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 (20/180)

<20>

줄리오는 얼얼한 뺨을 만지작거리며 물 밖으로 걸어 나왔다. 물에 젖어 늘어진 머리카락이 눈썹뼈와 눈가를 가린다.

요 며칠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하지 않아서인지 몸이 무거웠다. 여자도 안지 않았고, 잠을 청하지도 못했다. 오래전 약을 썼던 때처럼, 이성이 날아가기 직전의 기분을 닮았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웃음이 났다. 그것도 실없는 헛웃음이.

이하나는 한 줌밖에 안 되는 손목과 발목을 가졌다. 가늘다 못해 힘주면 부러질 듯한 허리. 손바닥을 제외하곤 굳은살이 박인 곳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제가 아는 그 어떤 여자보다 강했다.

온몸이 분홍색인 주제에, 이하나는 왜 그렇게 단단할까.

글라스를 통과해 쏟아져 내린 볕이 기운다. 그는 시선을 찌르는 빛에 인상을 썼다.

지금껏 얻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취하고 가차 없이 버렸다.

단, 두 명만 제외하고.

한 명은 제 의지대로 취하지 않았다. 망가트리고 싶지 않았고, 새장에 가둬 놓은 새처럼 길들이고 싶었다. 그러나 길들여진 새는 다른 주인의 품으로 날아갔다.

반면, 이하나는…?

처음부터 지독하게 끌렸다. 자신을 죽이러 온 사신을 눈앞에 둔 것처럼 전신에 소름이 돋았고, 총구 너머의 눈빛에 심장이 격하게 뛰어댔다.

이하나는 갖고 싶어도 가질 수 없다. 저 여자는 자신의 컬렉션으로 남을 생각이 없는 복잡한 생명체였다.

그는 선베드 앞에 서서 젖어 묵직해진 바지를 벗었다. 그러곤 비치된 가운에 팔을 끼워 넣었다.

베드 위엔 쓰지 않은 콘돔과 젤이 뒹굴었고, 이하나가 마셨던 술잔엔 얼음이 녹아 물이 차 있었다.

그는 잔에 든 얼음과 물을 바닥에 쏟아 버린 뒤, 새 술을 따랐다. 술을 머금자 얼얼한 뺨 안쪽의 생채기가 느껴진다. 이번에도 상처가 늘었다.

키스할 때마다 상처가 늘어남에 피식거리던 그는 막판에 나타났던 유은성을 떠올리며, 굳은 표정으로 남은 스카치를 삼켰다.

“줄리오.”

더운 날씨에도 정장을 고수하는 로마노와 로렌조가 수영장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온다. 지금까지의 일을 모두 보았는지, 둘 다 마뜩잖은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한잔해.”

그들은 줄리오가 건넨 술병을 받아 들곤 각자 한 모금씩 마신 뒤 고갯짓을 했다. 밖으로 나가 확인할 것이 있다는 뜻.

“초대장이 도착했어. 그놈이야.”

***

“어째서 줄리오 파렌티를 초대하는 걸까요. 강무진이 주최하는 파티 맞아요?”

하나는 욕실 밖에 있는 유은성에게 소리쳤다.

은성은 반투명한 욕실 문 너머, 샤워 중인 그녀를 빤히 보며 작게 탄식했다.

“대외적으로 줄리오 파렌티는 teonimo의 대표잖습니까. 강무진은 무운해운의 대표 이사입니다. 지극히 합법적이고 잘나가는 회사를 운영하고 있죠. 그러니 둘은 어떻게 만나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하나는 생각에 빠졌는지 대답하지 않았다.

은성은 천천히 하나의 방을 둘러보았다. 짐이라고는 그녀가 메고 온 배낭뿐이다. 갈아입을 옷도 가져오지 않은 건지, 방 한쪽엔 여분의 속옷을 햇볕에 말리는 중이었고 찢어진 청바지가 옷걸이에 걸려 있었다.

하지만 지난번 보았던 플립폰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하나 본인이 갖고 있든, 저 가방 안에 있든 할 것이다.

검고 투박한 배낭을 싸늘한 눈빛으로 쳐다보던 그는 이하나가 샤워를 마치기 전, 조심스럽게 지퍼를 열었다.

배낭 안에는 노트와 태블릿, 노트북, 두 개의 탄창과 용도를 알 수 없는 아기 주먹만 한 기계가 들어 있었다. 그 외엔 충전기로 보이는 것 두 개가 전부였다. 그가 찾는 플립폰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은성은 다시 티 나지 않게 지퍼를 닫고 배낭을 원위치에 놓았다.

‘그거로 이두이의 위치를 알 수 있는 건가.’

최태준은 오두막에서 만난 이후 병가를 내고 두문불출 중이었다. 이두이가 살아 있다는 걸 알았으니 오금이 저릴 것이다. 아마 제가 사망 소식을 전해 주기 전까지는 식음을 전폐할지도.

최태준은 동남아시아를 방문한 한국계 재벌들에게 메싸 패거리를 소개하는 브로커 역할을 했다. 해외 마약 범죄 수사팀이 마약상 브로커일 거라고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위치와 권력을 이용한, 한마디로 쓰레기 새끼.

그렇게 한탕을 잡아 챙긴 돈은 모두 도박에 쏟아 부었다. 그렇게 3년을 해 먹었으니 내부에서도 최태준을 의심하기 시작했고, 그 조사를 맡은 게 이두이였다.

최태준의 파트너이자 정보부의 최정예 요원.

최태준이 징계를 받아야 한다는 것엔 이견이 없다. 나쁜 짓을 했으니 당연히 벌을 받아야지.

문제는 이두이의 조사 시점이었다. 이두이는 건드리지 말아야 할 상대를 조사하기 시작했고, 최태준의 목숨은 경각에 달렸다.

그에 최태준은 고민 없이 이두이를 버렸다. 이두이에게 범죄 혐의를 씌워 함정으로 몰았다.

하지만 이두이는 폭탄이 터지기 전, 증발했다.

‘대체 누가…?’

누군가 조력자가 있다. 그렇게 사라져 버린 이두이가 배 안에 있다는 것은 언더커버 수사를 시작했다는 뜻.

이하나는 이두이가 납치된 줄 알고 있지만, 이두이는 제 발로 적진에 숨어든 것이었다. 아무도 모르게. 배의 주인인 저조차도 속이고.

그런 이두이의 위치를, 이하나라면 찾을 수 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은성은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했다.

‘조력자는 누구였지.’

이두이를 찾지 못하면 그분이 위험해진다.

어두운 눈빛으로 배낭을 노려보던 은성은 문 열리는 소리에 싱긋 웃으며 돌아섰다. 그러자 가운 한 장만 걸치고 나온 이하나가 진지한 투로 말했다.

“저도 갈래요. 그 파티인지 뭔지.”

뜬금없긴.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바구니에 담긴 타월을 집어 들고 푹 젖은 머리를 덮어 헤집자, 인상 쓴 하나가 고개를 마구 젓는다.

“하지 마요. 나도 가고 싶다고요. 파렌티에게 말하면 될까요?”

“이하나 씨, 하나만 물읍시다. 그쪽 동생이 어디 있는지 알아요?”

“아마도요?”

“그럼, 그때 들여다보던 그 사진 말입니다. 이하나 씨 동생이 보낸 겁니까?”

그녀의 눈빛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 않은 채, 그의 손에서 타월을 빼앗아 들더니 몇 걸음 물러난다.

은성은 기가 막혀 헛웃음을 흘렸다. 줄리오 파렌티와의 거리보다 저와의 거리가 더 멀다는 것에 서서히 열이 받는다.

“유은성 씨, 띄엄띄엄 아는 주제에 너무 정확하게 꼬집으니까 이상한데요?”

“합리적 추론입니다. 이하나 씨보다 내가 현장 일을 더 오래 했을 텐데?”

“그렇게 똑똑하신 분이, 왜 내 보디가드 같은 걸 하지? 줄리오 파렌티가 타깃이에요?”

“마피아한테는 관심 없습니다. 당신이 걱정되는 거라고는 생각 안 하나? 딱 봐도 앞뒤 안 가리고 뛰어드는 것 같은데.”

“그러니까. 내가 뛰어들든 말든, 왜 걱정을 해요?”

“아, 내가 말 안 했습니까? 나, 이하나 씨한테 관심 있어요. 사적으로.”

“아아…. 몰랐어요.”

여자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당황조차 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제 말을 믿는 것 같지 않았다.

콘솔까지 물러난 그녀의 가운이 벌어지며 둥그스름한 선이 드러난다. 여전히 목 졸린 자국이 남아 있지만, 전체적으로 하얀 여자다.

은성은 풀장에 들어가자마자 보게 되었던 이하나와 줄리오 파렌티의 입맞춤을 떠올렸다.

기분이 참 더러웠던 그 순간을.

“이하나 씨, 혹시 그 마피아에게 관심 있습니까?”

은성의 뻔뻔한 말투에 하나는 코웃음 치며 잘 마른 속옷을 집어 들었다.

“아까 키스한 것 때문에 그러시나 본데…. 명치가 뜨거웠거든요. 줄리오 파렌티는 키스를 좋아해요. 인사 같은 건지, 날 시험하는 건지…. 어쨌든 키스를 할 때마다 자꾸 체한 느낌이 들어서 확인해 보려고 한 거예요. 궁금한 게 있어서.”

“좋아합니까?”

“저기요, 유은성 씨. 자꾸 급발진하지 마요. 브레이크 잡아 주는 거, 여기까지만 할 테니까.”

그녀의 경고에 기분이 더 나빠졌다. 급발진한 건 저쪽 아닌가?

“관심 없고 좋아하는 것도 아닌데, 키스라…. 성욕 처리가 필요한 거면 내가 상대해 줄게요. 더러운 마피아보다는 같은 용병이 낫지 않나?”

속옷을 탁탁 털던 하나의 손이 허공에서 우뚝 멎었다. 그녀의 시선은 창밖을 향해 있었다. 건너편 건물에서 걸어 나온 줄리오 파렌티가 동료들과 함께 다른 건물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우리라고 마피아랑 다를 거 있나요? 우리도 쏘고, 죽이고, 밟고, 빼앗고, 엿 먹이고…. 다를 거 없다고 보는데요.”

은성은 짜증스러운 마음에 그녀가 바라보고 있는 창문의 커튼을 닫아 버렸다. 커튼이 드리우는 소리가 날카롭다.

“아니, 다릅니다. 적어도 사람을 수집품 취급하진 않으니까. 파렌티는 딜레탕트예요. 질 낮은 가짜죠. 길들인 다음, 버릴 겁니다.”

“유은성 씨는 가만 보면 너무 많은 걸 알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럼, 강무진 얼굴도 알아요? 무운해운 대표 이사.”

은성은 묘하게 말린 기분을 느꼈다.

역시, 평범한 사람이 아니다. 이하나는….

“압니다.”

그래서 배팅을 했다.

“안다고요? 나한테 설명해 줄 수 있어요? 아니면… 동행해요. 그 파티, 우리도 가죠?”

이하나의 눈빛이 위험하게 반짝였다.

“내가 왜 그 위험하고 더러운 곳에 발을 들여야 하죠? 이하나 씨, 그 파티에 누가 오는지 압니까? 어쩌면 One에게 원한 가진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요.”

“원래 남 뒤통수를 칠 땐, 내 뒤통수 까일 것도 각오해야 하거든요. 난 각오했어요.”

“강무진 얼굴은 대외적으로 아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꽤 고급 정보가 될 텐데, 이하나 씨는 내게 뭘 해 줄 겁니까?”

제가 생각해도 유치한 질문이다.

실은 대가 따위 필요 없었다. 어차피 이하나에겐 가짜 강무진을 알려 줄 생각이었으니까. 저를 대신해 강무진 행세 중인.

“목숨 한번 살려 줄게요.”

뜻밖의 대답에 유은성의 눈빛이 짙어졌다. 그러자 은성이 걸터앉은 곳으로 저벅저벅 다가온 그녀가 그의 어깨 위에 양손을 올린다. 손가락 끝에 걸린 속옷이 남자의 드로어즈라는 것을 알아챈 건 그 후였다.

이하나는 마치 목덜미를 끌어안고 키스하려는 사람처럼 가까워졌다.

은성은 그녀의 양손이 제 어깨에 있다는 걸 알면서도 위협을 느꼈다.

이대로 꿰뚫려 죽을지도 모른다는 오싹한 공포와 함께, 하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 배낭, 한 번만 더 허락 없이 뒤지면…. 유은성 씨, 죽습니다.”

머리털이 쭈뼛 서고 절로 손이 움직였다. 하지만 그녀의 허리춤에 두르기 전, 은성의 눈앞에서 검은색 플립폰이 흔들린다.

이하나는 정확하게 그가 무엇을 찾는지 알고 있었다.

“이건 더더욱 손댈 생각 하지 마요. 난 유은성 씨, 못 믿거든요. 그러니까 강무진이 누군지, 나한테 알려 줄 거죠?”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