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어와 한국어의 표기는 분리하지 않았습니다.
*국가 및 인종, 인권 평등을 지향하나 작중 차별적 비속어와 강압적 장면이 등장할 수 있습니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단체 및 지역명은 모두 허구이며 실존하는 군법 및 국가보안법을 따르지 않습니다.
<01>
Prologue
눈앞이 붉다.
머리에서 흐른 피 때문에 정신이 몽롱했고 초점은 자꾸 어긋났다. 몸 어딘가가 망가진 느낌이 들었지만, 조준한 총구는 미동조차 없었다.
이어, 묵직한 소릴 내며 트레일러 문이 열린다.
빛 한 점 들지 않던 트레일러 내부에 서서히 들이치는 한 줄기 빛.
눈이 부실 법도 하건만, 그녀는 방아쇠에 손가락을 얽은 상태로 숨을 참았다. 비릿한 혈향 사이사이, 짙은 머스크향이 뒤섞인다.
시끌시끌한 소리를 구둣발로 짓밟으며 걸어 들어오는 남자는 사신처럼 거대한 존재감을 가졌다. 전신에 뒤집어쓴 핏물보다도, 상대의 매혹적인 향기가 더욱 위험하게 느껴진다.
“Ciao.”
남자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그녀를 응시했다. 정확히는 총구를, 그 너머의 까만 눈동자를.
“다가오면… 죽일 겁니다.”
“Coreano?”
“Si, come no.”
남자는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은 채, 천천히 시선을 맞추어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댔다.
조준한 총구에 이마를 가져다 댄 그가 그녀의 손목을 부드럽게 그러쥔다.
하나는 힘겹게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남자의 이름을 조용히 읊조렸다.
“줄리오 파렌티.”
그녀의 입술을 가늘어진 눈으로 응시하던 줄리오 파렌티의 음성이 뇌까리듯 싸늘하다.
“Ho aspettato. La mia morte.”
참았던 숨이 천천히 쉬어졌다.
그는 천사의 얼굴을 한 악마. 또는 괴물이었다.
Part 01. 악의에 젖은 여자
일주일 전.
6월 21일, 23시 47분 12초.
도로변에 서서 손을 흔들자 ‘빈차’라고 쓰인 전광판이 꺼지며 택시가 멈춰선다.
“어서 오세요!”
늦은 시각이었지만, 젊은 기사는 상냥하게 손님을 맞았다.
볼캡을 눌러쓰고 영어 교재가 가득한 가방을 멘 하나는 꾸벅 인사하며 뒷좌석에 몸을 실었다.
“마포, 유성 마트 앞이요.”
“예예, 유성 마트요. 그런데 학생이에요?”
“네, 뭐. 늦깎이요.”
“어휴, 고생이 많네. 거기 물도 있고 음료도 있으니 편하게 드세요.”
기사가 말한 중앙 콘솔에 든 음료들을 힐금 보았지만, 그녀는 손대지 않았다.
택시는 제법 쾌적한 편이었다. 운전석과의 거리 유지를 위한 보호판이 설치되어 있고 은은한 방향제 냄새도 났다.
운전기사가 적어도 골초는 아니란 뜻.
하나는 술에 절인 매실이 된 기분이었다. 그래서 하품을 크게 하며 차가 신호에 걸린 사이 잠시 눈을 붙였다.
나름 오랜 해외 생활로 외국어에 능통하다고 생각했건만, 자격증을 위해 배우는 외국어는 또 달랐다.
말은 누구나 할 수 있으나 언어의 구조를 제대로 알기 위해선 공부를 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한번 꽂히면 과몰입이 일상인지라 몇 달째 저 자신을 스스로 몰아붙이고 있었다.
물론 피곤한 이유가 그것뿐만인 건 아니다. 수업을 마치자마자 편의점에 들러 맥주 세 캔을 원샷해 버린 것도 한몫했다.
눈이 떠진 건 불시였다.
‘나, 잔 건가?’
갑자기 물속에서 끌어 올려진 것처럼 심장이 빠르게 뛰고 혼란스러웠다.
여전히 운행 중인 택시 안. 손님이 늘었다.
그녀는 조수석에 탄 사람을 확인하곤 기사에게 물었다.
“기사님, 아직인가요?”
그러자 슬쩍 돌아본 기사가 미안하다는 듯 눈썹을 축 늘어트리며 웃는다.
“예예. 미안해요, 아가씨. 길을 잘못 들어서 중간에 합승했어요. 괜찮으시죠?”
“어쩔 수 없죠. 빨리 가 주세요. 요금은….”
“걱정 마세요. 요금은 반만 내시면 돼요.”
반이라….
그녀는 눈살을 찌푸리다가 이내 멀리 익숙한 이정표를 발견하곤 다시 창에 머릴 기댔다.
기사는 상냥했고, 합승한 남자는 휴대 전화 게임 삼매경 중이다. 잦게 앞 좌석에서 휴대 전화의 진동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자신의 휴대 전화를 만지작거리다가 가방 앞주머니에 느슨히 꽂아 넣었다.
‘금방 도착하니까, 뭐….’
그저 빨리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 단어장을 다시 정리하고 싶은 마음뿐.
곧 스물아홉. 금방 서른이다. 이제는 안정적인 직장 생활을 해야 할 때였다.
1분 1초가 아깝다고 느껴질 무렵, 창에 머릴 기대고 있던 하나는 이번에도 불시에 눈을 떴다.
또 깜빡 졸았나 보다.
불빛 한 점 없이 어둡고 적막한 곳.
초점은 빠르게 선명해졌고, 운전석과 조수석엔 아무도 없었다.
하나는 느릿하게 어둠에 잠긴 창밖을 노려보았다.
위험을 감지한 순간, 그녀가 앉아 있던 뒷문이 열린다.
불쑥 몸을 밀어 넣은 남자는 운전석에 앉아 있던 택시 기사였다. 놀란 그녀가 몸을 뒤로 뺌과 동시에, 반대편 문도 열렸다.
“잡아!”
뒤에서 나타난 남자가 그녀의 몸을 양팔로 강하게 옥죈다. 그에 모자가 벗겨지며 긴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뭐 하는 겁니까? 합승객이 아니라 범죄자를 태웠네요? 기사님.”
하나는 느물거리며 웃는 남자에게 물었다. 하지만 투명 인간 취급이라도 하는 건지, 그들은 저희끼리 낄낄대며 그녀의 다릴 잡았다.
“와 씨, 얼굴 까리하네. 성깔도 있고.”
“얘, 아무것도 안 마신 거 같은데? 괜찮을까?”
“씹, 내 말이. 술 냄새 존나 나서 꽐라된 줄 알았는데.”
“야, 우리 좆되는 거 아니냐?”
“신고할 테면 하라 그래. 죽이면 되지.”
이어 날카로운 쇠붙이가 목에 닿는다. 눈을 내리떠도 보이지 않는 탓에 정확하게 칼인지, 단순 위협 도구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자 뒤에서 끌어안은 남자가 셔츠 안으로 손을 넣는다. 가슴을 주물럭거리는 것만으로도 흥분했는지, 그녀의 허리에 발기한 성기를 비비기 시작했다.
곧 다리를 붙든 남자도 시뻘게진 얼굴로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그녀가 입은 레깅스를 더듬기 시작했다.
하나는 한심하다는 듯 남자를 노려보며 경고했다.
“하지 말지?”
“와씨, 도도해. 컨셉이야? 존나 꼴리게 말하네. 무서워?”
“응, 무서워. 그러니까 여기서 멈추면, 화 안 낼게. 쓰레기 새끼야.”
“닥쳐, 씨발년아. 보지를 걸레짝으로 만들기 전에.”
상스러운 욕설을 내뱉은 남자가 바지를 내리더니 성기를 꺼내 훑는다. 그러곤 제법 강하게 경고했다.
“씹으면, 모가지 날아간다.”
목에 닿은 쇠붙이가 피부를 더욱 강하게 짓눌렀다. 하나는 그제야 제 목을 누른 것이 조악하게 만든 모조 칼임을 확신했다. 하지만 아무리 조악하다 한들, 끝이 뾰족한 것은 무엇이든 무기가 될 수 있다.
그녀는 입술을 꾹 다문 채 흥분한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근데, 얘 존나 예쁘다. 나 쌀 거 같아. 냄새도 좋아. 씨발.”
이미 뒤에 앉은 남자는 흥분을 참지 못하고 질질 싸는 중이었다. 허리 뒤쪽이 축축하게 젖어간다. 그 끔찍하고 짜증스러운 감각에 그녀의 인내심도 점점 바닥을 향해 가고 있었다.
“씹, 빨라고 썅년아!”
성기로 입술을 두드리던 남자가 머리채를 움켜잡을 때였다.
두 눈을 치켜뜬 그녀의 입술이 호선을 그린다. 답지 않게 여유로워 소름 끼치는 미소. 당황한 남자의 눈가가 일그러졌다.
“너희…. 사람 죽여 본 적 없구나?”
그녀의 말투는 마치 친구에게 하듯 태연했다.
“뭐? 뭐라는 거야, 씨발.”
“음료에 약까지 타서 준비한 거 보면, 상습인데?”
숨을 들이켠 남자의 입술이 파랗게 질렸다. 심상치 않은 돌아이거나 미친년이라고 결론 내린 모양이었다.
“…야, 이년 죽여.”
할 말이 없으면 꼭 저러더라.
하나는 생긋 웃으며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그 천사처럼 순한 얼굴에 남자의 눈이 홱 돈다.
“너…!”
하나는 날붙이가 닿은 자신의 목을 가리켰다.
“죽일 거면, 여기가 아니라…. 여길, 노려야지.”
순식간이었다.
그녀가 칼을 쥔 남자의 손목을 잡아채 제 앞에 붙은 놈의 가슴팍을 찌르게 만든 건. 손목에서 들려온 소리는 근육에서 뼈가 분리되며 나는 끔찍한 파열음이었다.
“으아악!”
“히익!”
기이한 방향으로 비틀린 남자의 손목. 몸을 웅크린 하나는 있는 힘을 다해, 앞에 있는 놈의 복부를 걷어찼다.
퍽!
반동으로 칼이 뽑히더니 피가 솟구친다. 남자는 눈을 뒤집어 깐 채, 그대로 굴러 택시 밖으로 떨어졌다.
하나는 뒤에 있는 놈이 칼을 놓친 틈을 타 팔꿈치로 갈비뼈를 가격했다. 피부와 근육, 갈비뼈의 지끈한 통증에 남자는 숨도 쉬지 못하고 몸을 웅크렸다.
그대로 택시에서 내린 그녀는 벌벌 떨며 기어가던 놈의 뒷덜미를 발로 가격했다.
빠각, 소릴 내며 목이 꺾인 남자는 기절했다.
다음은….
“더럽게.”
축축하고 미끈거리는 옷을 내려다보며 인상을 찌푸린 그녀가 택시로 다가갔다. 막 뒷문을 열고 도망치려던 남자가 공포에 질린 얼굴로 몸을 떨기 시작했다.
“자, 자, 자, 잘못했…!”
“뭘.”
“그, 그게 술을 마셨어요! 살려 주….”
“심신미약 상태의 성범죄는 가중처벌 되는 거로 법이 바뀌었는데…. 너넨 뉴스도 안 보지?”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이젠 경기를 일으키듯 몸을 떨며 호흡곤란까지 일으킨다. 축 처진 흉물스러운 성기와 시퍼렇게 죽어 버린 얼굴을 보자, 제 뒤에 사정하던 감각이 떠올라 입에 담지 않기로 했던 욕지거리가 치민다.
“죽일까?”
“사, 살려 주…!”
“무서워? 걱정 마. 한국 경찰이 너네 살릴 거거든. 근데, 개인적인 부탁이 있어. 제발 좆은 내놓지 말고 수납하고 다녀. 응? 흉해, 아주.”
순간, 멀리서 들려오는 경찰차 사이렌 소리.
그녀의 표정이 구겨졌다.
하나는 구세주라도 만난 듯 환희에 찬 남자의 얼굴을 축구공처럼 발로 걷어찼다.
뻑, 소리와 함께 턱이 돌아간 남자가 천천히 옆으로 쓰러진다. 아동과 노인, 사회적 약자를 대상으로 하는 범죄는 소멸되어야 한다.
이어 타이어 짓쳐지는 소릴 내며 경광등을 매단 승합차가 요란하게 멈춰섰다.
“이하나! 아이, 씨벌. 죽이지는 말랬지!”
승합차에서 뛰어내린 전유철이 소리쳤다.
오늘도 참 험악하게 생긴 남자였다. 키가 크고 몸도 좋은데, 그게 과하다. 마초남의 표본처럼 생긴 전유철은 종종 강력계 형사가 아니라 조직폭력배 간부처럼 보였다.
하나는 길길이 날뛰는 전유철에게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안 죽였어요. 죽이지 말래서.”
“새끼야! 이게 죽인 거지!”
“저, 술 마셨잖아요. 이 정도면 심신미약으로 인한 과잉방어. 정당방위란 거 압니다.”
“야야, 됐고. 119 불러. 빨리!”
뒤따라 도착한 다섯대의 경찰차에서 내린 형사들은 피떡이 된 범인들을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수갑이 채워진 범인들은 구급차가 올 때까지 옴짝달싹 못 하고 흙바닥에 드러누워 파들거렸다.
순식간에 범죄 현장이 된 주변은 모 건설사의 로고가 그려진 공사장이었다. 유치권행사로 인해 한동안 건설이 중단되어 버린.
그러니 아무도 없었지.
하나는 전유철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대뜸 그가 입은 셔츠를 가리켰다.
“벗어요, 선배.”
흠칫 놀란 전유철이 가슴을 가리며 그녀를 위아래로 훑는다.
“너, 이거 성희롱이다?”
“예예, 벗어요. 아, 빨리. 찝찝해.”
“대체 왜!”
하나는 홱 돌아서서 자신의 셔츠를 가리켰다.
“저 새끼가 쌌어요.”
“이런, 개 씹…!”
“이러고 갈 수는 없잖아요. 뭐, 가자마자 샤워하긴 할 거지만.”
전유철은 온갖 욕설을 퍼부어대며 셔츠를 벗었다. 하나는 그가 벗어 던진 셔츠를 받아 들곤 피식 웃었다.
그녀는 택시로 가, 가방 앞주머니에 꽂아 둔 휴대 전화를 꺼냈다. 그러곤 여전히 녹음 중인 파일을 정지시켜 전유철의 휴대 전화에 전송했다.
“증거예요. 피해 현장에서 수집된 녹취. 칼로 협박했으니 살인 미수에 강도, 내 몸에 사정했으니 추행과 협박까지. 다 들어있어요.”
“헐, 와중에도 다 녹음한 거냐?”
“증거 불충분으로 빠져나올 일 없게 하는 거예요. 내 눈에 다시 띄면 죽여 버릴 거라서.”
셔츠를 갈아입기 위해 구석진 곳으로 향하는 그녀의 뒷모습을 멍하니 보던 유철의 동료들이 기다렸다는 듯 질문을 쏟아냈다.
“누굽니까? 정말 팀장님 후배예요?”
“배우 아니었어요?”
“혹시, 다른 팀에서 지원 나온 거예요? 저분 혼자 이렇게까지 만들었다고요? 헐.”
후배 놈들의 얼굴은 술이라도 한잔한 것처럼 벌게진 채였다. 어지간한 험한 꼴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던 강력계 형사들이 보기에도 이하나는 특이했다.
특이한 정도가 아니라, 기가 찰 정도.
상의를 탈의한 채 담뱃불을 붙인 유철이 피식 웃으며 진지하게 경고했다.
“야. 무슨 생각을 하든 자윤데, 쟤랑은 엮이려고 하지 마라. 이하나랑 스코프로 눈 마주친 인간 중 살아 있는 놈 한 명도 없으니까. 잊지 말고.”
그러곤 커다란 덩치와 어울리지 않게 소름 돋은 팔을 쓸어내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저건, 사람이 아니야. 병기지, 병기. 살인 병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