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 (13/180)

<13>

셔츠는 지금껏 접해 본 어떤 원단보다 부드러웠다. 그 감촉이 신기해 만지작거리는 그녀의 뒤로 줄리오가 다가왔다.

결국, 브리오니 매장은 찾지 못한 건지 치노 팬츠에 셔츠를 걸친 남자. 그는 마피아가 아닌 휴양 온 사업가처럼 보였다.

와인 한 병과 잔 두 개를 내려놓은 줄리오가 그녀의 맞은편에 앉는다. 하나는 얌전히 질문을 기다렸다.

찰나 깊고 어두운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하던 그가 와인을 따르며 물었다.

“치료는 필요 없나?”

제게 와인을 권하면 어떻게 거절할지 고민하던 그녀는 의외의 질문에 코웃음 쳤다.

“치료가 왜 필요 없겠어. 의사가 있으면 불러 줘. 항생제라도 먹어야겠으니까.”

“글쎄. 네가 의사 목을 조르진 않을까 걱정인데.”

“나 살리려는 사람 목은 안 졸라.”

와인을 한 모금 삼킨 그가 주머니에서 캡슐에 든 약을 꺼내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설마, 의사가 없는 걸까?

그가 내민 것은 얼핏 보아 비상용 항생제였다. 하나는 약을 받아 최소한의 와인과 함께 삼켰다. 병째 입에 댄 와인의 독한 향이 뇌 속까지 지끈대며 번진다.

생각했던 것보다 몸의 부상이 심했다. 애써 태연히 와인병을 내려놓곤 퉁퉁 부은 이마를 타월로 눌렀다.

그러자 다시 벌어진 상처에서 피가 배어 나온다.

“아까 하던 얘기, 마저 해. 내 동생 이름은 이두이. 줄리오 파렌티의 물건에 손을 댔다가 동료에게 발각되었어. 다시 줄리오 파렌티와 접선한 날, 사망. 어떻게 생각해. 정말 그쪽 짓 아니야?”

줄리오의 눈동자가 하나의 이마에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았다.

“처음 들어 보는 이름이야. 게다가 시칠리아에서 여기까지 얼마나 걸리는지 알아?”

“그럼, 그 코카인은. 네 물건이었잖아.”

“내 물건이지만, 그건 의료용 코카인이지. 국가 외엔 거래하지 않아.”

하나는 피 묻은 타월을 움켜쥔 채 숨을 들이켰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게다가 그녀도 이번 일에 줄리오 파렌티가 끼어 있지 않다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러나 하나는 이 남자가 자신을 대신해 범인을 찾게 해야 했다.

단순한 답을 내렸건만, 숨이 차오르며 가슴이 답답해진다. 두이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정말 없는 걸까?

하나는 눈물이 날 것 같아 눈을 질끈 감았다.

“네 남동생이 살아 있다면, 그건 쓸모가 있어서겠지. 만약 메싸 같은 놈들에게 인신매매를 당한 거라면 지금쯤 남창이 되었을지도. 아, 정보부 요원이라고 했나? 그럼… 약부터 맞았겠군.”

“그 입, 닥쳐.”

움켜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가능성을 말하는 저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 총구를 박아 넣는다면, 좀 닥쳐주려나?

“그런데 왜 찾으려는 거지? 네 동생이 원해서 잠적한 걸지도 모르잖아.”

“만약 그랬다면 정상적인 루트로 연락했겠지. 못 믿겠으면, 그쪽이 가져간 내 짐. 돌려줘.”

“그건 곤란해. 아직 너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없거든. 나한테 아주 괜찮은 정보원이 있는데…. 신기하리만큼 네 정보는 찾지를 못해. 너, 대체 누구야.”

하나는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으쓱 올렸다.

“정보가 왜 없겠어. 알 거 없으니까 없지. 나는 평범한 코리안이야. 특수 부대 전역한 거 말고는 특별한 거 없어. 아무것도.”

이상하다. 왜 이렇게 졸리지?

그녀는 점점 감기는 눈에 힘을 주었다.

항생제 따위가 이렇게 급성 졸음을 유발하나?

“졸려?”

“…무슨 짓을 한 거야.”

“졸리면 자. 버티지 말고.”

하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줄리오를 노려보다, 조금 전 제가 먹었던 약의 캡슐을 집어 들었다.

뒷면에 써진 이탈리아어가 꼬부랑 글씨처럼 뒤엉킨다.

이 남자가 자신을 해치지 않을 거란 확신이 화를 부른 모양이다.

“수면제 먹여서 뭐하게. 장기라도 팔아넘기게?”

그녀의 비아냥에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다가왔다. 그러곤 테이블에 걸터앉으며 기울어지는 턱을 잡아 든다.

하나는 눈이 돌아가는 기분을 느끼며, 어떻게든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고개가 훅 꺾이더니 아래를 향해 툭 떨어졌다.

테이블에 이마를 부딪치기 전, 남자의 커다란 손이 이마를 받치는 느낌이 들었다.

“지랄….”

멍하니 남자의 손가락 틈을 응시하던 그녀의 눈시울이 젖는다. 눈물을 떨어트리는 순간, 세상이 암전되었다.

“로마노.”

줄리오는 그녀의 이마를 받친 채 로마노를 불렀다. 문 앞에서 대기 중이던 로마노가 들어오다 말고 표정을 굳혔다.

“의사 불러.”

잠든 여자를 내려다보는 줄리오의 눈동자가 날카로웠다.

“줄리오, 이 여자는….”

“의사, 부르라고 했을 텐데.”

줄리오의 눈썹이 비스듬히 치켜세워진다. 그 서늘한 기색에 로마노는 고개를 끄덕였다.

“30분 안에 도착해.”

로마노가 나간 뒤, 줄리오는 그녀를 안아 침대에 눕혔다. 커다란 드레스 셔츠의 단추를 풀자 드러난 흉터들. 깊은 상처부터 자잘한 상처까지, 온몸이 만신창이였다.

그는 침대 맡에 서서 기절하듯 잠든 그녀를 오래도록 응시했다.

밤을 닮은 머리카락과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동자. 흰 피부와 마른 몸이 누군가와 정확하게 겹쳐졌다.

하지만 색깔만 같을 뿐, 온도는 전혀 달랐다.

이 여자는 마치 화염을 삼킨 것처럼 뜨거웠다.

이대로 한입에 삼키면…. 과연, 누가 죽게 될까. 삼킨 자일까, 삼켜진 자일까.

정확히 30분 뒤, 현지 병원 의사가 도착했다. 나이 지긋한 의사는 잠든 하나를 보곤 겁에 질린 표정을 지었다.

아마 여자의 몸에 난 상처를 눈앞의 마피아가 만든 거라 생각한 게 분명했다.

줄리오는 다시 의자로 돌아가 와인을 따르며 고개를 까딱였다.

“치료 시작하지. 한 군데도 빠짐없이, 고쳐놔.”

***

잠에서 깬 하나는 멍하니 제 팔에 꽂힌 주삿바늘을 응시했다. 영양제를 탄 생리식염수가 정맥을 통해 들어가고 있었다.

게다가 몸 곳곳엔 붕대가 감겨 있었는데, 전문가의 솜씨가 느껴졌다.

‘의사가 왔다 간 건가?’

지끈거리던 두통이 사라졌고, 무거웠던 몸도 가벼워졌다. 아마도 진통제가 투여되었을 터. 전신에서 느껴지던 근육통이 사라진 것만으로도 새로 태어난 것처럼 개운했다.

하나는 약이 다 들어가길 기다리기로 했다. 이런 호사는 아무 때나 누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게다가 지금은 늦은 밤. 보초를 서는 이들을 제외하곤 모두 다 잠든 시각이다.

그녀는 한숨을 깊게 내쉬며 어둠에 익숙해지기를 기다렸다. 어느덧 사물의 형체가 선명해지는가 싶더니, 낮까지만 해도 의자에 걸어 놓았던 자신의 옷이 사라진 게 보였다.

그에 헛웃음이 났다.

옷을 돌려주면, 날개 달고 하늘로 날아가기라도 할까 봐?

줄리오 파렌티는 이상한 남자다.

수면제를 먹인 이유는 여전히 납득할 수 없지만, 제정신으로 이렇게 오래 쉬려고 하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이상하다. 왜 다를까. 뭐가 바뀐 거지?’

어느덧 약이 모두 들어간 느낌이 났다. 하나는 나이트 테이블에 놓인 소독솜으로 바늘이 꽂혔던 부위를 지혈했다. 그러곤 능숙하게 라인을 제거한 뒤 침대에서 내려왔다.

발이 땅에 닿는 순간 어지럼증이 일었지만, 잠시뿐이었다. 일단 허기를 채우고 줄리오 파렌티를 설득할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방문을 열자 앞을 지키던 덩치가 흠칫 놀라며 물러나는 게 보였다. 그는 로렌조. 제게 호되게 당했던 남자로, 이마에 큰 반창고를 붙이고 있었다.

부리부리한 눈에 힘을 준 로렌조가 으드득 이를 간다.

“미안.”

하나는 부러 선수 쳤다.

뒤통수를 후려친 것에 대한 대가로, 로렌조는 목숨을 잃을뻔했다. 정말로 숨이 꼴깍 넘어가기 직전까지 몰아붙였으니 자신이 곱게 보이진 않을 것이다.

“진짜 미안. 그러게 왜 내 뒤통수를 쳤어. 나, 피 엄청났다?”

그녀가 자신의 뒤통수를 가리키며 슬쩍 발을 내딛자, 헛바람을 들이켠 로렌조가 목에 힘을 준다.

“이상한 짓 하지 말고 방으로 돌아가지그래.”

“이상한 짓 안 해. 그냥, 목이 말라. 마실 게 필요해.”

“그럼 방에 있어. 가져다줄 테니까.”

“좀 답답한데…. 나, 진짜 아무 짓도 안 할 테니까 산책 좀 하면 안 될까?”

“안 돼.”

“에이, 단호박처럼 그러지 말고. 같이 갈래?”

단호박이란 한국식 표현보단 같이 가자는 말이 더 충격적이었는지, 로렌조가 출렁거리는 턱살이 흔들리도록 고개를 저었다.

하나는 겁먹은 로렌조의 팔을 불쑥 잡았다.

“아악!”

그러자 비명까지 내지른 그가 벌벌 떨며 손을 뿌리친다.

그에 제대로 트라우마를 심어준 것 같아 묘한 죄책감이 들었다.

“나 배도 고파 죽겠어. 인질처럼 굴 테니까, 먹을 것 좀 어떻게 안 될까?”

하나는 배를 쓰다듬으며 눈썹을 축 늘어트렸다. 겁에 질린 상대에게 공포를 심어 줄 필요는 없다.

되레 다정하고 친절한 모습을 보여 줄수록, 상대가 자신을 더욱 잘 따르게 된다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

“못 참아?”

“오늘 진짜 한 끼도 못 먹었어. 영양제 맞은 게 다야.”

“…대충 먹어야 할 거야. 그래도 괜찮아?”

로렌조의 말에 하나는 격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성큼 밖으로 나와 로렌조의 옆에 섰다.

로렌조는 맨발에 셔츠차림인 그녀를 흘끔 보며 창백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넌 대체 뭐야? 킬러야? 북한?”

“킬러 아니고, 북한 사람도 아니야. 남한, 특수 부대 출신이고, 지금은 백수.”

“아… 백수. 뭔지 알아. 세이한테 배웠어.”

“세이?”

“있어, 너랑… 닮은 애.”

로렌조는 여전히 움찔움찔 놀랐지만, 제법 담담히 그녀의 질문에 대답했다.

하나는 로렌조와 함께 1층 식당으로 향했다. 로렌조는 그녀를 창가 자리에 앉히곤 직접 조리대 앞에 섰다. 냉장고에서 재료 몇 개를 꺼내 뚝딱뚝딱 음식을 만들어 내는 의외의 모습에 하나는 실소했다.

혹시, 마피아 간부가 아니라 조리장 아닐까?

뭔가 자료 조사가 잘못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먹어.”

로렌조는 금세 요리를 완성해 가져왔다. 그녀는 접시에 담긴 오믈렛을 보며 군침을 꼴깍 삼켰다.

“너, 셰프였어?”

“취미야. 안 먹어?”

“아니, 먹어. 고마워.”

만약 이번에도 수면제가 들어 있다면 다음번 눈 떴을 땐, 다 죽여버릴 거야.

하나는 속으로 그렇게 다짐하며 포크를 이용해 오믈렛을 반으로 갈랐다. 보들보들한 오믈렛이 벌어지며 따끈한 김이 피어오른다.

이건, 눈으로만 봐도 맛있었다. 맛이 없을 수 없는 비주얼. 뜨거운 김을 호호 분 그녀가 입맛을 다시며 말문을 열었다.

“근데, 세이라는 사람 말이야. 그 사람이야? 줄리오 파렌티의 정부였다던.”

하나는 오믈렛을 크게 떠 입에 넣었다. 부드러운 달걀이 입 안에서 사르르 녹는다. 매콤한 맛이 나는 소스 또한 일품이었다.

반면, 로렌조의 표정은 상한 음식을 앞에 둔 사람처럼 썩어 있었다.

“어이, 여자. 부탁인데, 줄리오 앞에서는 절대 그 이름 꺼내지 마. 정부란 단어도 안돼. 매너를 지켜, 시뇨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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