쳤어!”

“언젠 내가 정상이었냐?”

하나는 벽에 등을 기댄 채 몸을 낮췄다. 지금 상대에게 모든 행동을 꿰뚫리고 있다. 게다가 상대가 고용한 킬러가 먼저 발렌타인 데이를 노렸다. 가짜 강무진에게 총을 쏜 것도 그쪽일지 모른다.

빠르게 조금 전 총알이 날아온 방향을 살폈지만, 역시나 자리를 뜬 뒤다.

총을 쏜 사람이 강무진 본인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남겨 둔 그녀가 줄리오 파렌티를 찾아 난간 아래를 살필 때였다.

웨이터 복장을 한 남자 셋이 쟁반 아래로 손을 넣는 게 보였다. 언뜻 총의 일부가 드러났고, 줄리오 파렌티가 지척에 있었다.

“제발 좀 피해. 미친놈아. 네가 타깃이라고!”

하나는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하지만 상대는 셋, 이 속도로는 둘까지만 커버가 가능했다.

제게 저격용 총이 있었다면, 이렇게 멍청하게 숨어 있는 짓은 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정확하게 머릴 맞은 웨이터가 쓰러지자마자 바로 다음 타깃으로 총구를 옮겼으나, 방아쇠를 당기기도 전. 다른 곳에서 날아온 총알에 두 명이 연달아 쓰러졌다.

사방에서 울려 퍼지는 비명.

누군지 몰라도, 이곳에 우리 편인 저격수가 있다. 안도한 하나는 스코프 너머로 줄리오와 눈이 마주쳤다. 여자를 안고 있던 그가 분노한 얼굴로 그녀를 노려본다.

하지만 곧 하나라는 것을 확인하자 표정이 단번에 풀어졌다. 웅크린 여자를 러시아인에게 부탁한 줄리오가 그녀의 방향으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타깃 해제! 타깃 해제!”

오슬로가 3층 계단을 뛰어오르며 무전에 대고 소리치자, 발렌타인 데이의 요원들은 자신들을 노리는 놈들만 골라 해치우며 자릴 뜨기 시작했다.

피아의 구분 없이 뒤엉킨 사람들. 사방에서 울려 퍼지는 총성은 적이 누구인지 구별할 수 없게 했다.

“이하나!”

하나는 소리의 방향으로 방아쇠를 당겼다. 뛰어올라 온 줄리오에게 덤벼들던 놈의 목이 확 꺾인다. 하필 목에 맞았는지, 피 분수를 뿜으며 난간 아래로 떨어졌다.

달려온 그는 주저앉은 그녀의 어깨를 잡곤 흔들리는 눈빛으로 전신을 샅샅이 살폈다.

“너…!”

“나 안 다쳤어. 너야말로 이 피, 뭐야.”

하나가 재킷을 당기자 줄리오가 조금 전 뛰어나온 개인실을 향해 그녀를 잡아끌었다. 둘은 개인실로 들어가자마자 문을 닫았다.

하나는 파악해 놓은 카메라로 총알을 날렸다. 이 좁은 개인실에만 네 대의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곤 도청기가 설치된 석고상을 깨 버린 뒤 탄창을 꺼내 갈았다.

“빌어먹을. 여기로 총알이 날아갔어. 네가 잘못된 줄 알았다고! 젠장!”

“하, 그래서 너도 총 맞은 거야?”

“내 피로 보여? 갈기려는 새끼를 조졌을 뿐이야.”

그는 죽은 가짜를 서늘하게 노려보며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그때였다. 머리 위로 헬리콥터 소리가 요란하게 울린다.

하나는 창문 밖 건물에 비친 헬기의 로고를 확인한 후 경계를 풀었다.

“발렌타인 데이야. 로건이 보낸 거 같아.”

“퇴로 하난 확실하군. 어쨌든 네 안전이 확보되었으니, 시간 끌 필요 없겠어.”

사납게 중얼거린 그가 수화기에 대고 명령했다.

“밀어 버려.”

상대가 누구인지는 궁금하지 않았다. 이내 고립되어 있던 행사장 문이 열리고,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요란하게 울린다.

이 소란이 잦아들 때까지 경찰 출동마저 막아낸 강무진의 힘에 하나는 새삼 놀랐다.

“바로 움직여. 호텔로 갈 거야.”

줄리오는 테이블에 놓여 있던 샴페인을 병째 들어 벌컥벌컥 들이켰다. 잠시 남자의 알코올 중독을 의심하던 찰나, 인상을 찌푸린 그가 굳은 얼굴로 그녀를 돌아본다.

“설마… 이걸 마셨나?”

“아니. 난 임무 중엔 술 안 마셔.”

아르망디 브리냑 로제. 꽤 고가에 팔리는 프리미엄 샴페인이라 눈이 갔지만, 임무 중엔 술에 손댄 적 없었다.

의심하는 눈빛에 고개를 젓자, 마른세수한 줄리오가 탁한 숨을 내쉬더니 바닥에 있는 시신에 총을 갈기기 시작했다.

“야!”

소스라치게 놀란 하나가 그의 총을 빼앗았다.

“뭐 하는 짓이야!”

뒤로 몇 걸음 물러난 줄리오가 고개를 한 번 내젓고는 알아들을 수 없는 욕설을 내뱉었다. 눈을 시뻘겋게 붉히곤 시체를 향해 주먹을 쥐락펴락하며 온갖 욕을 쏟아붓는다.

“너, 이거…. 설마.”

그때였다. 두 사람이 몸을 숨긴 개인실 문이 요란한 소릴 내며 부서지더니, 로렌조와 로마노를 비롯해 유은성까지 사색이 되어 들이닥쳤다.

“FBI야, 움직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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