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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별이 뜨는 밤 (131)화 (13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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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1

    나의 귀인.

    “인애대군을 도와 황궁으로 쳐들어가셨다는 게 사실입니까? 이제 우리는 모두 죽은 목숨입니까?”

    수십 명의 하인이 채선의 입만 바라보았다. 송하가 움직이지 않는 고개를 삐걱삐걱 돌렸다. 채선은 표정 없는 얼굴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순간, 송하는 그녀가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성공할 리가 없습니다. 인애대군의 사병으로 황제 폐하와 맞선다니요? 계란으로 바위 치기입니다! 아직 아무 소식이 당도하지 않은 걸 보면, 분명 실패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모두 죽은 목숨입니다!”

    석이 아범의 말이 애써 누르고 있던 채선의 불안감을 건드렸다. 그의 말처럼 도성에서는 어떤 소식도 도착하지 않았다.

    전갈을 보낼 수 없는 상황에 처한 것일까.

    그녀를 보는 하인들의 눈동자가 슬슬 원망스러운 빛을 띠기 시작했다. 왜 안 그렇겠는가. 주인이 저지른 짓 때문에 아무 죄도 없는 아까운 목숨이 날아갈 판인데.

    “다들 돌아가라! 이게 무슨 짓인가!”

    도영이 엄한 목소리로 그들을 나무랐다. 흠칫, 놀랐던 석이 아범이 다시 눈을 부라리며 어깨에 힘을 줬다.

    도영의 손이 허리춤에 찬 검으로 향했다.

    “제 발로 돌아가지 않겠다면…….”

    그의 목소리가 협박성을 띨 때, 채선이 한 손을 들어 도영을 만류했다. 그녀가 차분한 눈으로 그들을 응시했다.

    “석이 아범의 말은 사실이네.”

    “!”

    짧은 술렁임이 지나갔다. 

    혹시라도 유언비어는 아닐까, 간절하게 빌던 하인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다. 그들은 두려움과 체념, 그 중간쯤에 서서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송하 역시 하얗게 질린 낯으로 채선을 보았다. 그녀가 나직하나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 떠날 사람은 지금 떠나게.”

    “!”

    일순, 하인들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들은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었다는 듯,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채선이 분명한 목소리로 뒷말을 이었다.

    “허나, 이것만큼은 명심하게. 은원군께서는 역도가 아니시네. 현 황제가 선 황제 폐하를 독살한 증거가 있네. 은원군께서는 반역을 꾀한 자를 처단하고, 그분의 자리를 되찾으려는 것일세.”

    “!”

    하인들이 다시 한번 숨을 삼켰다. 그들은 짧은 순간, 하늘과 땅이 뒤바뀌는 경험을 몇 번이나 했다. 눈앞이 핑핑 돌고,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물론, 성공과 실패를 가늠할 수 없는 일이지. 어쩌면 석이 아범의 말처럼 실패할 확률이 더 높은 일일지도 모르네. 그리고 실패한다면…….”

    누군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네.”

    쥐 죽은 듯한 고요가 내려앉았다. 마치 살얼음이 언 것 같은 싸늘한 침묵이었다. 채선이 그들에게 차례로 시선을 주었다. 그녀는 물러서지 않으려는 듯,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러니 떠나고 싶은 이들은 떠나도 좋네. 혼자 목숨이 아닌 것을 알고 있어. 가족들을 지켜야 하는 것 또한 알고 있네. 설령 자네들이 이대로 도망간다 해도 죄를 묻지 않을 터이니, 떠나고 싶은 이들은 떠나게.”

    또다시 분위기가 술렁거렸다. 그들은 채선의 입에서 떠나도 좋다는 말을 들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하인들이 당황한 눈으로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막상 떠나라고 하자, 선뜻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은원군에 대한 충성심일 수도 있었고, 군대부인에 대한 연민일 수도 있었다. 혹은 새로운 곳에서 시작할 미래에 대한 두려움인지도 몰랐다.

    그들은 쉬이 돌아서지 못하고 이리저리 눈치만 살폈다.

    “부인.”

    도영이 그녀를 불렀다. 그러나 채선은 진작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둔 듯 태연하게 미소 지었다.

    하인들에게 충성을 강요할 생각은 없었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고, 죽는 것보다 사는 게 나았기 때문이다.

    “부인이 떠나라 하시니…….”

    “그렇다고 나 살자고 갈 수 있는가. 부인께서 여기 계시는데.”

    “그건 그렇네만, 내 처자식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여기서 죽을 수도 없지 않나.”

    하인들이 한마디씩 하자, 앞뜰은 금세 웅성거리는 소리도 뒤덮였다.

    눈치를 보던 하인 중 몇 명이 슬그머니 등을 돌렸다. 또 다른 이들은 남겠다고 선언했고, 나머지 이들은 결정을 내리지 못한 얼굴로 우왕좌왕했다.

    채선이 송하에게 시선을 주었다.

    “너도 짐을 싸거라.”

    “부인.”

    송하가 허를 찔린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 송하의 동그란 얼굴 위로 놀라움과 원망, 서러움, 굳은 결의 같은 것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네게는 돌봐야 할 어린 동생들이 있지 않느냐.”

    채선의 부드러운 재촉에 그녀는 서운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툭, 튀어나온 입술 사이로 부루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무슨 말을?”

    “주인님 덕분에 저희 집이 동네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될까 봐 두렵다구요.”

    “…….”

    “더 이상 동생들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제 배곯을 일은 없어요.”

    “하지만 송하야…….”

    “그러니 끝까지 부인의 곁을 지키겠습니다.”

    그런 대답을 들을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 채선이 당혹스러운 얼굴을 했다. 송하가 입을 삐죽거렸다.

    “설마 제가 부인을 버리고 도망이라도 갈 줄 아셨습니까? 그렇다면 참으로 서운합니다. 저를 그 정도로 여기셨다니. 제가 아니면 누가 부인의 머리에 묻은 새똥을 닦아준답니까?”

    “나는 네가…….”

    “여기서 이러지 마시고, 얼른 고래나 보러 가요.”

    그렇게 말하며 송하가 채선의 팔을 잡아끌었다. 방금 전까지 고래는 무슨 고래냐고 투덜거리던 그녀가 말이다.

    남기로 한 하인들은 한층 차분한 얼굴로 돌아섰다. 떠나는 이들의 몫까지 일을 하려면 한가하게 잡담이나 나눌 시간은 없었다. 

    내일 죽는다고 해도, 오늘은 일을 해야 하는 게 그들의 팍팍한 삶이었기 때문이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채선이 눈매를 일그러뜨렸다. 그녀는 울음을 참는 것처럼 입술을 깨물었다.

    남는 이들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저들을 위해서라도 부디 익제가 성공하길 바랐다. 

    그의 어깨에 얹어진 짐이 무거웠다. 그것은 그녀가 대신 짊어져 줄 수 없는 짐이었다.

    채선은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감정을 추슬렀다. 그녀가 고개를 돌려 옆에 있는 도영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친 그가 가벼운 미소를 흘렸다.

    “설마 제게도 도망가라 하시진 않겠지요? 저는 주군의 명을 따를 뿐입니다.”

    “알고 있소.”

    조용히 미소 지은 그녀가 나직하게 덧붙였다.

    “염치없지만 잘 부탁하오.”

    그 말을 끝으로 채선이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사박사박, 시들어 말라버린 풀이 발밑에 밟혔다.

    “어서 오셔요, 어서요.”

    한발 앞에 있던 송하가 그녀를 재촉했고, 도영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세 사람은 곧장 바다로 향했다. 며칠 동안 그랬던 것처럼 오늘도 어김없이.

    그것은 마치 하나의 의식 같았다.

    “추우시면 말씀하셔요.”

    이제야 고래를 보고 싶다던 채선의 말뜻을 짐작한 송하가 그녀의 옷깃을 단단히 여미며 당부했다. 

    춥다고 어리광을 부리기엔 과한 복장이었다. 담비 털로 만든 외투를 걸친 덕에 등줄기에서는 땀이 날 지경이었다.

    하지만 송하는 그것으로도 성에 차지 않는지 연신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채선이 고맙고 미안한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를 뿌릴 것처럼 구름이 낮게 깔려 있었다. 두루마리 구름이다. 해는 보이지 않았다. 사방이 어두컴컴했다.

    강한 돌풍이 불었다. 사나운 파도가 발밑까지 밀려왔다 쓸려나갔다. 갈매기 한 마리가 수면 위를 미끄러지듯이 날아갔다. 

    왠지 모르게 불길한 기분이 들던 찰나.

    “앗!”

    채선이 나직한 탄성을 터뜨렸다. 그녀는 동그란 눈을 한껏 크게 떴다. 송하가 소맷자락을 뒤적이며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왜 그러셔요? 또 갈매기 똥을 맞으셨어요? 어디, 제게 보여주셔요.”

    “그게 아니라…….”

    채선은 쉬이 말을 잇지 못하고 멍하니 입을 벌렸다. 그녀의 동공이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커졌다.

    “그럼요?”

    “저길 보렴.”

    멈칫멈칫, 손가락을 들어 올린 그녀가 바다 한가운데를 가리켰다. 

    “저기 뭐가 있다고…… 앗!”

    심드렁하게 고개를 돌리던 송하가 두 눈을 부릅떴다. 

    수평선 아래에 커다란 물고기가 헤엄치고 있었다. 이렇게 먼 거리에서도 선명하게 보이는 걸 보면, 정말로 덩치가 집채만 할지도 모르겠다.

    느릿하게 헤엄치던 고래가 별안간 몸을 솟구쳤다. 회색 고래가 수면 위로 온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물보라가 쳤다. 흰색 포말이 산산이 부서졌다. 등에서 굵은 물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고래가 다시 바다 아래로 반쯤 몸을 숨겼다.

    풍덩.

    그 당당하고 여유로운 모습은 마치 바다의 제왕 같았다.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존재.

    “……고래다.”

    채선의 잇새에서 망연한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그토록 원하던 고래를 봤지만, 감격은 오래가지 않았다. 곁에 없는 누군가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채선의 눈매가 이지러지던 그 순간.

    “고래군. 고등어보다는 배와 닮지 않았소?”

    “!”

    채선의 고개가 휙, 하고 돌아갔다. 믿을 수 없는 것을 본 듯, 그녀의 눈동자가 한계까지 벌어졌다.

    “아…….”

    익제가 거기 있었다. 무심하게 바다를 응시하던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익제와 그녀의 눈이 마주쳤다.

    익제가 눈매를 구부리며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함께 고래를 보자던 약속을 지키러 왔소.”

    “익……!”

    그를 부르려던 채선이 별안간 입을 다물었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왈칵,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그래서 그녀는 비어져 나오는 흐느낌을 꿀꺽꿀꺽, 삼켰다.

    평소의 말끔한 모습은 아니었다. 포의 밑단과 소맷자락이 찢어졌고, 옷과 목덜미는 말라붙은 핏자국으로 엉망이었다. 

    머리카락은 여기저기 뻗쳤고, 머리 위에는 흙먼지가 뿌옇게 내려앉아 있었다.

    지저분한 몰골의 그가 더없이 부드럽게 웃었다. 그가 채선을 향해 두 팔을 뻗었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더러운 그의 품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이런. 또 울리고 말았군.” 

    익제가 곤혹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으아아앙, 채선의 잇새에서 대성통곡이 터졌다. 그간 참았던 울음이 무너진 둑처럼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익제가 눈매를 누그러뜨리며 웃었다. 그는 두 눈을 지그시 감으며 그녀의 향기를 들이마셨다. 커다란 손이 마치 그녀를 달래듯, 느릿하게 등을 쓸어내렸다.

    한참을 울던 채선이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익제의 뺨을 감쌌다. 그녀가 간신히 울음을 참으며 말했다.

    “괜찮, 습니다.”

    밑도 끝도 없는 그 말에 익제가 한쪽 눈썹을 스윽, 밀어 올렸다. 무엇이 괜찮느냐고 묻듯이.

    “제가 익제님을 먹여 살리겠습니다.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깊은 산속에 집을 지어요. 약초를 캐고, 삯바느질을 하여 익제님을 책임지겠습니다.”

    “음?”

    익제가 난감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한발 늦게 도착한 원진이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그러게 의관은 정제하고 가시라니까요. 뭐가 급하다고 거지꼴을 하고 뛰어가셨는지. 그러니 군대부인께서 오해를 하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오해?

    채선이 두 눈을 크게 뜨며 익제를 보았다. 

    그제야 전후 사정을 눈치챈 익제가 큭큭, 하는 웃음을 흘렸다. 그러니까 제 몰골을 보고 역모가 실패했다 생각한 그녀가 둘이서 산속에 숨어 살자고 달콤한 청혼을 한 모양이다.

    그녀가 먹여 살릴 테니 아무 걱정도 말라고. 

    설령 그가 모든 것을 잃는다고 해도, 그녀는 자신의 손을 놓지 않을 터였다. 그것을 확인한 순간, 그의 마음이 온전히 채워졌다.

    애틋한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본 익제가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선황 폐하를 독살한 극악무도한 무리를 모두 잡아넣었소. 황제와 그 일가도 구금이 되어 있고. 다시 말해, 무사히 내 자리를 되찾았단 말이오.”

    “!”

    “돌아가 봐야 하오. 도성의 분위기가 어수선하니, 내가 가서 마침표를 찍어야지. 부인이 잠도 못 자고 걱정할까 싶어 잠시 얼굴만 보고 가려고 이백중에게 뒤를 맡기고 달려온 참이오. 지금 바로 출발해야 하오.”

    “아!”

    마침내.

    질끈 감았다 뜬 채선의 눈가에 또다시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서서히 부풀던 눈동자가 또르르, 굴러떨어졌다. 

    익제가 그런 그녀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

    그의 시선이 채선의 어깨 너머, 푸른 바다를 향했다. 회색 고래는 아직도 수평선 위를 느리게 헤엄치고 있었다. 

    이제야 비로소 모든 것이 끝났다는 실감이 들었다. 치열하고 참혹했던 순간이 모두.

    그와 동시에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 

    그에겐 이제 새로운 세상이 펼쳐질 터였다. 하지만 두렵진 않았다. 그의 곁엔 그가 보지 못하는 세상을 조잘조잘 떠들어대는 또 하나의 세상이 있으니.

    그때, 두루마리 구름의 한가운데가 벌어지며 그 사이로 황금빛 햇살이 쏟아져 내렸다. 

    바다 위를 물들이는 태양 빛은 새로운 제왕의 탄생을 예고하듯, 그 어느 때보다 장엄하고 찬란했다.

    “…….”

    그의 시선을 눈치챈 채선이 덩달아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말없이 고래만 바라보았다. 

    채선이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고래의 등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줄기 사이로 언뜻 희미한 무지개가 어른거린 듯싶었다.

    익제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그의 잇새로 조용한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나의 귀인.”

    그의 입술이 채선의 입술과 맞닿았다. 채선은 가만히 두 눈을 감았다. 

    쏴아아, 자그락.

    파도가 밀려오고, 모래알이 쓸려가는 소리가 채선의 귓속을 가득 채웠다. 그날의 입맞춤은 여느 때와 같이 조금 짜고, 또 조금 달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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