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 (28/180)
  • <28>

    “전후 설명을 해 봐.”

    서랍을 열어 글록을 꺼낸 줄리오가 탄창을 분리해 그 안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그에 로렌조는 줄리오의 피 묻은 셔츠를 보며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그게… 나도 잘 몰라. 누굴 죽이러 간 건지, 살리러 간 건지. 여자의 부탁으로 한 놈에게 엘리오를 붙여놨고, 현장에 올라가 보니 덩치 세 명이 죽기 직전이더군. 총은 교전 중에 맞은 거 같고.”

    “그러니까…. 혼자 보냈다?”

    “아니, 따라오면 죽인다는데 어떻게 해! 줄리오, 난 억울하다고!”

    “순순히 말 들을 여자는 아니지. 그럼, 놈들은.”

    “모르지. 경찰을 불렀으니 알아서 할 거야. 하나, 그러니까…. One은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놈들을 처리했어. 소름 끼치는 여자야.”

    당시를 상기하듯 로렌조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웃음기 없는 표정의 줄리오는 오랜만에 건벨트를 가슴에 두르곤 재킷을 걸쳤다.

    그에 놀란 로렌조가 큰 눈을 껌뻑이며 줄리오의 앞을 막아섰다.

    “설마, 가려고?”

    “엘리오의 위치는?”

    “줄리오!”

    “앞장서.”

    로렌조는 머릿속이 하얘졌다. 치료를 받지 않겠다며 버티는 여자도, 그 여자를 이렇게 만든 놈을 만나러 가겠다는 줄리오도 정상이 아니었다.

    불안했다. 줄리오의 모습은 점점 과거를 닮아가고 있었다.

    로렌조는 불 꺼진 복도로 저벅저벅 걸어가는 줄리오의 뒷모습을 보며, 자리에 없는 로마노를 원망했다.

    ‘빌어먹을, 로마노! 지금 어디서 뭐 하고 자빠져 있는 거야!’

    ***

    최태준의 몸에서 파스 냄새가 진동했다. 발목을 접질린 태준은 절뚝거리며 건물 전체의 보안 장치를 작동시켰다.

    프놈펜 시내의 7층 건물인 이곳은 현지 여행사 등 여러 곳과 사무실을 공유했다. 외부에서 볼 때 이곳은 해외 봉사를 온 한국인 의료진들을 위한 안내소 같은 곳이었다.

    현지인들이 방문할 이유가 없고, 가이드라인을 갖고 찾는 봉사팀이 굳이 연락할 일도 없는.

    위장 업무가 많은 탓에 사무실에 출근하는 이들은 한국에서 넘어오는 지시를 담당하는 사무직 요원들이 전부였다.

    이두이가 현장직이었다면 태준은 사무직으로, 지금껏 현장을 서포트하는 역할을 했다.

    태준은 불도 켜지 않은 채 소파에 누웠다. 몸이 덜덜 떨리고, 마지막으로 보았던 피 터지는 장면들이 눈앞에 재생된다.

    그는 애써 고개를 저었다. 제가 이두이의 죽음에 연루되었다는 건 이하나의 뇌피셜이다. 어디에도 증거가 없고, 한국 법정에 선다면 오히려 이하나에게 협박당한 피해자가 될 수 있다.

    태준은 벌떡 일어나 컴퓨터를 켰다. 오늘 밤이라도 당장에 출국할 수 있는 루트를 알아보기 위해 정신없이 항공사를 뒤졌다.

    파견 요원의 갑작스러운 입국에 당국은 당황하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죽는다.

    이곳에서 이하나에게 목숨을 잃느니, 자국에 가서 법적인 처벌을 받는 편이 나았다.

    그때였다. 갑자기 건물 전체의 불이 켜졌다. 놀란 태준이 전원 스위치가 있는 입구를 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그러자 이번엔 불이 모두 꺼지더니 사무실에 있던 컴퓨터들의 모니터가 일제히 켜졌다.

    “뭐야.”

    태준은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소름 돋은 팔을 쓸었다.

    이곳의 보안은 최고 수준을 자랑했다. 낙후된 건물일지라도, 이들이 사용하는 7층 꼭대기엔 헬리포트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더불어 6층 이후론 아무나 올라올 수 없게끔 추가 설계까지 된 곳이었다. 게다가 비상구 역시 생체 인식 없이는 열리지 않는다.

    태준은 서랍에 넣어 둔 총을 슬그머니 꺼냈다. 그럴 리 없겠지만, 건물의 보안에 문제가 생긴 것 같았다.

    그는 컴퓨터의 검색 기록을 삭제한 후 총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천천히 뒷걸음질 쳐 벽에 등을 기댔다. 창문 또한 방탄유리인지라 RPG-7을 쏘지 않는 이상 뚫고 들어올 수 없다.

    총으로 입구를 조준한 그는 창밖을 곁눈질했다. 자정이 넘은 시각이다. 어둠이 내려앉은 건물 밖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그러다가 태준은 묘하게 낯설지 않은 차 한 대를 발견했다.

    검정 SUV는 이곳에서 보기 드문 고급 차종으로 아파트에서 도망치던 시점, 제게 말을 걸었던 백인이 내린 것과도 같았다.

    이탈리아어를 썼던….

    순간 머리털이 쭈뼛 곤두섰다.

    ‘말도 안 돼. 아니겠지. 경보도 안 울렸는데 무슨….’

    태준은 제발 빨리 동이 트길 기도했다. 어둠이 두렵긴 처음이다. 벽에 등을 기댄 태준은 입구를 조준한 손에 힘을 풀지 않았다.

    그가 마른침을 삼키곤 숨을 몰아쉴 때였다. 어디선가 담배 냄새가 새어 들어왔다. 예민하게 냄새를 맡은 태준은 그것이 보통의 담배와는 다르다는 걸 깨닫고는 이를 악물었다.

    이곳에, 최고급 시거를 태울 사람은 없다. 적어도 사무실을 방문할 동료 중에는 없었다.

    태준은 제게 괜찮냐고 물었던 남자의 이탈리아어가 계속해 떠올랐다. 혹시 그 남자가 줄리오 파렌티였을까?

    아니다. 줄리오 파렌티는 천사의 얼굴을 한 악마라고 알려져 있었다. 그 얼굴이 천사는 아니었으니, 하나를 돕는 마피아 정도 될 터.

    울고 싶어진 태준은 손을 벌벌 떨었다. 1분 1초가 이토록 길게 느껴질 줄이야.

    막 억울한 표정으로 눈을 감은 찰나였다.

    탕!

    어디선가 날아온 총알이 왼쪽 허벅지에 박혔다.

    “아악!”

    경악한 태준은 끔찍한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대체 어디서 날아들었는지도 가늠하지 못한 채, 식은땀을 흘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죽음의 공포가 지척까지 다다랐다. 태준은 피가 줄줄 흐르는 허벅지를 움켜쥐고 자리에 스르륵 주저앉았다.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이곳엔 감시 카메라의 사각지대가 없었다. 그걸 감안하면 상대는 그 사실을 전혀 모르거나 전혀 개의치 않는 사람일 것이었다.

    어느 순간 열린 문. 태준이 놀란 건 걸어 들어온 사람이 한 명이어서였다. 항시 죽음의 위협을 받기에 절대 혼자서는 다니지 않는 것이 마피아 보스다. 하지만 지금 걸어 들어오는 남자는 혼자였다.

    태준은 고통 속에서도 자신에게 총을 겨눈 이가 누구인지 정확하게 인지했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벌벌 떨던 태준은 패닉 상태로 줄리오 파렌티를 맞았다.

    왜 경보가 작동하지 않았으며, 줄리오 파렌티는 어떻게 건물 안에 들어올 수 있던 걸까.

    가까이서 본 파렌티는 사람들이 말하던 그대로였다. 오금이 저릴 만큼 선천적으로 타고난 듯한 위압적인 분위기.

    “나한테, 왜….”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고 어눌하게 뭉개진다.

    줄리오는 최태준을 내려다보며 앞에 섰다.

    “내 이름을 함부로 이용했더군.”

    “그, 그런 적 없어!”

    “날 살인자로 만들었던데?”

    “그, 그게…! 아니야, 내가 아니야! 내가 누군지 알아. 누가 그랬는지 알려 줄 테니, 이러지 말고…!”

    “내게 누명을 씌운 대가라고 생각해. 그리고….”

    줄리오는 그대로 방아쇠를 당겼다.

    “으아악!”

    “이건 그냥. 내 기분이 더러워서.”

    끔찍한 비명과 함께 두 번째 총알이 태준의 오른쪽 허벅지를 관통했다. 태준은 쇼크를 이기지 못하고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와중에 오줌을 지린 건지, 태준의 앞섶이 젖어간다. 눈을 뒤집고 쓰러져 버린 태준을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내려다본 줄리오는 총을 회수해 돌아섰다.

    그러자 입구에 서 있던 로렌조가 다가와 태준의 상태를 살폈다. 다행히 목숨은 붙어 있었다.

    최태준이 저지른 일은 이동하며 들은 게 전부였지만, 로렌조는 줄리오의 이름을 팔아먹은 최태준을 죽이지 못해 이를 갈았다.

    “그러게 내가 괜찮냐고 물었을 때 빌었어야지, 시뇨르.”

    이하나를 상처 입힌 놈들은 모두 사망했다. 이곳에 오기 전, 현장을 찾은 줄리오는 아직 살아 있는 놈들의 머리에 총알을 박아 넣었다.

    그것은 단순한 분풀이도, 깔끔한 일 처리를 위한 절차도 아니었다.

    이하나의 손에 이들이 죽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뜻일지도….

    “로마노가 일정을 앞당겼더군. 두 시간 뒤, 이륙 허가가 떨어졌어.”

    승강기 앞에 서 있던 줄리오가 담뱃불을 붙이며 말했다. 둘은 1층으로 내려와 대기 중이던 차에 올랐다. 그때까지도 세상은 고요했고, 그 어디에서도 죽음의 냄새를 맡을 수 없었다.

    “줄리오… 차라리 화를 내. 이러는 게 더 무서우니까.”

    로렌조는 신경질적으로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그러자 가죽 장갑을 벗던 줄리오의 입꼬리가 나른하게 휘어 올라간다.

    “파티에 참석한 후 바로 본국으로 돌아갈 거야. 밀로 영감의 생일 파티를 해야 하거든. 마지막 생일이 될 테지만.”

    “100세 시대야. 영감님은 오래오래 사실걸? 그럼, 이하나는. 어떻게 할 건데. 로즈와는 달라. 이하나는 진짜 한국인이야.”

    그에 줄리오는 헤드레스트에 머릴 기대며 창문을 열었다. 그러곤 창밖으로 짧아진 담배를 툭 던졌다. 바닥에 부딪혀 튀어 오른 불티가 공기 중으로 흩어진다.

    “돌려보내야지. 한국으로.”

    ***

    허벅지를 움켜쥐는 느낌에 흠칫 놀라 눈을 떴다.

    몽롱하다. 진통제 때문인지, 이륙 직전까지 맞은 수액 때문인지. 제 몸이 제 몸 같지 않았다.

    허벅지를 움켜쥔 사람은 유은성이었다.

    “다쳤습니까?”

    그는 전혀 몰랐던 것처럼 당황한 표정이었다. 그에 하나는 귀찮음이 역력한 얼굴로 자세를 다시 잡았다.

    “조금요.”

    “조금이 아닌데요.”

    “그만 좀 주물러요. 아프니까.”

    하나는 다리를 털어 그의 손을 떼어 냈다. 하지만 유은성은 집요했다. 험악한 표정으로 벌떡 일어나더니, 다짜고짜 그녀가 입은 바지를 벗기려 들었다.

    “아이, 진짜! 유은성 씨!”

    “어떻게 된 겁니까. 나 없는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봐봐요, 빨리!”

    “괜찮다니까요? 줄리오가 치료해 줬어요.”

    “파렌티가요?”

    “네. 총알이 좀 스친 건데, 처치가 완벽해서 금방 나을 거예요.”

    하나는 대충 얼버무리며 뒤편 소파 자리에 앉은 줄리오를 돌아보았다. 그는 로마노와 얼굴 모를 남자 둘을 대동한 채 서류를 들여다보는 중이었다.

    그러다 불시에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부러 싱긋 웃으며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결국, 먼저 눈을 피한 건 줄리오였다. 그는 스카치를 한 모금 삼키며 들여다보던 서류로 시선을 내렸다.

    이상했다. 어쩐지 묘하게 줄리오 파렌티가 자신을 피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로건 발렌타인을 만나고 오는 길입니다. 듣기로, 발렌타인 데이가 강무진의 경호를 맡았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캄보디아에 있었던 거고요.”

    은성의 말에 하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틀었다.

    “그게 정말이에요?”

    “예. 그러니 이하나 씨, 오슬로가 강무진의 곁에 있을 겁니다. 행사장에서 오슬로를 찾아요. 그 곁에 있는 동양인 남자. 그 사람이 바로 강무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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