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 (14/180)

<14>

“매너라니. 정부를 정부라고 부르지 않으면 뭐라고 해.”

“정부 아니었어. 그냥… 동료지.”

“동료? 말하는 걸 들어보면 그냥 동료는 아니던데. 무슨 플라토닉한 섹파 같은 거였나?”

가볍게 비꼰 말에 로렌조의 표정이 바뀌었다.

“배가 고프다는 건 거짓말이었군.”

벌떡 일어난 남자가 그녀의 앞에 놓인 접시를 치우려 했다.

하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접시를 사수했다.

“에이, 그래도 이건 아니지. 내가 미안해. 실언이야. 그래, 동료. 동료한테 애틋할 수 있지. 그럼 그럼.”

로렌조는 이하나의 뻔뻔함에 혀를 내두르며 다시 털썩 앉았다. 그러곤 열심히 스푼과 포크를 움직이는 그녀를 훑었다.

“줄리오의 심기를 너무 건드리지 마. 지금은 널 봐 주고 있는 것뿐이야.”

“그렇겠지. 나도 알아. 봐 주고 있는 거. 근데, 왜 이렇게 맛있어?”

하나는 생긋 웃으며 화제를 바꾸었다.

유은성의 말과 달리, 검은 머리카락의 여자는 줄리오 파렌티 뿐 아니라 이들 모두에게 영향을 끼쳤던 존재였다.

그런데도 이 남자들을 배신하고 레드마피아의 손을 잡은 건가?

진짜 대단한 여자네.

“네 동생을 찾는다고 했나?”

하나는 음식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부드러웠던 오믈렛이 순간 고무 덩어리가 된 것처럼 명치를 꽉 채웠다.

“응. 혹시, 아는 거 있어?”

“아는 거 있지. 파렌티는 절대 납치 같은 거 안 해. 그런 귀찮은 일을 할 바엔 그냥 죽이고 말지.”

“그럼, 사칭한 놈들 잡을 생각은 없대?”

“그런 놈들이 한둘인 줄 알아?”

“많아…?”

“발에 챌 만큼.”

벌떡 일어난 하나는 냉장고를 열어 물을 꺼냈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움직이지 않을 거란 건 예상했다. 게다가 임무 도중 사망할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줄리오 파렌티의 도움이 절실했다.

지금 그녀가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유일한 남자.

이두이가 조직을 배신했단 증거가 나온 이상, 반박 증거 없이는 IDC:A를 움직일 수 없다. 설령 움직인다 해도 그들은 군대를 동원할 힘이 없었다.

적과 아군, 납치의 이유가 명확하다면 쉬었을 텐데….

하나는 벌컥벌컥 물을 들이켜며 뜨거운 속을 달랬다.

두이만 찾을 수 있다면. 이두이를 무사히 한국으로 데려갈 수만 있다면, 죽은 듯이 살아갈 생각이었다.

귀와 입을 닫고 눈을 감은 채. 조용히.

그녀는 발렌타인 데이의 첩보원 노릇을 하며 지나치게 많은 적을 만들어 냈다.

지금도 몇몇은 발렌타인 데이의 One을 찾으려 혈안이 되어 헤맨다고 한다. 그때는 겁이 없었고, 죽을 때까지 발렌타인 데이의 One으로 살아갈 줄 알았다.

어쩌면 뼈를 묻을 각오를 하고 로건의 손을 잡았던 걸지도 모른다. 당시의 제게 약점 따윈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러던 어느 날, 저로 인해 수감된 범죄자를 다시 만난 적이 있었다. 수감되어 있던 7개월간, 그의 가족들이 적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했다. 그러므로 너에게도 똑같은 고통을 맛보게 해 주겠다고.

처음엔 코웃음을 쳤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더 큰 불안에 휩싸였다. 매일 두이의 안전을 확인했고 악몽을 꾸었다.

그러다가 발렌타인 데이로 다시 의뢰가 들어왔다. 의뢰의 내용은 ‘그’를 죽이는 것.

룰에 어긋난 의뢰였다. 발렌타인 데이는 킬러 집단이 아니었으므로 의뢰는 당연히 거절되었다.

그러고 얼마 뒤, 그놈이 죽었다는 사실을 들었다. 보복 범죄에 휘말려 사지가 절단당한 채 강가에 버려졌다는.

하나는 그 길로 발렌타인 데이에서 나왔다. 누군가의 죽음을 애도한 적은 있지만, 환희를 느껴 본 것은 처음이었다.

인간 존엄성이 무너지는 끔찍한 경험이자, 다시는 느끼고 싶지 않은 환멸의 순간이었다.

“잘 먹었어.”

로렌조는 반도 먹지 않고 남긴 음식과 하나를 번갈아 보며 인상 썼다. 그러다 이내 무거운 몸을 일으켜 그녀의 뒤를 따랐다.

얌전히 2층으로 올라가 방으로 들어서는 것까지 확인한 로렌조가 담배를 꺼내 물 때였다.

“사이 좋은데?”

소리 없이 복도 창가에 서 있던 줄리오가 라이터를 만지작거리며 다가왔다. 그러곤 로렌조의 담배에 불을 붙여준다.

“이 시간에 데이트라도 한 건가?”

“저 여자는 날 죽이려 했다고. 사이가 좋을 리 없잖아. 젠장.”

“여자 꼬실 줄도 알고, 로렌조.”

“내 취향은 금발이야! 저런 말라깽이가 아니라고.”

줄리오는 길길이 날뛰는 로렌조를 뒤로하고 벽에 기댔다. 그러곤 하나가 있는 방문을 노려보았다. 그런 줄리오의 눈치를 보던 로렌조가 물었다.

“나 정말 궁금해서 그러는데…. 설마, 저 여자가 마음에 들어서 살려 두는 거야?”

“글쎄.”

“아니라고 해, 제발.”

“왜지?”

“저 여자…. 위험해 보여. 아니, 위험해. FBI일지도 몰라.”

“그럴싸하군.”

“저 여자를 믿는 거 아니지?”

믿음이란 단어에 그의 입꼬리에 가벼운 경련이 인다. 로렌조는 누군가 목을 조르는 듯한 위압감을 느꼈다. 말없이 방문을 노려보던 줄리오가 담배에 불을 붙이며 방향을 틀었다.

“잘 감시해. 정체가 확실해지면, 그때 죽여도 되니까. 지금은… 적당히 즐겨.”

***

이른 새벽, 문 여는 소리에 눈이 뜨였다.

“갈아입어.”

불시에 등장한 줄리오 파렌티는 온통 검정 일색이었다. 마치 장례식이라도 가는 듯한 차림에 하나는 뻑뻑한 눈을 비볐다.

“이 셔츠, 마음에 드는데. 꼭 갈아입어야 해?”

“그 꼴을 하고 갈 수 있는 자리가 아니야.”

“장례식이라도 치러?”

“그래.”

“누구?”

그는 대답 대신 손에 든 옷걸이를 흔들어 보였다. 더 이상 묻지 말고 갈아입으라는 뜻. 하나는 그가 이곳에 온 이유를 떠올리며 말했다.

“인간적이네. 동료의 장례도 치러 주고.”

“부러우면, 너도 내 동료가 되든가. 그럼, 죽은 뒤에 장례 정도는 치러 줄 테니까.”

“아니야. 난 제삿밥 얻어먹어야 해서. 이왕이면 한국에서 죽을게.”

옷걸이를 낚아챈 하나는 부러 생긋 웃으며 욕실로 들어섰다.

어둠 때문에 줄리오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웃고 있지 않았다. 어쩐지 어제와는 분위기가 묘하게 다르다.

누군가의 죽음 때문일까? 하지만 그는 늘 죽음에 가까운 남자였다. 어쩌면 죽음 그 자체나 다름없는.

‘바지네?’

그가 준비한 건 셔츠와 같은 브랜드의 정장이었다. 바지와 셔츠. 그리고 재킷으로 구성된 정장은 그녀의 몸에 딱 맞았다.

하나는 칫솔을 입에 문 채 남자가 가져온 옷을 노려보았다.

‘잘 감시해. 정체가 확실해지면, 그때 죽여도 되니까. 지금은… 적당히 즐겨.’

분명 다 들린다는 걸 알고도 그렇게 말했겠지.

하나는 거품을 뱉고 물로 입을 헹궜다. 그러곤 반창고가 덧대어진 이마를 피해 조심조심 세수했다.

죽일 생각이라면, 왜 치료해 주고 지랄이야? 차라리 그냥 두지.

정말이지, 거지 같은 취향이다.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왔을 때, 줄리오는 창밖을 보고 있었다. 밖에는 파렌티 패밀리들이 장례를 준비하는 중이었다. 도착한 운구 차량에 관을 싣고, 손에는 꽃을 한 송이씩 든 채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남자의 옆얼굴에 새벽빛이 닿는다. 답지 않게 진지하고 슬픔에 매몰된 듯한, 조금은 인간적인 느낌이 들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게.”

“한국어인가?”

“어. 장례식장에서 쓰는 말이야. 죽음에서 해방되어, 행복해지라는 의미.”

“해방이라…. 좋군.”

검은 장갑을 낀 그를 따라 1층으로 내려갔다.

이틀 만에 바깥 공기를 쐬어서인지, 장례식임에도 불구하고 묘한 해방감이 느껴졌다.

하나는 그들만의 장례를 지켜보았다. 타국에서 목숨을 잃은 동료를 위해 꽃을 바치는 모습이 언뜻 경건하기까지 하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선악의 구분이 무의미했다. 그녀는 꽃을 바치는 대신 멀찍이 서 있었다. 훌쩍거리는 놈들이 있는가 하면, 유독 가까웠는지 관을 끌어안고 오열하는 놈들도 있었다.

자유는 짧았다.

장례를 마친 뒤, 하나는 다시 건물로 돌아가야 했다. 동료의 죽음을 인정한 날이어서인지 오늘따라 대하는 손길이 거칠다.

그녀는 제 팔을 무식하게 당기는 이들을 노려본 후 줄리오와 식탁에 마주 앉았다. 그는 어느새 재킷을 벗고 넥타이까지 푼 채였다. 헤어스타일은 정돈된 그대로였지만, 묘하게 피로감이 느껴지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제 대화를 마무리하지.”

어제의 대화란, 이 새끼가 수면제를 먹이는 바람에 중단된 얘기였다.

하나는 조금 전의 장례식을 떠올리며 최대한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가장 겁내는 건, 지금 이대로 줄리오 파렌티가 자신의 일에 흥미를 잃는 것이었다.

“물어봐. 날 의심하고 있다는 거 알아. 그러니까 질문은 그쪽이 해. 난 대답할 테니.”

주방에선 진짜 셰프로 보이는 여자가 음식을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주위를 둘러싼 줄리오의 부하들이 셰프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중.

이들은 아무도 믿지 않는다. 신과 가족밖에는.

하나는 자신을 바라보는 줄리오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의 길게 뻗은 눈매가 가늘어지는가 싶더니 입꼬리가 기운다.

“아니, 반대로 하지. 나한테 원하는 게 뭐야.”

음식이 서빙되었지만, 그녀의 몫은 없었다. 하나는 재밌다는 듯 입술을 당겨 웃었다.

“나, 그쪽한테 원하는 거 엄청 많아.”

“추려 봐. 한 세 가지 정도로.”

“말하면, 다 들어주긴 할 건가?”

“글쎄. 내용에 따라 다르겠지.”

“첫째, 두이를 찾게 도와줘. 둘째, 두이를 그렇게 만든 놈들이 누군지 알아낼 수 있게 해 줘. 셋째, 그거… 혼자 먹을 거야?”

기다렸다는 듯 쏟아 낸 그녀는 노릇하게 구운 흰살생선을 가리켰다. 그에 막 나이프를 든 그가 의자 등받이에 기대더니 큭큭 웃었다.

하나는 입가를 문지르는 줄리오를 보며 허릴 꼿꼿하게 세웠다. 이번엔 그가 답할 차례였다. 제안에 대한 답이 무엇일지, 어떠한 대가를 말할지. 기다림이 길어지자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한참을 웃던 그가 그녀의 앞으로 접시를 밀었다. 그러곤 본인의 잔에 와인을 따르며 명령했다.

“다 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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