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 (19/180)
  • <19>

    “언제부터 거기에 있었어?”

    하나의 질문에 선베드 아래로 다리를 내린 그가 잔에 든 술을 한입에 삼켰다.

    “한 30분?”

    “30분씩이나? 기척 좀 내지 그랬어.”

    “이상하군. 소리가 꽤 컸을 텐데.”

    줄리오는 제 대각선에 앉은 여자를 돌아보곤 피식 웃었다. 그에 여자가 어색한 미소로 팔을 감싸며 그의 어깨에 입술을 누른다.

    하나는 황당한 마음에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두이에게서 메시지를 받은 날부터 마음이 급해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다. 이두이가 어떤 배에 갇혀 있는지 알 수 없어도, 누가 연루되어 있는지는 명확하게 증명된 셈이다.

    무운해운의 대표 이사인 강무진.

    이두이가 쫓던 남자를 찾는 것이 가장 빠르다는 걸 알아냈건만, 여자들과 붙어먹어야 한다는 이유로 줄리오 파렌티는 시간을 내주지 않았다.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노려보던 하나가 그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러곤 남자가 들고 있던 잔을 빼앗아 얼음을 한 움큼 집어넣었다. 스카치를 콸콸 따르자 그의 눈썹이 비스듬히 치솟는다.

    하나는 그대로 스카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뜨겁고도 차가운 알코올이 식도를 따갑게 만들었다. 인상을 팍 찌푸린 그녀는 잔을 돌려주며 입가를 닦았다.

    “으… 써. 풀 건 다 풀었어? 로렌조 말로는 그쪽이 만족할 때까지 이 짓거리가 계속될 거라고 하던데. 나, 더는 못 기다려.”

    그녀가 내민 잔을 받아 든 줄리오가 남은 술을 혀 위에 뚝뚝 떨어트렸다. 그러곤 입술을 핥더니 여자를 돌아본다.

    “Vattene via.”

    이탈리아어를 알아들은 여자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가운을 챙겨 일어났다. 속이 비치는 가운을 어깨에 걸치고는 모델 같은 걸음으로 하나를 스쳐 지나갔다.

    키와 체격, 머리카락 색부터 피부색까지 저와 비슷한 여자의 모습에 묘한 소름이 돋는다. 물론 줄리오 파렌티에게는 제가 아닌 다른 사람과 비슷한 여자겠지만,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이제야 대화할 생각이 생겼나 보지?”

    하나는 젖은 머릴 쓸어 넘기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턱을 괸 그가 탄력 있는 그녀의 허벅지로 손을 뻗었다.

    “상처가 많군.”

    “너희가 트레일러를 박아 버렸잖아. 너 때문이야.”

    “아아, 나 때문인가?”

    그는 최근에 생긴 상처를 엄지로 누르듯 느릿하게 문질렀다.

    줄리오의 손이 스치는 자리마다 힘이 들어간다. 근육이 경직되는 기분은 썩 좋지 않았다.

    “사칭범이 누군지 알아.”

    하나는 가슴 앞으로 팔짱을 끼곤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허벅지에 시선을 고정했던 줄리오가 고개를 든다. 그저 그런 갈색 눈동자인 줄 알았는데, 묘한 색이 깃든 것처럼 보였다.

    어쩌면 천장의 글라스에 투과된 빛을 받아 그렇게 보이는 걸지도.

    “궁금하지 않은데, 어쩌지?”

    아래로 향해 있던 그녀의 미간이 꿈틀댔다. 순간 열이 올라 주먹을 날릴 뻔한 것을 애써 참았다.

    “그거, 안타깝네. 되게 흥미로워할 줄 알았는데.”

    “알고 있거든. 누군지.”

    “뭐…?”

    “설마, 너도 아는 걸 내가 모르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해?”

    꽉 움켜쥔 주먹이 부들거리며 떨렸다. 이미 알고 있으면서, 제게는 한마디도 안 했다? 자신을 갖고 논다는 생각이 그녀를 분노하게 만들었다.

    하나는 떨리는 양손으로 천천히 얼굴을 쓸어내렸다.

    “하긴…. 대단한 마피아께서 손 놓고 있진 않았겠지.”

    “수영을 제법 하던데.”

    “말 돌리지 마. 왜 나한테 말 안 했어.”

    그녀의 눈빛이 서서히 차가워진다. 머릿속을 갉아먹는 감정은 분노라기엔 차갑고, 황당함이라기엔 날카로웠다.

    “내가 왜…. 어째서 너한테 보고 같은 걸 해야 하지?”

    술잔을 내려놓은 그가 몸을 일으켰다. 순식간에 시선의 방향이 바뀌는 것이 못 견디게 짜증 났다.

    “씨발, 내가 널 왜 믿는다고 했을까? 좆같네, 진짜.”

    진득한 분노는 한국어를 쏟아 내게 했다. 하나는 허리에 손을 얹은 채 천천히 물러섰다. 이 더러운 기분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멀어지고 싶었다.

    그러자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의 남자가 그만큼 거리를 좁힌다.

    하나는 피식 웃으며 계속 물러났다.

    “넌, 내가 죽여. 개새끼야….”

    못 알아듣는 꼴이 퍽 보기 좋다.

    “영어로 해.”

    “다 알면서 시간을 끌어? 나 엿 먹이려는 건가? 칼 박힌 복수라도 할 생각이었나 보지?”

    “parla inglese.”

    “싫은데? 내가 왜 영어로 해야 해? 너 같은 거한테. 너나 이탈리아어 하지 마.”

    “sembra eccitato.”

    “흥분은 네가 하고 있어, 내가 아니라.”

    풀 가장자리까지 물러선 그녀는 굳으려는 턱을 문지르며 천천히 눌러놓은 말을 꺼냈다.

    “만약 내 동생이… 널 사칭한 놈한테 화를 입는다면, 너부터 죽이고 그 자식도 죽일 거야. 내 동생은 너 때문에 이렇게 된 거거든. 네가 줄리오 파렌티라서.”

    찰나였지만, 그의 얼굴에 서늘한 냉기가 돌았다. 한국어를 알아들었다기보다는 말투로 내용을 짐작했을 것이다.

    발뒤꿈치에 닿는 물이 차갑다. 이제 한 걸음만 더 물러나면, 물이었다.

    “나랑 한판 할래?”

    하나의 질문에 줄리오의 시선이 물 쪽으로 향한다.

    “이제야 영어로 말하기로 한 건가?”

    “원래 욕은 못 알아듣는 말로 하는 게 최고거든. 할래, 말래.”

    싸늘하게 미소 지은 그가 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그것은 승낙의 대답 대신이었다.

    그러고 보니 여자랑 뒹군 남자치고 옷이 너무 단정하다. 드레스 셔츠의 단추 하나를 푼 걸 빼면, 비즈니스를 마치고 잠시 휴식 중인 모습이나 다름없었다.

    셔츠 단추를 모두 풀고 벨트에 손을 올린 순간, 하나는 몸을 슬쩍 틀면서 그를 물속으로 확 밀어 버렸다.

    “뻥이다, 이놈아.”

    손을 뻗는 것부터 욕설까지. 줄리오는 하나가 예상했던 대로 행동했다. 하지만 그녀가 잡히는 건 예상에 없던 시나리오였다.

    잡힌 머리카락 때문에 고개가 뒤로 확 젖혀졌다.

    “에이씨, 야!”

    줄리오 파렌티와 함께 투명한 젤리 같던 물속으로 풍덩 빠졌다. 잘게 만들어진 포말이 피부를 간질이며 빼곡하게 감싼다. 눈을 감지 않았더니 수면 위에 반사된 물그림자가 하얗게 일렁였다.

    이토록 무방비한 상태로 물에 빠져본 게 얼마 만인지.

    그녀에게 물은 항상 생존의 공간이었다. 손과 발이 묶인 채 물속으로 뛰어들거나, 던져졌다. 하지만 오늘은 좀 달랐다.

    가라앉던 그녀의 얼굴 앞에 남자가 불쑥 나타나더니 목덜미를 당겼다. 맞붙은 입술로 숨이 밀려온다. 그러다가 이내 혀가 침투해 숨을 앗아갔다.

    물속에서 엉겨 붙는 두 사람의 주위로 크고 작은 포말이 하얗게 일어났다. 물 밖에 있을 때보다 몸을 다루기가 쉽지 않다.

    물에 빠트린 건 그녀였지만, 휘두르는 건 그였다. 움직일 때마다 물이 입 속으로 들어왔다. 하나는 남자의 얼굴을 밀어내고 손을 깨물었다. 하지만 몸을 딱 붙인 그는 그녀의 전력을 비웃듯, 점점 더 바닥으로 밀어붙였다.

    그러다가 온몸의 힘이 풀릴 때쯤, 다시금 부드럽게 입술이 뭉개졌다. 입술 틈을 핥고 치열을 더듬듯 파고든 혀가 끈적하게 들러붙는다.

    잘 이해되지 않았다. 줄리오 파렌티가 저와 무얼 하고자 하는 건지. 어째서 제게 키스하는 건지. 누군가를 닮은 여자들을 끊임없이 취하는 것은 미련인지, 분풀이일지….

    산소를 아끼기 위해 부러 몸에 힘을 빼고 숨을 흘렸다. 제 코와 입을 틀어막는 비정상적인 키스 때문에, 빌어먹을 마피아 새끼 때문에. 스르륵 눈을 감고 네 멋대로 해 보라며 힘을 풀었다.

    그냥, 모든 행위가 귀찮아졌다.

    그녀가 반항을 하지 않자, 물속에서 그의 눈이 점점 크게 뜨였다. 그러더니 소스라치게 놀라며 물 위로 고개를 빼냈다.

    “하나!”

    강한 악력에 저절로 입이 벌어진다. 물 밖으로 고개를 뺀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숨을 내쉬었다. 머리채를 잡힌 상태로 눈꺼풀을 들자, 어울리지 않게 창백한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헛웃음이 났다.

    숨을 쉬는 제 입술과 떨리는 눈꺼풀을 본 그 역시 어처구니없어하며 거칠어진 숨을 고른다.

    “왜, 죽은 줄 알았어? 나 죽으면 너 편한 거 아닌가? 왜 이렇게 당황해? 어울리지 않게.”

    머리채를 움켜쥔 남자의 악력이 강해진다.

    이래야 줄리오 파렌티 답지….

    “장난이 지나쳐.”

    “너, 나랑 뭐 하고 싶은 거야. 키스는 아무하고나 해? 머리만 검으면 그냥 흥분돼?”

    “입 다물어.”

    “나는 당신이 이해가 안 돼. 내가 아는 남자 중, 제일 이상해. 정신병원에 좀 가 봐. 자꾸 내가 그 여자로 보이는 거면.”

    “착각하는군. 너랑 그녀는… 달라.”

    조금 전까지만 해도 흔들리던 눈동자가 단번에 싸늘히 벼려졌다. 위험하게 올라간 입꼬리와 서늘해진 눈빛. 하나는 손을 뻗어 그의 뺨을 슬쩍 어루만졌다.

    이건, 애증인 것 같다. 이 남자는 그 여자를 사랑하기만 한 게 아니다.

    힘으로는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않을 자신이 있건만, 마음은 아니었다. 정이 많은 성격이라, 정 주지 않으려 노력했고 길에서 사는 동물들에게조차 쉽게 눈길 주지 않았다.

    그런데 이 남자는… 마치 주인에게 버려진 들개 같다. 세상 전부였던 주인에게 버려진 채 그리워하지만 증오하기도 하는.

    피식 새어 나온 실소에 그의 눈가가 가볍게 찌푸려진다. 하나는 한숨을 내쉬며 남자의 어깨를 밀어냈다.

    “하나 말해 주는데, 나는 대체 불가해. 세상에 나 같은 사람 한 명 더 있었다가는 여자 이미지 다 버릴걸.”

    그렇게 말하며 그의 품에서 멀어졌다. 남자의 시선이 느리게 움직여 돌아서는 그녀의 뒷모습을 좇는다. 하나는 몇 걸음 걷다 말고 다시 뒤를 보았다.

    가까워지는 남자의 젖은 얼굴은 지독하게 야했다. 아름답기도 했다. 눈썹뼈에 매달려있던 물방울이 뚝 떨어져 날렵한 뺨을 타고 흐른다.

    무언가를 시험해보고 싶었다.

    물에 빠지던 순간, 나는 왜 긴장을 풀었을까. 어째서 줄리오 파렌티가 키스할 거라는 것을 예상했을까.

    “이하….”

    남자의 입술이 움직인 순간, 대뜸 뺨을 때렸다. 짝 소리와 함께 그의 눈에 불꽃이 튀기 전, 목덜미를 당겼다.

    누군가에게 먼저 키스를 한 건 처음. 아니, 두 번째였다. 그 모두, 이 남자에게 했다는 게 문제였다.

    삼켜지는 듯한 키스였다. 질척한 혀가 비벼지며 일순간 산소를 다시 빼앗겼다. 허리를 감싼 손은 자연스럽게 척추를 어루만지며 올라와 가슴을 움켜쥐었다. 어깨끈이 흘러내리려는 찰나, 하나는 그의 뒷머릴 강하게 잡아챘다. 입술이 떼어지고 타액이 늘어진다. 두 눈을 내리뜬 남자가 탁하게 읊조렸다.

    “제멋대로군.”

    “이제 알았어?”

    “이하나.”

    “휘두르려 하지 마. 이후의 진도는 내가 결정해.”

    양손으로 허릴 잡은 그의 얼굴이 점점 풀어지더니, 큭큭대며 웃기 시작했다.

    특이한 웃음이었다. 잔인한 듯, 순수한 듯, 허탈한….

    하나는 제 입술을 손등으로 훔치곤 돌아섰다.

    풀 가장자리에 다다른 그녀의 눈앞에 누군가의 날렵한 구두코가 보인다. 고개를 들자 커다란 타월을 든 유은성이 서늘한 시선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유은성 씨.”

    말없이 한쪽 무릎을 꿇은 유은성이 손을 내민다. 하나는 남자의 바짓단이 젖어 가는 걸 보며 그 손을 잡았다.

    은성은 단번에 그녀를 끌어 올려 품 안으로 당겼다. 반동으로 인한 접촉이었지만, 묘하게 어깨를 감싸는 손길이 무겁다.

    “나 찾아다녔어요?”

    하나가 묻자 줄리오 파렌티를 응시하고 있던 은성이 싱긋 웃는다.

    “보고 싶어서요.”

    그때까지 줄리오는 그 자리에 서서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 어쩐지 나쁜 짓을 저지르는 기분이었지만, 타월로 어깨를 감싸는 유은성과 함께 걸음을 내디뎠다.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무운해운에서 줄리오 파렌티에게 초대장을 보냈어요. 알고 있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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