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 (15/180)
  • <15>

    줄리오의 지시가 떨어지자마자 쿡탑의 전원을 내린 셰프가 부하들과 함께 주방을 빠져나갔다.

    하나는 마지막으로 문을 닫고 나가는 로렌조를 응시하다, 다시 줄리오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남자는 즐거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고마워, 쪽수에서 밀리는 게 제일 무서웠는데.”

    하나는 생글생글 웃으며 접시에 올려진 나이프를 들었다. 그러곤 날카로운 나이프로 천천히 구운 생선을 썰었다. 한국이었으면 젓가락 하나로 끝날 생선 해체를 나이프로 하고 있다니.

    대수롭지 않은 듯 굴고 있지만, 모든 감각은 마주 앉은 남자에게 향해 있었다. 그의 음식에 나이프가 딸려 오지 않았다면 세 번째 부탁은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최대한 생선이 난도질 되지 않도록 조심했으나, 빌어먹을 가자미는 연하다 못해 크림처럼 물컹거렸다.

    이어, 의자 미는 소리를 내며 그가 일어났다. 하나는 긴장한 기색 없이 고개를 들어 남자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했다.

    “왜, 설마…. 또 섰어?”

    그러며 나이프로 그의 하반신을 가리켰다. 와인잔을 든 남자는 미소 띤 얼굴로 테이블을 빙 둘러 다가왔다.

    “널 보면 흥분되거든.”

    씨발. 그런 말은 진지하게 하지 말아줄래?

    하나는 눈살을 찌푸린 채 두툼하게 튀어나온 남자의 왼쪽 허벅지로 시선을 옮겼다.

    “변태 새끼.”

    그는 소리 내 웃으며 테이블에 기대섰다. 그러더니 머릴 쓰다듬으려는 사람처럼 손을 들었다.

    하나로 올려묶은 머리카락 끝을 만지작거리는 손길에 전신으로 긴장이 흐른다. 그녀는 나이프 쥔 손을 의식하지 않으려 애쓰며 줄기콩을 잘랐다.

    “그래서, 나한테 박고 싶어?”

    “그렇다면?”

    “싫은데?”

    “네가 결정할 사안이 아닐 거야.”

    “어째서?”

    “너는…. 내 집에 있거든.”

    “생색은. 좋아, 그럼. 입에 박을래? 허락해 줄게.”

    부러 혀를 내밀며 싱긋 웃자,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던 손이 단숨에 뒷머릴 잡아챈다. 두피가 당겨지는 끔찍한 통증과 함께 그녀의 고개가 뒤로 꺾였다.

    하나는 와중에도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지.’

    머리채를 잡은 그가 상체를 숙이더니, 입술이 닿을 듯한 거리에서 낮게 속삭였다.

    “나는 위험하고 버릇없는 짐승 새끼를 길들이는 걸 좋아해.”

    피부가 따끔거릴 만큼 뜨거운 아드레날린이 혈관을 가득 채운다. 하나는 두 눈을 내리떠 그의 콧날을 응시했다.

    “길들여지면, 가차 없이 죽여 버리고?”

    “그게 아니지. 길들여진 척하는 짐승 새끼를 죽이는 거야.”

    “아아, 그런 차이가 있구나. 근데… 나 머리 아픈데. 상처 있어, 거기. 네 부하가 후려치는 바람에 생긴. 설마 잊은 거야?”

    하나는 뒷머릴 잡은 그의 손등을 감싸 쥐었다. 손이 워낙 큰 탓에 머리통이 한 손에 잡힐 지경이었다.

    “그러니까, 놔 줄래? 부탁이야.”

    그녀의 머리채를 잡고 있던 그의 손에서 힘이 빠진다. 그녀가 안도한 순간, 이번엔 목울대를 움켜쥐었다.

    곧 앉은 의자가 뒤로 밀렸다. 턱하고 숨이 막히는 바람에 표정에서 여유가 사라졌다. 하나는 부러 힘을 뺀 상태로 그의 손목을 잡았다.

    “뭐 하는 거야. 난 예의 있고 위험하지 않은 사람 새낀데.”

    “게빈 스미스.”

    그에게서 누군가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어느 순간부턴가 남자의 얼굴에서도 미소가 지워진 걸 알았다.

    게빈 스미스?

    낯설지 않은 이름이지만, 단박에 떠오르는 건 없었다.

    “몰라, 누군지.”

    “그럴 리가.”

    서늘하게 읊조린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진짜 몰라. 그게 누군데.”

    하나는 점점 강하게 죄어 오는 손아귀 힘에 고개를 길게 뺐다. 처음으로, 남자에게서 살기를 느꼈다.

    “게빈 스미스의 영상이 네 짐에 들어 있더군. 네 동생이 폭탄 테러에 연루되었을 때, 다리를 절며 나온 전직 FBI.”

    “…뭐? 동영상을 봤어?”

    “질문에 대답부터. 정말 게빈 스미스를 모른다고?”

    “몰라! 누구야. 그 모자 쓴 남자가… FBI였다고?”

    “게빈 스미스는 FBI 내에서도 꽤 정예에 속했던 놈이야. 게다가 내게 원한이 있지. 그놈한테 속아서 레드마피아와 전쟁을 벌여 뉴욕이 초토화되기도 했어. 그놈의 목적은 내 목숨이거든. 근데 최근 FBI를 때려치우고 사라졌어. 그러곤 처음으로 네가 가져온 동영상에서 발견된 거야. 그것도 네 동생이랑 함께.”

    하나는 동영상 초반에 등장했던 남자를 기억해 냈다.

    다리를 절고, 모자를 눌러썼던. 그 남자를 따라 나온 두이의 몸에 폭탄 재킷이 걸쳐져 있었기에 상대를 적의 끄나풀 정도로 생각했다.

    그런데… 퇴직한 FBI라고? 아니, 퇴직한 건 확실해?

    마음이 급해진 그녀는 순간, 나이프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 새끼 뭔데…. 그 새끼가 왜, 내 동생을…!”

    “아니, 연기는 그만. 이하나, 넌 누구지?”

    “뭐?”

    “나는 적이 많아. 신조차도 나한텐 믿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야. 그런데 네 동생이 게빈 스미스와 엮였어. 날 죽이는 게 삶의 목표인 놈과. 그런데 나더러, 널 믿고 도와달라고? 게빈 스미스와 있을 네 동생을 찾아달라?”

    그의 얼굴에 미세한 금이 가기 시작했다.

    사나운 눈빛이 그녀에게로 쏟아진다. 여유 대신, 경멸과 증오. 분노와 살기가 숨 막히게 덮쳐왔다.

    하나는 고개를 저으며 소리쳤다.

    “두이는 이용당한 거야! 아니, 아니지. 만약 네가 말한 FBI와 손을 잡았다면, 두이가 그런 말을 할 리 없잖아!”

    “무슨 말.”

    “두이는…. 두이는 위험해 보였어. 확실하다고!”

    “재밌군.”

    “이거 놔.”

    마음이 급해진 그녀는 제 목을 움켜쥔 줄리오의 손목을 힘주어 잡았다.

    이제 장난은 끝이다. 더는 시간을 낭비할 수 없었다. 두이가 FBI와 엮인 거라면, 다른 루트를 선택해야 한다. 그의 손목을 움켜쥔 그녀의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도드라지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거 놓으라고!”

    악을 쓴 그녀는 순식간에 나이프를 쥔 손을 뻗었다. 주먹을 날리듯 그의 목 옆에서 멈추었다. 날카로운 나이프에 닿은 피부가 슬쩍 벌어지며 피가 맺힌다.

    줄리오는 피하지 않았다. 하나는 이를 갈며 재차 경고했다.

    “네가 동료를 가족이라 부르며 아끼는 것처럼. 어쩌면 그보다 더, 내 목숨보다 더! 나는 내 동생이 소중해. 그리고 믿어. 몸담은 조직을 배신한다고?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두이는 불가능해.”

    “그건 네 생각일 뿐이야.”

    “내 동생을 의심하는 것도 네 생각일 뿐이야!”

    “아니? 난 네 동생을 의심하는 게 아니지…. 나는 그를 모르니까. 단지 널, 의심하는 거야.”

    그는 진심이었다.

    아주 오랜만에 손이 떨렸다. 줄리오 파렌티의 눈동자에 온기는 없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목숨을 손끝에 두고 무게를 재는 중이었다.

    목을 꺾는 것이 빠를지, 칼을 꽂아 넣는 것이 빠를지. 둘 중 하나는 죽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 다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내가 믿어 달라고 빌어도, 넌 안 믿을 거잖아.”

    “이방인에 불과한 너를 왜 믿어야 하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위험한 불순물 따위를.”

    이방인이란 단어가 주는 낯섦은 생각보다 컸다. 목을 조르는 손아귀 힘이 점점 더 강해진다. 하나는 전의를 잃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난… FBI가 아니야.”

    목이 졸려 숨이 꽉 막힌 목소리로 말했다. 움직이는 그녀의 입술로 시선을 옮긴 그의 눈동자가 다시 올라왔다.

    지독하게 싸늘한 정적 속에서 숨만 몰아쉬는 하나의 눈동자가 처음으로 흔들렸다.

    “좋아, 말할게. 발렌타인 데이, One. 그쪽은 모를걸? 씨발, 내가 뭐라고…. 나도 내가 FBI 같은 거였으면 좋겠네. 나도 존나 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개새끼야.”

    “One….”

    읊조리는 남자의 목소리가 나직하다.

    점점 더 숨이 가빠지던 찰나, 의자가 뒤로 밀리는 것과 반대로 그녀의 몸이 반쯤 일으켜졌다. 힘으로는 이길 수 없는 상대다. 하나는 힘의 차이를 인정했다. 하지만 여기서 남자의 목을 찌르면, 그 이후는 불 보듯 뻔한 일이다.

    “더 재밌네, 너.”

    혼잣말을 중얼거린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닿았다. 남자는 파랗게 질린 그녀의 얼굴을 똑똑히 내려다보며, 입술을 물었다. 그는 하나가 로렌조에게 했던 방식을 그대로 썼다. 목을 조른 채 숨이 넘어갈 듯 말 듯 한 상태를 유지하며, 손안에서 갖고 놀았다.

    이어 윗입술을 이로 물고 빨아들이더니, 혀로 핥으며 서늘하게 웃는다.

    “찔러. 그대로 꽂아 넣는 편이 좋을 거야. 네게 나쁜 흥미가 생겼거든.”

    흐른 피가 떨어져 그의 셔츠 깃을 물들인다. 몇 방울은 나이프를 타고 그녀의 손바닥을 적셨다.

    비릿하고 끈적한, 뜨거우면서도 붉은 피였다. 제 몸에 흐르는 것과 같은.

    숨이 조금 더 잘게 쉬어진다는 느낌과 함께 그의 입술이 완벽히 겹쳐졌다. 입술 안쪽 부드러운 살을 훑으며 파고든 혀가 점막을 헤집는다. 사막의 모래폭풍처럼 거칠고 과격한 키스였다.

    별다른 전조 같은 건 없었다. 그녀는 뒤로 넘어지지 않도록 몸에 힘을 주었다. 한 손으로 그의 손목을 잡고, 여전히 다른 손으론 나이프를 움켜쥔 채였다.

    눈과 비, 바람과 벼락을 동시에 맞은 것처럼 머릿속이 하얘졌다.

    숨겨 둔 사탕이라도 찾는 듯 입 안을 헤집는 키스 때문에 판단력이 자꾸만 흐려진다. 이가 부딪쳐 딱딱한 소릴 냈고, 비릿한 피맛이 느껴졌다. 그의 손이 셔츠를 당겨 단추를 뜯어낸 순간, 하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넌… 개야. 아니? 개란 수식어도 아까워.”

    입술을 빨리며 내뱉은 말에, 그녀와 눈을 맞춘 남자의 숨이 짧게 멎었다.

    하나는 천천히 손을 뗐다. 정확하게는 그의 어깨에 꽂아 넣은 나이프에서.

    “하아, 하아….”

    가쁜 숨을 몰아쉬며 제 목을 조르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의자가 뒤로 밀린 탓에 스텝이 엉켰지만, 볼썽사납게 넘어지는 대신 테이블을 잡으며 일어섰다.

    줄리오는 여전히 테이블에 반쯤 걸터앉은 상태로 물러나는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열기에 취해 있던 눈빛이 서서히 냉각된다.

    이 남자는 미쳤다.

    ‘미치지 않고서야….’

    어깨에 디너 나이프를 꽂은 채, 피가 묻은 자신의 입술을 손등으로 문지른다. 저 피가 누구의 피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지금 둘의 관계에 무언가가 끼어들었다는 것. 관계의 형태가 바뀌었다는 것이다.

    하나는 줄리오 파렌티의 광기에 헛웃음을 흘렸다.

    “그 칼, 목에 박아 넣지 않은 걸 감사해야 할 거야. 난 내 동생 이름 갖고 장난 안 쳐. 믿든 말든, 그쪽 자유지만…. 나는 당신을 죽이러 온 사신이 아니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