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팟, 소릴 내며 회의실 불이 꺼지고 스크린에 영상이 떴다.
회의실에 앉은 로건과 오슬로는 하나가 켠 영상을 보며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국가 거물급 범죄자들의 이름이 한 번에 묶인 관계도는 위험했다. 위험한 정도가 아니라 FBI와 CIA의 정예들이 다룰 법한 정보나 다름없었다. 잘못 건드렸다간 거하게 엮여 온갖 범죄 혐의를 뒤집어쓸지도 모른다.
로건은 담배에 불을 붙이며 테이블 위로 다릴 올렸다.
“그러니까…. 네 동생이 줄리오 파렌티에게 제거당했다는 거야?”
저도 묻고 싶은 질문이었는지, 오슬로가 입을 꾹 다문 채 하나의 답을 기다렸다.
“이두이. 국가 안보 정보부 소속, 해외 마약 범죄 수사팀의 요원입니다. 임무 중 사망했다는 건 오피셜이고…. 지금부턴 오프더 레코드로 하죠. 살아 있습니다, 이두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오슬로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 쌍둥이 누나에게 집착하는 남동생은 이 바닥에서도 유명했다.
그녀가 위험한 임무에 투입될 때마다 회사를 뒤집어엎을 듯 굴던 이두이를 떠올린 로건이 혀를 찬다.
“그 시스콤이 드디어 일냈군.”
로건의 말에 하나는 기분 나쁜 투로 토를 달았다.
“시스터 콤플렉스 아닙니다. 말조심해요, 발렌타인.”
“네 동생만 아니었어도, 넌 아직 발렌타인이야. 나한테는 원수 같은 놈이라고.”
그때의 기억이 되살아난 건지 로건이 이를 갈았다. 그에 하나가 눈썹을 삐딱하게 올리며 ‘불만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놉, 불만 없어. 계속해. 재밌네. 살아 있는 군인을 죽었다고 하는 거, 어디서 자주 쓰던 쓰레기 짓인데 말이야.”
차가운 물로 목을 축인 하나는 화면을 바꾸었다.
“영상입니다. 동료의 말로는 줄리오 파렌티의 물건을 이두이가 빼돌린 후 협상을 위해 움직이던 시점에 발생한 사건입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고 한 시간 뒤, 누군가 나옵니다. 용의자 1, 타깃으로 설정했습니다. 다리를 절고, 남자, 키는 6피트가 안 됩니다.”
이어 화면을 빨리 감았다. 그러자 몸에 폭탄 조끼를 걸친 두이가 손을 머리에 올린 상태로 걸어 나온다.
하나는 이 장면에서 힘겹게 숨을 골랐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대체 왜, 보여 주려 한 걸까요. 어차피 죽일 거라면 보여 줄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IDC:A는 이 장면만으로 이두이를 사망 처리했어요. 누가 봐도 의문점이 가득한 영상인데.”
“게다가 편집본이잖아. 원본은?”
역시 로건은 예리했다. 하나는 건물이 폭발하는 화면을 등진 채 고개를 저었다.
“원본은 없습니다. 원본을 입수하는 것도, 이번 작전에 포함할 예정입니다.”
생각에 잠겨 있던 로건은 손가락을 까딱여 화면을 앞으로 당기라고 했다.
하나는 다시금 빨간 선이 난무한 관계도로 화면을 바꿨다.
“여기서 질문. 이하나, 너는 정말 줄리오 파렌티가 이두이를 납치했다고 생각해?”
“모릅니다. 아직 확신은 없지만, 관련이 있는 건 분명합니다.”
“난 아무리 봐도 이상해. 내가 저쪽을 좀 알거든. 줄리오는…. 납치할 바엔 그냥 죽여. 지금까지 납치했던 경우는 딱 한 번 있었어. 카이스 밀러라는 미국인 해커인데, 줄리오가 찾던 정보를 갖고 있었다더군. 제 발로 파렌티를 찾아간 거라는 소문도 있고. 어쨌든 내가 궁금한 건 미스터 강이 왜 저 관계도에 끼어 있냐는 거야.”
“미스터 강? 강무진 말입니까?”
“응, 무진. 우리는 진이라고 불러. 의뢰인이거든. 너, 내가 근처에 있었는지 정말 몰랐어?”
하나는 실마리를 움켜쥔 기분으로 로건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의자의 등받이를 젖힌 그가 생긋 웃더니 굳은 표정의 그녀를 올려다본다.
“몰랐나 보네.”
“강무진, 뭐 하는 사람입니까?”
“의뢰인 정보야. 아무리 너라도 그건 못 알려 주지.”
“경호 임무입니까? 어쨌든… 여기에 있단 뜻이네요.”
하나는 굳이 안달하지 않았다.
로건이 이곳에 있다는 건, 규모가 상당한 의뢰일 터. PMC의 주 업무인 해외 파견 업체들의 경호 의뢰를 맡았을 가능성이 컸다. 그렇다는 건, 강무진은 기업인. 또는 그에 상응하는 재력을 가진 인물이란 뜻이다.
“내가 말해 줄 수 있는 건 이것뿐이야. 강무진은 신흥 재벌 격이라 할 수 있고, 줄리오 파렌티는…. 저 보고서에 있는 조잡한 거래 같은 건 손대지 않는다는 거지. 조악하잖아. 꼭… 삼류처럼.”
하나는 스크린 방향으로 천천히 돌아섰다.
로건의 말대로라면 저 보고서에 적힌 줄리오 파렌티의 범죄는 조작된 것. 또는….
“누가 사칭을 했다면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누군가 줄리오 파렌티를 사칭했다면, 설명이 간단해져. 이 바닥에선 비일비재한 일인데, 네 나라의 정보부는 그 점을 무시했나 봐?”
“무시한 게 아니라… 무시할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르죠.”
불빛에 반사된 담배 연기가 회색 그림자를 만든다.
결국, 최태준이 건넨 정보는 완벽한 게 아니었다. 어쩌면 상부에서 받은 보고서와 제가 받은 보고서가 다를지도 모른다.
진지한 분위기에 숨죽이고 있던 오슬로가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줄리오 파렌티 말이에요, 안 그래도 조만간 움직일 것 같던데요.”
그 말에 하나와 로건이 동시에 오슬로를 돌아보았다.
“오늘 아침에 들어온 정보인데, 줄리오 파렌티의 물건이 북부에서 도난을 당했다고 합니다. 진짜 물건이요.”
“어떤 미친놈이?”
“메싸라는 캄보디아 동부에서 활동하는 다국적 범죄 조직의 대가립니다. 주 종목은 인신매매. 문제는 놈이, 파렌티의 부하를 죽였어요. 아시죠? 마피아가 어떤 놈들인지.”
“알지. 가족 건드리는 건 못 참는….”
로건은 순식간에 심각한 표정이 되었지만, 하나는 아니었다. 점점 밝아지는 그녀의 낯빛에 로건의 눈썹이 꿈틀댄다.
“너…!”
“걔 어디 있어요?”
“뭐?”
팟, 소릴 내며 꺼지는 화면. 하나는 거침없이 최태준에게 받은 자료를 찢었다.
“걔 지금 어디 있냐고요. 줄리오 파렌티.”
***
이탈리아 남부 시칠리아.
코발트색 물감을 풀어놓은 듯한 하늘과 바다의 경계가 불분명한 이곳은 낙원이라 불리고 있었다.
타오르미나 지역으로 향하는 도로를 검은 레인지로버가 줄지어 내달린다. 덩치 큰 SUV들은 전속력을 다해 구불구불한 도로를 달려 절벽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답지 않게 속력을 낸 차들의 등장에 사위가 삽시간에 경직됐다.
꼭대기에 오른 차들이 속력을 줄이자, 사유지의 닫혀 있던 육중한 철문이 열린다.
고대 이탈리아인들이 설계했고 국가의 손에서 관리된 곳이었지만, 지금의 주인은 줄리오 파렌티.
차량 뒷좌석에 탄 로렌조는 그런 줄리오 파렌티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골이 지끈거렸다. 100kg이 넘는 덩치에 유난히 땀이 많은 그가 긴장한 표정으로 손수건을 꺼내 식은땀을 닦아냈다.
이곳은 고향이나 다름없는 시칠리아섬이었지만, 조금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로마의 신전을 방불케 하는 거대한 기둥이 세워진 중앙 홀 앞. 멈춰 선 차에서 뛰어내린 로렌조가 대기 중이던 남자에게 물었다.
“줄리오는?”
“풀에 있습니다.”
“수영 중이야?”
“예.”
로렌조는 답답한 넥타이 매듭을 잡아당겨 느슨하게 만들었다. 그러곤 따라붙으려는 부하를 물린 채 거침없이 걸음을 옮겨 북쪽 풀장으로 향했다.
유백색의 아치형 통로를 지나자마자 펼쳐진 마짜로 해변의 아름다움.
이름 모를 새의 울음이 길게 이어지고, 드문드문 파도 소리가 들리는 거대한 풀 앞에 줄리오가 서 있었다.
줄리오 파렌티. 로렌조는 그런 줄리오를 보며 짧게 탄식했다.
떡 벌어진 어깨 아래 아물기 시작한 상처가 보인다. 수영을 즐기는 탓에 가벼운 상처도 꽤 오래 남는 그였다.
경직된 목을 좌우로 풀더니 긴 팔다리를 가볍게 턴다. 영화 속 한 장면처럼 근사했지만, 지켜보는 모든 이들은 긴장한 채였다.
로렌조가 가져온 소식 때문이었다.
그들의 긴장감을 비웃듯, 줄리오 파렌티는 포물선을 그리며 물속으로 다이빙했다.
풍덩 소리와 함께 물보라가 인다.
깊게 잠수했던 그가 완벽한 영법으로 물살을 갈랐다. 길게 뻗은 팔이 수면을 헤집을 때마다 흰 포말이 일어나 넓게 번진다.
로렌조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조금 전 줄리오가 서 있던 자리로 다가섰다. 그러자 반대편 끝까지 헤엄쳐 터치 다운한 줄리오가 압도적인 존재감을 뿜어내며 출발선으로 돌아왔다.
커다란 손으로 풀 가장자리를 짚은 뒤 고개를 내미는 그. 거친 숨을 몰아쉬는 줄리오의 가슴팍이 빠르게 들썩이고, 단단한 근육은 터질 듯 부풀었다.
짙은 갈색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 그가 로렌조를 노려보며 물 밖으로 걸어 나온다.
악마가 빚어낸 듯 완벽한 이목구비와 조각 같은 전신을 타고 물줄기가 뚝뚝 흘러내렸다.
“줄리오.”
고개를 저어 물기를 털어낸 줄리오가 느긋한 걸음으로 로렌조를 지나쳐 테이블 앞에 섰다.
“한잔해. 덩치도 큰 게 그렇게 땀 흘리면 보기 안쓰럽잖아?”
줄리오는 통에 든 얼음을 한 움큼 집어 잔에 넣곤 준비되어 있던 술을 따랐다. 로렌조는 줄리오가 내민 술을 받았다. 이어, 본인 몫의 술을 따른 그가 의자를 빼 앉으며 고개를 까딱였다.
“물건을 갈취당했다던데. 책임자는?”
“니콜로. 현장에서 사살됐어. 버러지 같은 새끼들! 감히, 우릴 건드려?”
“흠….”
가늘게 뜬 갈색 눈동자에 투명한 햇살이 들어찬다. 로렌조는 먼바다를 노려보는 줄리오의 분위기가 서서히 냉각되어 가는 걸 느꼈다.
줄리오 파렌티에게 중요한 건 갈취당한 물건이 아니었다. 그따위 오합지졸에게 빼앗긴 코카인 트레일러쯤은 얼마든지 되찾을 수 있으니까. 그를 분노하게 만든 건, 식구였던 니콜로가 사살되었다는 것.
술잔을 기울인 줄리오가 고개를 주억이며 담백한 어투로 물었다.
“캄보디아라고 했나?”
“캄보디아 동부에서 활동 중인 메싸라는 놈이야. 다국적 오합지졸 쓰레기들의 두목이지. 인신매매 따위로 벌어먹던 놈들이 니콜로를 죽인 거야!”
적의 이름을 입에 담은 로렌조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피의 맹세를 한 자라면, 성과 국적에 상관없이 모두 식구였다. 게다가 살해당한 니콜로의 나이는 고작 스물셋.
손안에 든 잔을 돌리던 줄리오가 커다란 손바닥으로 느리게 턱을 쓸었다.
“게다가 사칭하는 벌레까지 생겼던데.”
“네가 요양하는 동안 일어난 일이야. 이것들이….”
로렌조는 그렇게 말하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준비해. 지금 가지.”
줄리오가 몸을 일으키자 휘파람을 부는 로렌조. 그 신호를 시작으로 저택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줄리오는 느긋하게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물을 뚝뚝 흘리며 계단을 오를 때마다 그의 얼굴에 드리웠던 여유가 사라지고, 닿으면 베일 듯한 살기만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