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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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전유철의 셔츠로 갈아입은 하나는 여전히 찝찝한 표정으로 현장에 돌아왔다.

그러자 깍듯하게 인사한 유철의 동료가 시원한 생수를 내민다.

“고맙습니다.”

“아유, 별말씀을요. 팬입니다. 이하나 중사님.”

“아, 네.”

사회생활 중 지나치게 깍듯한 상대를 만나면 이상하게 멋쩍은 기분이 든다. 생수를 받아 든 하나는 현장 수습 중인 전유철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막 구급차에 범인들을 태운 유철이 진땀을 흘리며 말했다.

“야, 쟤네 전치 12주 넘게 나올 각이다.”

“그렇게 심하게 안 때렸어요.”

“장난하냐? 저 꼴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 으이그, 내가 이럴 줄 알았지.”

“그럼 어떻게 할까요. 저 폭행죄로 집어넣으실 거예요? 경찰이 민간인 끌어들여 놓고 되게 당당하네?”

“야! 그런 뜻이 아니잖아. 어쨌든 수고했다. 너 아니었으면 이번에도 허탕이었을 거야. 새끼들, 저 대가리로 공부했으면 하버드도 갔겠네. 쯧.”

하나는 구시렁거리는 유철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럼, 수고비 주세요. 약속한 금액 플러스 세탁비.”

“와, 이것 봐라? 임무 끝났다고 바로 정산 들어가는 거 보소?”

“제가 요즘 좀 궁해서요. 주세요, 수고비.”

유철은 질린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곤 지갑에서 만 원짜리 몇 장을 꺼냈다. 그러다가 하나의 미간이 찌푸려지는 걸 보고는 결국 5만 원짜리 10장을 꺼내어 내민다.

“이거 받고, 나머지는 카드로. 소고기 살게. 콜?”

“흠…. 선배, 쟤네 잡아서 진급하는 거 아니에요?”

“야, 1계급 특진해 봤자야. 월급은 똑같아요. 어?”

“에이, 이럴 줄 알았어. 내 몸값 알면서 이러신다.”

“알아, 알아. 내가 왜 몰라. 네 몸값이 업계 톱인 거 다 알아. 그러니까 소고기 살게. 인마! 우리가 하루 이틀 본 사이도 아니고, 오가는 정이 있어야지. 어, 안 그래?”

“알겠어요. 어쨌든 소고기 약속 지키십시오. 기억합니다?”

“알았어, 알았어. 그럼 오늘은 간단하게 소주나 한잔 빨까?”

소주란 단어에 따라붙는 안주를 떠올리자 입 안에 침이 고였다. 늦은 시각이었지만, 오랜만에 몸을 움직여서인지 허기가 진다. 그래서 선뜻 그러자고 답한 뒤 유철이 타고 온 승합차로 향했다.

“여기서 기다릴게요!”

“어어, 금방 정리할게!”

차는 또 왜 이렇게 더러운 건지.

누가 강력계 아니랄까 봐 타고 다니는 승합차도 주인들을 닮았다. 하나는 상처투성이인 시트에 앉아 발에 채는 쓰레기들을 쓱쓱 밀어냈다.

대충 제가 앉을 자리를 깔끔하게 만든 하나는 휴대 전화를 꺼내 의미 없는 인터넷 서핑을 했다.

시끄러운 국제 정세와 국회 의원의 말. 한창 유행하는 드라마라던가 빌보드를 석권한 가수의 기사들로 오늘도 포털사이트는 복잡하고 요란했다.

하나는 금세 흥미를 잃곤 이어폰을 꼈다. 그러자 지긋지긋한 영어 회화가 흘러나온다.

어느덧 현장 지휘를 마치고 트렁크를 연 전유철이 구겨져 있던 셔츠를 찾아 입은 뒤, 뒷좌석으로 왔다.

“내일 기사 나갈 거야. 네 이름은 안 나가니까 걱정 말고.”

하나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꼭 그래야 해요. 저, 현장 투입된 거 알면….”

“야야, 알았다니까 그러네.”

오늘 유철의 부탁으로 그녀가 투입된 건 벌써 세 차례나 일어난 만취 여성 강간 및 강도 사건이었다.

이들은 대포 차량을 택시로 개조해 불법 영업을 자행했고, 만취한 여성들을 타깃으로 범죄를 저질렀다.

그래서인지 피해자들은 범인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했다.

드문드문 일어난 블랙아웃이 문제였다.

피해자는 있는데, 범인이 없는 상황.

범인들을 택시 기사로 좁혀나간 유철이 온갖 방법을 동원했으나 이들은 쉽게 잡히지 않았다.

예쁘지 않으면 태우지 않을뿐더러, 눈치가 빠른지 어둠 속에서도 상대를 정확하게 구분했다. 가장 큰 문제는 놈들이 절대 남자 승객을 태우지 않는다는 것.

범죄자들은 까다롭게 대상을 골랐고, 잠복한 경찰들은 티가 났다. 그래서 전유철은 최후의 보루라고 여겼던 이하나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유는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조차 없었다.

1. 이하나는 여자다.

2. 이하나는 예쁘다.

3. 이하나는 강하다.

4. 이하나는 겁이 없다.

5. 이하나는 돈이 필요하다.

게다가 이하나는 절대 다치지 않을 것이다.

성공률이 높은 만큼 제법 큰 돈을 쥐여 줘야 했지만, 1계급 특진을 생각하면 이 정도는 투자 축에도 들지 못한다.

“자자, 다들 한잔하러 가자! 내가 산다!”

“오! 진짭니까? 웬일이세요?”

“야야, 빨리 타! 팀장님 맘 바뀌기 전에!”

드물게 기분 좋아진 전유철이 호방하게 웃으며 하나의 옆자리에 올라탔다. 옆으로 절대 비키지 않겠다고 버티는 그녀를 지나, 몸을 구겨 넣은 유철이 쯧 혀를 찬다.

하지만 이하나는 지극히 태연한 태도로 영어 단어 암기 삼매경 중이었다. 조금 전 건장한 남자 둘을 반사 상태로 만든 사람이라고는 볼 수 없는 태도에, 다들 마른침만 꿀꺽 삼켰다.

“너, 영어 잘하지 않냐?”

“자격증용 영어는 좀 달라요.”

“실무가 중요하지, 청와대 경호원은 영어로 경호한다냐?”

“뭐가 됐든 성적이 좋아야 월급도 많이 받죠.”

왜 당연한 걸 묻냐는 듯한 말에 다들 ‘아아.’ 하며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영어는 전문가에게 맡긴다며 저들끼리 농담을 한다.

모래내 시장 근처, 노포 맛집으로 알려진 대폿집 주소를 알려 준 유철은 하나를 힐끔대는 놈들을 둘러보며 부러 화제를 돌렸다.

“두이는 요즘 어때. 잘 지내? 지금 어디에 있지?”

“몰라요. 두 달 전엔 미국에 있었는데, 얼마 전엔 스페인에서 연락이 왔고, 일주일 전에는 캄보디아였나….”

“그놈, 진짜 잘 나간다. UDT 제대하고 곧장 현장 투입된 거지? 해외 마약 범죄 수사팀, 그거 힘든데.”

“두이가 워낙 똑똑하잖아요. 내 동생이라서가 아니라 두이는 정말 잘 될 거예요.”

하나뿐인 동생 이야기에 그녀는 환하게 웃었다.

사르르 녹을 만큼 달콤한 미소를 짓는 여자가 살인 병기라고 불린다니. 유철에게 듣고 직접 보았음에도 다들 믿기 어려웠다.

하나는 앨범을 열어 얼마 전 두이가 보내온 사진을 자랑하듯 내보였다.

이건, UDT 입소 사진. 이건, 해변에서 서핑하며 찍은 사진. 이어 방송국과 인터뷰를 했을 때 찍은 사진들까지 끊임없이 내민다.

이 정도면 누나가 아니라 엄마 아니냐며 유철이 농담을 했다.

“엄마면 어떻고 누나면 어때요. 어차피 우리 둘뿐인데.”

하나와 두이가 태어난 곳은 서울의 어느 여인숙이었다.

미혼모로 쌍둥이를 낳은 모친은 젖 한번을 물리지 않고 둘을 버렸다.

이해한다. 힘들었겠지. 대한민국에서, 그것도 90년대 초반 서울에서 미혼모로 살아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테니까.

여인숙 할머니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했지만, 두이는 어려서부터 몸이 약했다. 보육원에서는 어떻게든 둘을 함께 입양 보내려 했으나 쌍둥이를 원하는 가정을 찾긴 어려웠다.

그렇게 몸과 머리가 자라 사춘기에 접어들었을 때, 둘은 보육원을 나와 함께 살기 시작했다.

고시원에서 지하 단칸방으로. 옥탑방을 거쳐 서울 중심, 기숙사가 딸린 대학에 둘 다 합격했다.

군인이 된 건, 사소한 이유 때문이었다.

돈이 없었고 배가 고팠다. 게다가 두이는 보육원에서 나온 뒤로 점점 건강을 되찾았고, 남다른 체력도 갖게 되었다.

하지만 모은 돈으로 둘 다 대학에 가는 건 불가능했다. 그래서 하나는 더 똑똑한 두이를 대학에 보냈다.

대신, 그녀는 군에 자원했다. 이왕이면 아주 오래 버틸 생각이었다.

숙식이 제공되고, 월급도 주고, 직업도 생기는 곳.

게다가 적성에 맞는 군 생활을 하다 보니, 생각보다 많은 기회가 주어졌다.

그렇게 최고 성적으로 특임단에 들어가 5년 넘게 근무하던 그녀는 PMC(민간 군사 기업)를 소개받았다.

점점 군에서 주는 월급이 부족하다고 느껴질 때였다.

특기를 살려 스나이퍼로 지원했지만, 그녀는 귀하디귀한 여성 요원이었다. 그러다 보니 간부들의 눈에 띄었고, 차원이 다른 훈련을 받았다.

주된 교육은 스파이 행위를 비롯한 근접 전투 능력의 향상이었다. PMC의 훈련은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만큼, 그녀가 겪은 훈련 강도는 그 어떤 군사 훈련과도 비교할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근무지는 아프가니스탄을 비롯한 그 외의 분쟁 중인 모든 국가.

한마디로, 근무지에 국경 같은 건 없었다. 전쟁과 테러가 있는 곳이라면 전 세계가 그녀의 무대였다.

그랬던 이하나가 몇 달 전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것도 청와대 경호실에 입사하겠다며, 억대 연봉을 뿌리치고.

“어쨌든, 나는 너 한국 와서 좋다. 용병 일, 그거 못 할 짓이야. 네가 아무리 날고 기어도 용병일 하다가 죽는 건 개죽음이란 거, 알지?”

늦은 시간이지만, 손님들로 바글바글한 대폿집 앞에 승합차가 멈춰 선다.

“알아요. 그래서 들어온 거예요. 두이 잔소리에 질리기도 했고.”

“그래그래, 잘 생각했어. 난 너희만큼 우애 좋은 남매를 본 적이 없다. 내 동생 새끼는 맨날 사고나 치고, 도움은 좆도 안 되는데.”

“저희는 쌍둥이잖아요.”

“쌍둥이가 다 그런 거 아니거든? 너네가 유별난 거지. 어쨌든 들어가자. 등짝에 뱃가죽이 들러붙겠다.”

소도 때려잡을 손으로 하나의 등을 두드린 유철은 동료들과 함께 차에서 내렸다. 가방을 챙긴 그녀가 따라 내리려 할 때였다.

갑자기 휴대 전화가 울렸다. 액정에 뜬 +855. 캄보디아 프놈펜의 지역 번호인 23으로 시작되는 숫자에 얼굴이 환해진다.

“선배, 저 통화 좀요.”

타이밍이나 상황으로 보아, 두이에게서 걸려온 전화였다.

얼마 만이지?

하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유철을 먼저 보낸 뒤, 들뜬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다.

“전화 받았습니다. 두이니?”

국제전화 특유의 먼 감도가 반가울 지경이다.

[혹시, 이두이 씨 가족분 되십니까?]

두이가 아니다. 전화를 건 사람은 두이를 아는 이였다.

하나의 얼굴에서 미소가 걷히고, 상대의 사무적인 말이 이어졌다.

[이하나 씨, 맞으세요?]

“네, 맞습니다. 누구십니까?”

불길한 예감이 틀리기를 바랐다.

지옥주를 견딜 때 교관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군복은 수의이며, 훈련을 받는 이유는 살아남기 위해서라고. 살기 위한 방법을 가르쳐주진 않는다고 했다.

너희는 수의를 입고 적진에 뛰어드는 거라고.

왜 갑자기 그 말이 떠올랐는지 모르겠으나, 오랜만에 심장이 빠르게 뛰어댔다.

[IDC:A의 이영훈입니다. 이두이 씨가, 임무 중 사망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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