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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별이 뜨는 밤 (129)화 (129/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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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9

    고래.

    동시에 풍오가 장수의 옆으로 돌아 들어갔다. 힘을 너무 쏟은 탓에 아직 검을 거두지 못한 장수가 뒤늦게 자신의 실책을 깨닫고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익제의 검이 무자비하게 공기를 갈랐다.

    “!”

    마침내 그의 검이 장수의 목을 꿰뚫었다. 익제가 검을 잡아당겼다. 무장의 목에서 피가 분수처럼 터졌다.

    쿵.

    거구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그 광경이 아주 느릿하게 망막에 각인되는 그 순간.

    “우아아아아!”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졌다. 사병들의 기세가 다시 올라갔다. 그 또한 익제의 노림수였다. 명승부 끝에 거머쥔 승리는 아군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마련이다.

    순식간에 분위기를 반전시킨 익제의 모습에 태자가 눈살을 찌푸렸다. 익제 역시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검을 들고 그를 마주 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뒤엉켰다. 그 사이로 싸늘한 냉기가 흘렀다.

    타박타박.

    태자가 느리게 말을 몰았다. 스무 보 정도의 거리를 두고 대치하듯 마주 선 두 사람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제라도 돌아가는 것이 어떻겠는가.”

    비명과 고성이 난무했지만, 태자의 목소리는 또렷하게 익제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생각에 잠긴 듯하던 태자가 문득, 표정을 굳혔다. 그의 잇새로 서늘한 목소리가 떨어졌다.

    “설마.”

    반신반의하는 눈동자가 익제를 향했다.

    “이 모든 것이 네 계획인가.”

    “…….”

    “인애대군을 움직여 반란을 도모하고, 내 손으로 아우를 죽이는 것까지. 모두 네가 계획한 일인가?”

    익제의 무심한 표정을 보고서야 자신의 추측이 옳았다는 걸 눈치챈 태자가 싸늘한 냉소를 흘렸다.

    “교활한 자로군.” 

    익제가 가볍게 눈썹을 까딱였다. 그리고 피비린내 나는 전장과는 어울리지 않는 나른한 미소를 흘렸다. 

    “광무대군을 이용해 문효대군과 효성대군을 죽이고, 자객을 보내 광무대군의 숨통까지 확실히 끊어놓은 태자 전하만 하겠습니까?”

    태자가 미간을 좁혔다. 그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미심쩍은 시선이 일그러졌다.

    “고작 이 정도의 사병으로, 역모가 성공할 줄 알았던가.”

    “길고 짧은 건 대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대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게 있는 법이지.”

    그때였다. 

    “?”

    문득, 바깥이 소란스러워졌다. 거센 말발굽 소리와 사람들의 발소리, 병장기가 땅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셀 수 없이 많은 이들이 다가오는 게 틀림없었다.

    “하하하.”

    태자가 목을 젖히고 커다랗게 웃었다. 표정이 없는 그치고는 드물게도 유쾌한 얼굴이었다.

    “네가 여태 상대한 이들은 황궁에 있는 금군이다. 도성에는 그 수 배에 달하는 중앙군이 있지. 이제야 그들이 도착한 모양이군. 너는 독 안에 든 쥐다.”

    익제가 눈매를 좁히며 태자의 등 뒤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중앙군의 군복을 입은 병사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방금까지 기세가 드높던 사병들이 주춤거리며 겁먹은 얼굴을 했다.

    ***

    “춥습니다. 이만 들어가셔요.”

    바닷바람에 질끈, 눈을 감은 송하가 어깨를 움츠리며 채선을 재촉했다. 그러나 모래사장 위에 선 채선은 돌부처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바다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너울거리는 파도와 저 멀리 있는 수평선, 밀물에 쓸려가는 모래알까지. 

    채선은 한시도 쉬지 않고 바다의 모든 것을 눈에 담았다.

    도영이 한 걸음 떨어진 곳에서 그런 그녀를 지켜보았다. 입술을 삐죽거린 송하가 발을 동동 구르며 재차 물었다.

    “도대체 뭘 그리 열심히 보시는 거여요? 이곳에 서 계신 지 벌써 한 시진은 족히 된 것 같습니다. 이러다 풍한이라도 들면 어쩌시려고 그러셔요? 부인께서는 홑몸도 아니시잖아요.”

    길게 잔소리를 늘어놓던 송하가 바다로 시선을 던졌다. 아무리 봐도 채선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송하의 아랫입술이 다시 삐죽거렸다.

    짓궂은 바람에 채선의 잔머리가 이리저리 나부꼈다. 그러나 그것을 다정하게 넘겨줄 사람이 없었다. 

    채선은 먼 곳에 있는 수평선을 바라보며 조용하게 속삭였다.

    “고래.”

    “……고래요?”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아니고, 갑자기 고래라니?

    그 뜬금없는 대답에 송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채선이 시선은 여전히 그곳에 둔 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래를 보려고.”

    “아니, 고래를 보려고 여태 이렇게 서 계신 거라구요? 그걸 봐서 뭘 하실 건데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송하가 아랫입술을 내밀고 툴툴거렸다. 그러면서도 채선의 벌어진 옷깃을 여미는 걸 잊지 않았다. 

    그녀는 바람 한 점 들어갈 틈 없이 채선의 매무새를 단속하고 난 뒤에야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고래가 어떻게 생겼는지 보고, 익제님에게 얘기해 주려고 그런다.”

    “……예?”

    송하가 또다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몇 번이고 생각해도 영문을 알 수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아마 제가 모르는 뭔가가 있나 보다, 라고 생각한 송하가 시큰둥하게 물었다.

    “그게 그렇게 중요한 일이여요? 풍한에 걸려도 상관없을 만큼이요?”

    “응.”

    채선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송하는 더 이상 잔소리를 하지 못했다. 군대부인이 중요하다는데 고작 하녀 따위가 무슨 말을 할 것인가. 참새가 모르는 봉황의 큰 뜻이 있는 모양이지.

    “그럼 딱 일다경만 더 기다리는 거여요. 그러곤 바로 들어가셔야 해요. 더 이상은 저도 양보 못 해요.”

    채선은 그 말엔 대꾸를 하지 않고 묵묵히 바다만 바라보았다. 

    고래를 보고 싶었다. 오랫동안 뱃일을 한 어부도 평생에 몇 번 보지 못한, 집채보다 크다는 그 물고기를 보고 싶었다.

    그리하면 길운이 찾아올 것 같았다. 그녀가 기다리는 소식이 도착할 것 같았다. 아무 근거도 없는 믿음이었지만,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고래가 커다란 길운을 불러올 것 같다는 믿음.

    그래서 채선은 기도하는 마음으로 바다만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고래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불안함에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이대로 돌아서면, 행여 익제에게 무슨 불운이 생길지 알 수 없어 쉬이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채선의 입매가 꾹 다물어졌다. 바람이 자꾸만 그녀의 머리를 헝클어뜨리고, 치마를 들추었다. 그러나 그녀는 망부석이라도 된 양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

    태자는 웃음이 깃든 눈으로 익제를 보았다. 

    창을 맞대던 금군과 사병들이 일순, 움직임을 멈추었다. 중앙군을 확인한 금군들은 여유를 되찾았고, 반대로 사병들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렸다.

    꼼짝없이 죽는구나.

    상대가 되지 않는 숫자였다. 그들은 끝도 없이 밀려들었고, 그 뒤로 뿌연 흙먼지가 일었다. 인애대군의 사병들이 체념한 표정으로 들고 있던 칼을 늘어뜨렸다.

    툭.

    투욱.

    절망은 흡사 전염병처럼 빠르게 퍼져 나갔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까맣게 밀려든 중앙군 사이로 말을 탄 장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말 위에 앉아 있는 것이 자연스러운, 위풍당당한 풍채의 장수였다.

    하얀 수염이 바람에 나부꼈다. 천천히 주변 상황을 둘러본 그가 묵직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늦었습니까, 주군?”

    “이, 백중?”

    그의 얼굴을 알아본 태자가 눈살을 찌푸렸다. 은퇴한 장군이 어째서 이곳에 있는지 알 수 없다는 듯.

    이백중의 등 뒤에는 말을 탄 장수들이 여럿 있었다. 그들의 갑옷으로 보건대, 중앙군을 지휘하는 이들이 분명했다.

    어쩌면 도성에 돌아온 그가 반란군의 소식을 듣고 도우러 온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자, 납득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태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치하의 말을 꺼냈다.

    “이 공이 이리 와 주니…….”

    그러나 미처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등 뒤에서 익제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아니. 마침맞게 도착하였네.”

    “그렇습니까? 다행이군요.”

    “!”

    그 순간, 태자의 안색이 변했다. 

    인애대군의 역모에도 여유로운 모습을 유지하던 그가 처음으로 당혹한 표정을 지었다. 태자는 익제와 이백중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최악의 상황을 떠올렸다.

    이백중이 하늘을 찢을 만큼 큰소리로 외쳤다.

    “소장, 이백중! 도성의 중앙군을 모두 제압하고 은원군을 도우러 왔습니다!”

    “!”

    “우와아아아아!”

    다시 한번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사병들이 늘어뜨렸던 창을 치켜들며 마른하늘을 찔렀다. 

    이백중이 누구던가. 전장의 신이라 불리던 장군이 아닌가. 

    그가 자신의 편이었다. 이백중의 등 뒤에 있는 수많은 장수와 중앙군은 덤이었다. 사병들은 주군이던 인애대군의 죽음은 까맣게 잊은 채 이백중의 등장에 환호했다.

    이백중이 그들을 둘러보며 근엄한 목소리로 외쳤다.

    “현 황제는 선황제 폐하를 독살하고 그 자리를 차지한 간악무도한 인물이다!”

    “!”

    드넓은 황궁에 날카로운 침묵이 흘렀다. 사병, 금군 할 것 없이 두 눈을 크게 떴다. 그것은 태자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선황제 폐하의 아드님이신 은원군을 도와 역심을 품은 반역자들을 처단하고, 이 나라의 기틀을 바로 세울 것이다!”

    기다렸다는 듯 익제가 품에서 연판장을 꺼내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이것은 선황 폐하의 독살을 계획한 이들의 명부다! 나는 감히 선황 폐하를 독살하고, 황제의 자리를 차지한 반역자를 처단하기 위해 의로운 마음으로 궐기하였다! 누가 나와 함께 반역자들에게 정의의 철퇴를 가할 것인가!”

    “…….”

    고요한 적막이 안개처럼 발밑에 스며들었다. 공기가 질척해졌다. 익제는 자신만만한 눈으로 그들을 둘러보았다.

    미간을 찌푸린 태자가 “그게 무슨…….” 하며 입을 여는 찰나.

    “우와아아아아!”

    “반역자를 몰아내자!”

    사병과 중앙군들의 함성이 그곳을 뒤덮었다. 발밑이 흔들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 만큼 우렁찬 목소리였다.

    태자가 난감한 듯 입매를 일그러뜨렸다. 상황이 급반전했다. 방금까지 반역자이던 사병들은 순식간에 정의로운 군대가 되었다.

    그것만으로도 사병들의 기세는 하늘을 찔렀다. 금군들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돌아가는 상황을 예의 주시할 따름이었다.

    “태자 전하, 일단 몸을 피하시지요.”

    “일단 몸을 피하신 후 바깥의 중앙군와 합류하여 전열을 가다듬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호위무사들이 태자 주위를 동그랗게 에워싸며 그를 재촉했다. 

    그 순간, 눈짓을 주고받은 원진과 효명이 동시에 뛰쳐나갔다. 그들은 태자가 도망가게 놔둘 생각이 없었다.

    익제 역시 태자를 향해 말을 달렸다. 풍오는 마치 한 마리의 까마귀처럼 쏜살같이 내달렸다. 반대편에 있던 이백중도 기다렸다는 듯 말의 허리를 걷어찼다.

    당황한 태자의 호위들이 황급히 검을 휘둘렀다. 병사들은 미처 움직일 생각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그들의 난전을 지켜보았다. 

    십수 명이 사람들이 한 데 뒤엉켰다. 어찌나 움직임이 빠른지 눈으로 좇는 것조차 버거웠다. 그리고 마침내.

    “!”

    태자의 몸에 네 개의 검이 꽂혔다. 목과 가슴, 허리와 등.

    사방에서 꽂힌 검에 태자의 몸이 잠시 움찔거렸다. 그곳에는 마치 눈 내리는 밤처럼 숨 막히는 적막이 내려앉았다.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

    서서히, 태자의 몸이 기울었다. 두 눈을 부릅뜬 그가 말에서 굴러떨어졌다.

    쿵.

    “태자 전하!”

    호위무사의 경악성이 터졌다. 그와 동시에.

    “우와아아아!”

    사병과 중앙군이 함성을 터뜨렸다.

    우두머리를 잃은 병사는 오합지졸일 뿐이다. 그건 아무리 훈련을 받은 금군이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전세는 한 번 기울면 다시 되돌리기 힘들었다.

    금군들이 무기를 버리고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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