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 (10/180)

<10>

그녀는 줄리오 파렌티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아예 머릿속에 새기기로 작정한 뒤부턴 하루에도 몇 번씩 들여다보던 줄리오 파렌티의 사진을 제일 먼저 기기에서 삭제했다. 그러곤 안전 가옥에 남아 있는 흔적들을 지우기 시작했다. 유은성은 그런 하나를 신기한 표정으로 관찰했다.

유은성이 보내는 종류의 시선은 그녀에게 딱히 새롭지 않았다. ‘뭐 이런 여자가 다 있어?’라든가 ‘이런 여자는 처음이야.’ 같은 시선은 질리도록 받아왔다.

그래서 방탄조끼를 입고 탄창을 챙기면서도 유은성을 의식하지 않았다.

“다들 입을 모아 이하나 씨는 위험한 사람이라고 하던데….”

글록에 장전된 탄환을 확인한 그녀가 총열을 점검한 뒤, 피식 웃었다.

“그런 말을 한 놈들은 안 위험한 놈들이었어요?”

“적어도 이하나 씨보단 덜 위험해 보였습니다.”

“저, 무서운 사람 아니에요. 적어도 아군에게는요.”

“적이 되면 안 되겠네요.”

“적이 될 가능성이 있나요?”

하나가 고개를 들자 테이블에 걸터앉아 있던 그가 말없이 슬쩍 웃었다. 이어 차에 가더니 본인의 짐을 가져왔다.

그 안에 든 물건들은 그녀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유은성은 방탄조끼 대신, 가슴을 가로지르는 건벨트를 찼다.

“목숨 아까운 줄 알면, 벨트 대신 조끼를 입길 권하겠어요.”

“무겁고 답답한 건 질색입니다.”

“건벨트, 그거 멋 부리는 거 같은데.”

“그럴 수도 있고요.”

이쯤 되니 유은성의 정체에 대해 혼란이 왔다. 그래서 더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아무리 의심스럽다 해도 로건이 붙여 준 인물이다. 로건 발렌타인이 얼마나 치밀한지 아는 그녀는 그를 믿기로 마음먹었다.

블루투스 이어폰을 착용한 하나는 무전 상태를 확인한 후 배낭을 챙겼다.

짐은 더욱 간소해졌다. 외장 메모리를 제거한 노트북은 오븐에 넣어 폐기했고 휴대 전화는 하나만 챙겼다. 유은성은 그녀가 집어 든 플립폰을 보며 물었다.

“그 유물은 뭡니까?”

“왜요, 아날로그 좋아하면 안 되나요?”

“신기해서요. 평범하게 쓰는 물건은 아닌데….”

그에 코웃음 친 하나는 배낭 깊숙한 곳에 휴대 전화를 넣고 바짝 당겨 멨다. 그러곤 다시 지도를 확인했다.

로건이 보내온 좌표에 따르면, 메싸는 이곳에서 300m 떨어진 곳의 도로를 지난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비포장도로였다.

“교전은 없어야 해요. 트레일러 하나만 건드릴 거예요. 타이어를 노리죠.”

하나의 말에 은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줄리오 파렌티가 올 때까지 잡아둘 겁니까?”

“아뇨, 잠입할 거예요. 시간을 끄는 건 너무 티 나서…. 수리 가능할 정도로만 건드린 뒤, 트레일러에 잠입할 생각이에요.”

“코카인이라도 확보하려고 합니까? 잠입이라니. 당신 목적은 줄리오 파렌티 아닌가?”

“코카인은 컨테이너에 있어요. 트레일러엔 분명 무기를 실었을 겁니다. 그리고 얘네, 바보 아니에요. 칼자국과 총자국, 무언가를 잘못 밟아 터진 자국은 귀신같이 구분할걸요?”

“그러다 죽어요, 이하나 씨.”

“으음, 아니요. 저 안 죽어요. 죽을 때가 아직 안 돼서요.”

은성이 더는 들어주기 힘들단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준비를 마친 하나의 얼굴에선 여유가 사라졌다.

그녀는 천천히 숨을 가다듬으며 눈을 감았다. 오래전부터 해 온 일종의 의식이었다. 수의 따윈 입지 않겠다는 다짐이기도 했고.

말간 빛이 얼굴에 닿아 흩뿌려진다. 눈을 감아도 시야가 붉은 이유는 빛 때문이었다. 그런 그녀의 눈앞이 순간 검게 변했다.

하나가 눈을 뜨자, 사나운 표정의 유은성이 고개를 기울인다.

“이해가 안 돼. 뭘 믿기에 겁이 없지? 목숨 아까운 줄도 모르고…. 동생이란 사람이 이하나 씨 목숨보다 소중합니까?”

마치 취조하는 듯한 말투였다.

하나는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대답했다.

“왜 그런 질문을 해요? 남이사. 내가 어떤 방식의 삶을 살든, 그건 행복해지기 위한 거지 불행해지기 위한 거 아니에요. 그런 질문, 불쾌한데.”

“불쾌? 목숨을 쉽게 여기는 것 같아서 나야말로 불쾌한데. 지원을 요청해요, 차라리. 아무리 잘났어도, 당신 여잡니다.”

또 여자래.

그래서, 여자는 사람이 아닌가?

대꾸할 가치를 느끼지 못한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제 앞을 막은 은성을 밀어냈다.

그러자 걸음을 내딛던 하나의 팔을 잡아챈 은성이 분을 참듯 이를 간다.

“왜 이렇게 말을… 안 듣지?”

이건 또 뭐라는 거야.

“너나 엄마 말 잘 들어. 까불지 말고.”

남자의 손을 뿌리친 그녀는 마스크를 올려 써 얼굴의 반을 가렸다. 유은성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하나는 앞을 막은 그에게 말했다.

“방해할 거면 여기서 죽어. 그쪽 보내 주는 거 나한텐 일도 아니야. 그러니까 조력자 할 거면, 조력자만 해. 선 넘지 말고.”

***

「타깃, T 지점 도착 3분 전.」

무전을 들은 하나는 소형 지뢰를 바닥에 설치했다. 다른 지뢰와 다른 점이라면, 신호를 넣지 않는 이상 터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수풀에 몸을 숨긴 그녀는 유은성이 있는 방향을 살폈다. 그는 후방지원을 할 것이다. 하나가 트레일러에 잠입할 때, 혹시라도 벌어질 교전에 대비해 저격을 준비하기로 했다.

「타깃 2 발견. 검정 SUV 다섯대. 시간차 45분.」

“줄리오 파렌티의 동승 여부 확인.”

「확인.」

그녀는 나무 기둥에 등을 기댔다. 이름 모를 새 울음과 풀벌레 소리, 먼 곳에서부터 시작된 묵직한 땅의 울림이 이어진다.

「1분 전. 속도 70km/h」

「30초.」

「10, 9, 8, 7, 6, 5, 4, 3, 2, 1.」

제로에 도달하는 순간, 트럭과 트레일러가 동시에 나타났다. 선두를 내달리던 트럭이 좌표 지점을 통과하는 찰나. 그녀는 버튼을 눌렀다.

쾅!

뜨거운 공기가 가득 차 있던 타이어가 터지며 트럭이 뒤집힌다. 뒤이어 달려오던 트레일러를 비롯한 무장 범죄자들을 태운 트럭이 일사불란하게 멈춰 섰다.

뛰어내린 이들은 너도나도 흥분해 소리치며, 트럭에 깔린 사람들을 빼내고 넘어진 차체를 바로 세우려 했다.

하나는 그들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 트레일러 뒤로 다가갔다.

「트레일러 내부 생채 신호 있음.」

“확인.”

「셋.」

그녀는 심호흡한 후, 단번에 문을 열었다. 제법 안락한 트레일러 안에 앉아 있던 놈들이 침입자를 발견하곤 무기를 집어 든다.

하나는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정확하게 머릴 관통한 세 발의 탄환. 소음기를 장착한 덕에 가뜩이나 작은 총성이 소란 속에 묻혔다.

「뒤. 11시 방향.」

무전이 들려옴과 동시였다. 뒤를 노리던 놈의 머리통에 총알이 박혔다.

「클리어.」

저격을 맡은 유은성의 목소리.

하나는 놈들이 발견하기 전, 트레일러 밖에 널브러진 시체를 안으로 옮겼다. 그러곤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은 채 문을 닫았다.

“잠입했습니다. 타깃 2의 위치는?”

「20분 전. 속도가 상당하다. 충돌 예상.」

충돌이라는 건 말 그대로 와서 들이받는다는 뜻. 최대한 안전한 자릴 확보한 그녀가 물었다.

“메싸의 위치는?”

「트레일러 운전석.」

“사살합니까?”

「메싸에 대한 결정은 내가 합니다, 이하나 씨.」

이번에도 끼어든 건 유은성이었다. 메싸에게 개인적인 원한이 있다고 했던가.

하나는 코웃음을 치며 무전에 답하지 않았다. 그사이 트레일러를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출발을 지시했다.

그녀는 청각을 집중한 채 바깥 상황을 가늠해 보았다. 덜컹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하는 트레일러. 예상했던 대로 이들은 컨테이너에 코카인을, 트레일러엔 무기를 실었다.

하나는 트레일러에 실린 무기들을 하나씩 확인했다. 모두 아프간 복무 시절 한 번쯤 마주쳤던 무기였다. 제 동료들을 죽음에 이르게 했던 적군의 무기.

그에 차갑게 굳은 표정으로 박스를 닫고 등을 벽에 기댔다. 그러자 운전석 쪽에 앉은 이들의 대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빌어먹을! 어떤 새끼가 확인도 없이 물건을 빼돌린 거야! 이 물건이 누구 건지 알고 그랬어? 자그마치 줄리오 파렌티의 물건이라고! 젠장, 젠장! 젠장!”

남자는 거의 악을 썼다.

“컨테이너 비우고, 정리해. 그리고 연락해서 물건 못 전한다고 해. 계약 파기라고. 줄리오 파렌티의 물건인 줄 알았으면 계약하지 않았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비포장도로의 험난함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이어 무전이 들려왔다.

「충돌, 충돌, 충돌!」

다급한 음성이 점점 커지는가 싶더니, 그녀의 귀에도 들렸다. 사람들의 경악에 찬 고함과 트럭과는 다른 엔진 소리가.

끼이이익! 쾅!

엄청난 충격음을 내며 급정거한 트레일러. 주위를 에워싸고 있던 박스들이 와르르 쏟아져 그녀의 몸을 강타했다. 다급히 양손으로 머릴 감쌌지만, 이미 늦었다.

머리가 찢어져 피가 흐르는지 눈앞이 시뻘겋게 변했다. 귀에선 계속해서 생사를 확인하는 무전이 들려왔다.

하나는 거침없이 이어폰을 빼 던져버리곤 총을 꺼내 장전했다.

탕!

그때 들려온 총성. 그 총성을 시작으로, 사방에서 날아온 총알이 트레일러에 박히기 시작했다. 고함과 비명, 굉음이 뒤섞였다.

점점 더 가까워진다. 지금껏 기다려온 존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하나는 피를 닦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머리에서 흐른 피 때문에 정신이 몽롱했고, 초점은 자꾸 어긋났다. 몸 어딘가가 망가진 느낌이 들었지만, 조준한 총구는 미동조차 없었다.

곧… 만난다.

이어, 묵직한 소릴 내며 트레일러 문이 열린다.

빛 한점 들지 않던 트레일러 내부에 서서히 들이치는 한 줄기 빛.

눈이 부실 법도 하건만, 그녀는 방아쇠에 손가락을 얽은 상태로 숨을 참았다. 비릿한 혈향 사이사이, 짙은 머스크향이 뒤섞인다.

시끌시끌한 소리를 구둣발로 짓밟으며 걸어 들어오던 남자가 시신들을 둘러보더니 슬쩍 입꼬리를 끌어 올린다. 그는 사신처럼 거대한 존재감을 내보였다.

전신에 뒤집어쓴 핏물보다도, 상대의 매혹적인 향기가 더욱 위험하게 느껴지다니.

“Ciao.”

역시, 이탈리아어다.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그가 그녀를 응시했다. 정확히는 총구를, 그 너머의 까만 눈동자를.

“다가오면…. 죽일 겁니다.”

하나는 여유로운 투로 말하려 애썼다. 이런 압도적인 위압감은 정말이지 오랜만이었다. 발끝에서부터 시작된 소름에 그녀의 입술이 비틀리듯 휘어 올라갔다.

그러자 두 눈을 가늘게 뜬 남자가 되물었다.

“Coreano?”

“Si, come no.”

그는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은 채, 천천히 시선을 맞추어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댔다.

조준한 총구에 이마를 가져다 댄 남자가 그녀의 손목을 부드럽게 그러쥔다.

역시… 이 새끼는 미친 게 분명했다.

하나는 힘겹게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남자의 이름을 조용히 읊조렸다.

“줄리오 파렌티.”

그녀의 입술을 가느다란 눈으로 응시하던 줄리오 파렌티의 음성이 뇌까리듯 싸늘하게 흘러나왔다.

“Ho aspettato. La mia morte.”

그는 천사의 얼굴을 한 악마. 또는 괴물이었다.

찰나, 둔탁한 충격과 함께 눈앞이 번뜩였다.

하나는 정신을 잃기 전, 제 머릴 후려친 놈의 얼굴을 확인했다. 줄리오 파렌티의 오른팔, 로렌조라고 했던가….

‘개자식, 너부터 죽을 줄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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