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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별이 뜨는 밤 (130)화 (13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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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0

    다들 입을 다물라!

    저벅저벅.

    익제는 거침없는 걸음으로 편전의 복도를 가로질렀다. 그의 등 뒤로 원진과 효명, 이백중이 차례로 따라왔다.

    누구도 그들의 앞길을 막지 않았다. 미처 도망가지 못한 궁인들이 겁에 질린 얼굴로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그들이 덜덜 떨며 살려달라고 빌었으나, 익제는 궁인들에겐 시선도 주지 않고 편전을 향해 나아갔다. 그런데 바로 그때.

    벌컥.

    편전의 문이 열렸다. 환관과 함께 헐레벌떡 나오던 사내가 앞에 있는 익제를 보고는 우뚝,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황제였다.

    “서두르십시오, 폐…….”

    애면글면하며 앞장서던 환관이 황제의 기척에 등을 돌리다 익제를 발견하곤 새파랗게 얼어붙었다.

    아마도 황제는 인애대군이 반란을 일으켰단 소식을 진작에 전해 들었을 것이다. 권력을 사이에 둔 형제간의 다툼은 흔한 일이 아니었지만, 그리 드문 일도 아니었다.

    어차피 황제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누가 이기든, 황제의 목에 칼끝을 들이대지는 않을 터였다. 

    그는 사자가 절벽 위에서 새끼를 떨어뜨리듯, 이 싸움의 승자에게 양위를 해야겠다는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어쩌면 이것은 황제가 되기 위한 마지막 시험인지도 몰랐다.

    남들 위에 서는 황제는 비정해야 했다. 옥좌를 향한 야욕도 가지고 있어야 했다. 광휘로운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라면 형제의 목숨도 앗을 수 있어야 했다.

    바로 자신처럼.

    그런데 인애대군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태자는 태자구나, 황제가 제법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 나라를 이끌 자가 그 정도 재목은 되어야지, 하며 웃음을 터뜨렸던 것도 같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태자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를 죽인 것이 은원군이란 소식도 거의 동시에 도착했다.

    그제야 황제의 안색이 변했다. 

    은원군, 그의 조카이자 선황의 아들.

    단순히 인애대군의 조력자가 아니었던가? 이 모든 일의 배후에 그가 있었던 것인가?

    황제의 머리가 바쁘게 굴러갔다. 금군이 무너졌다는 소식에 황제가 황급히 자리를 떨치고 일어났다. 일단은 몸을 피해야 했다. 그런데 문 앞에서 익제를 마주쳤다.

    툭.

    원진과 효명이 손에 든 것을 황제에게 던졌다. 태자와 인애대군의 시체가 두 눈을 부릅뜬 채 그를 응시했다.

    “…….”

    경악으로 가득 찬 침묵이 흘렀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지만, 비명을 지르는 것보다 선명한 공포가 느껴졌다.

    “이게 무슨 짓인가.”

    황제는 황제였다. 궁인들이 두려워 벌벌 떨고 있는 와중에도 그는 평소의 위엄을 잊지 않았다. 그가 가을 서리처럼 차갑고 매서운 눈으로 익제를 노려보았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환관들과 몇 명의 금군들이 황제를 호위하듯 에워쌌다.

    “폐하를 지켜라!”

    “여기가 어디라고 흙발로 짓밟느냐!”

    “간악무도한 반역자들에게서 폐하를 보호하라!”

    환관의 호통에 익제가 우스운 농담을 들었다는 듯 슬며시 입꼬리를 당겼다.

    “간악무도한 반역자.”

    그가 가늘게 뜬 눈으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하루아침에 이런 신세가 되리라는 걸 예상이나 했을까. 황제의 얼굴은 당혹스러운 빛을 띠고 있었다.

    그 순간, 익제의 등 뒤가 소란스러워졌다. 황제의 눈동자가 그의 어깨 너머를 향했다. 익제 역시 천천히 등을 돌렸다.

    무인들 손에 끌려오는 대신들이 보였다. 그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겁에 질려 있었다. 

    험하게 다루어졌는지, 혹은 의관을 정제할 틈도 없었는지, 다들 봉두난발에 옷고름은 미처 여미지도 못한 채였다.

    “흐익!”

    누군가 비명을 질렀다. 무슨 일인가, 시선을 돌리던 대신들이 태자와 인애대군의 사체를 발견하곤 숨죽인 신음을 삼켰다.

    그들은 서로의 면면을 바라보았다. 모든 대신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비로소 그들은 자신이 왜 이곳에 끌려왔는지 짐작한 듯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익제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편전 안으로 들어갔다. 무인들이 마치 짐승을 몰 듯, 황제와 대신들을 몰았다. 

    그들은 도망갈 곳을 찾지 못하고 느릿느릿 뒷걸음질을 치며 편전 안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무인들이 우악스럽게 대신들의 머리를 눌렀다. 신료들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익제에게 머리를 꿇고 절을 했다. 

    황제가 고압적인 눈으로 익제를 쏘아보았다. 그의 잇새에서 사나운 호통이 터졌다. 

    “네 놈이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아느냐!”

    “하하하.”

    별안간 익제가 웃음을 터뜨렸다. 누가 봐도 무사하지 못할 것은 그인데, 꼴에 황제라고 위엄 있는 체하는 모습이 우스웠던 탓이다.

    황제가 모멸감을 느낀 듯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지금이라도 군사를 물려라. 그러면 목숨만은 살려주마.”

    “목숨이라.”

    익제가 나직하게 중얼거리는 말에 황제가 그를 회유하듯 부드럽게 말했다.

    “네가 저지른 짓은 반역이다. 그러나 네가 인애대군의 꾐에 넘어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니 이쯤에서 물러나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내 부친을 독살하고 황제의 자리를 차지한 건 반역이 아니란 말입니까?”

    “!”

    황제가 두 눈을 부릅떴다. 익제는 여유로운 얼굴로 빙글빙글 웃었고, 황제의 얼굴은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그게, 무슨 말이냐.”

    “이제 와서 모른 척을 하시겠다?”

    익제의 시선이 옆으로 이동했다. 바닥에 납작 엎드린 대신들의 머리통이 보였다. 황제 역시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들의 면면을 확인한 황제가 끄응, 하는 침음을 흘렸다. 비로소 신료들의 조합을 눈치챈 듯. 

    그러나 쉽게 수긍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게 무슨 소리냐.”

    황제의 모르쇠에 익제가 다시 한번 피식, 하는 웃음을 흘렸다. 대신들은 두 사람의 눈치를 살피느라 여념이 없었다. 간사한 머리통들이 바쁘게 굴러갔다.

    그때, 한 신료가 고개를 쳐들고 버럭 고함을 질렀다.

    “은원군은 어찌하여 근거도 없는 뜬소문으로 폐하와 우리를 이리 박해한단 말이오!”

    “근거도 없는 뜬소문이라?”

    “선 황제 폐하께서 이 사실을 아시면, 지하에서도 통곡하실 것이오! 선 황제 폐하께서 붕어하시기 직전, 현 황제 폐하께 당부하신 말씀을 잊으신 것이오? 나라와 은원군을 부탁한다는 유언을 남기셨고, 폐하께서는 조카인 은원군을 아들처럼 대하셨소!”

    “하하하하!”

    익제가 또다시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쥐 죽은 듯 고요한 편전에 울려 퍼지는 웃음소리는 어딘지 섬뜩한 면이 있었다. 그 괴괴한 분위기에 대신은 저도 모르게 움찔, 어깨를 떨었다.

    뚝.

    웃음소리가 그쳤다.

    그곳에 교교한 적막이 들어찼다. 

    익제가 가슴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그 종이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대신들이 잔뜩 긴장한 눈으로 익제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았다.

    펄럭.

    그가 종이를 펼쳤다. 그리고 대신들이 볼 수 있게 손을 뻗었다. 미간을 찌푸린 채 종이를 응시하던 대신들의 얼굴이 이내 흙빛으로 변했다.

    “저, 저건!”

    “저것이 어떻게 은원군의 손에!”

    “끄응.”

    누군가는 경악했고, 누군가는 체념했다. 익제는 느긋하게 고개를 돌려 황제를 보았다.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궁금했던 탓이다.

    황제는 처음과 다름없는 얼굴이었다. 그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고,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치명타를 입은 순간이었지만, 황제는 뻔뻔했다.

    “그것이 뭐 어쨌다는 것이냐?”

    “내 부친을 독살하려 음모를 꾸며놓고도 당당하군. 역시 그 정도 배짱은 있어야 황제의 자리에 앉는 것인가?”

    익제가 조소를 흘렸다. 그가 서슬 퍼런 눈으로 대신들을 둘러보았다.

    “하나, 둘, 셋, 넷…….”

    갑자기 숫자를 세기 시작하는 익제의 행동에 대신들이 영문을 알 수 없는 얼굴로 눈동자를 굴렸다.

    “모두 열셋이군.”

    반쯤 혼잣말을 중얼거린 그가 나른하게 입꼬리를 당겼다. 대신들은 저도 모르게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이중 딱 두 명만 살려주겠다.”

    “!”

    생각지도 못한 말에 대신들이 두 눈을 부릅떴다. 희미한 웃음기를 품은 익제의 목소리가 편전 안을 울렸다.

    “자신의 죄를 고하고 용서를 비는 자, 딱 두 명만 말이다. 그래, 굳이 말하자면 선착순이 되겠군.”

    “…….”

    자신의 죄를 고하고 용서를 비는 자.

    그 말은 역모를 인정하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실직고를 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대신들이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머리를 굴렸다.

    황제가 눈살을 찌푸리며 불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어떤 증거도 되지 못한다.”

    “모의만 하여도 그것이 반역이라는 걸 모르십니까? 저는 이 종이만으로도 이곳에 있는 이들을 모두 죽일 수 있습니다.”

    익제가 조용히 입꼬리를 당겼다. 그의 말이 옳았다. 역모는 실행을 하지 않고 계획만 해도 중죄에 해당한다. 본인은 물론이고, 구족까지 멸하는 게 역모의 대가였다.

    “다들 입을 다물라!”

    위기감을 느낀 황제가 엄한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모두가 입을 다물고 끝까지 발뺌을 하면 다 같이 살아날 방도가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한 사람이라도 입을 열면, 남은 이들은 빼도 박도 못할 역모자가 될 것이다.

    선착순 두 명.

    대신들이 불안한 눈으로 서로를 감시했다. 모두 함구한다는 건 서로에 대한 견고한 신뢰가 바탕이 되어야 했다. 

    만약 한 명이라도 이실직고를 한다면, 나머지 사람들은 한꺼번에 저승 구경을 떠나게 될 것이다.

    서로에게 그만큼의 신뢰가 있을까.

    대신들을 둘러보는 익제의 눈매가 재미있다는 듯 슥, 하고 가늘어졌다.

    ***

    “또 바닷가에 가시려구요? 그러다 탈 나셔요. 오늘은 집안에서 쉬시는 게 어떠셔요? 그놈에 고랜지, 노랜지는 코빼기도 안 보이는데. 정말로 그런 큰 물고기가 있겠어요? 아니, 어쩌면 더 먼 바다에 사는지도 몰라요.”

    송하가 채선의 뒤를 따라 섬돌 아래로 내려서며 종알종알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괜찮…….”

    괜찮다는 말을 하려던 채선이 삐걱, 하는 문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웅성거리는 목소리 뒤로 하인 수십 명이 처소의 문을 열고 들어서는 중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당황하고 겁에 질린 얼굴이었다.

    채선이 멈칫, 그 자리에 걸음을 멈추었다. 도영이 스윽, 앞으로 나서며 그들과 채선 사이에 끼어들었다.

    송하가 의아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무슨 일이셔요? 이렇게 떼로 몰려오시다니요? 군대부인이 놀라시기라도 하면 책임지실 거여요?”

    그녀의 잔소리는 누구의 귀에도 닿지 않았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지던 그때, 맨 앞에 서 있던 석이 아범이 불쑥 입을 열었다. 

    “군대부인!”

    우렁우렁한 목소리에 송하가 깜짝 놀랐다. 채선을 돌아본 그녀가 석이 아범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군대부인께서 홑몸도 아니신데, 그리 큰소리를…….” 

    그러나 송하는 미처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석이 아범의 굳은 표정에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느껴졌던 탓이다. 그녀가 채선과 하인들을 번갈아보며 눈치를 살폈다.

    “군대부인! 주인님께서 반역을 일으키셨다는 게 정말입니까?”

    그의 날카로운 물음이 마른하늘을 찢었다. 까악, 까악, 어디선가 까마귀 울음소리가 들렸다. 

    방금까지 웅성거리던 소리도 사라지고, 깨어질 듯 날카로운 침묵만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송하는 두 눈을 부릅뜬 채 하얗게 굳었다.

    “그게 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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