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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별이 뜨는 밤 (128)화 (128/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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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8

    피로 물든 권좌.

    텅 빈 방 안에서 이선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나른한 동작으로 떨어진 옷을 주워 입었다.

    “인애대군.”

    이선은 환관이 했던 말을 나직하게 읊조리며 천개 너머를 바라보았다.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역모가 일어나고, 반란군이 황궁을 침입했음에도 태자는 자신만만했다. 그의 손으로 직접 반란군을 처단하겠다고 호언장담했다.

    이선은 황궁 안에 이천 명에 달하는 금군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황궁 밖 도성에는 그 몇 배에 달하는 중앙군이 있을 터였다.

    인애대군의 사병이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없으나, 군권을 장악하고 있는 태자의 상대가 될 것 같진 않았다.

    이선은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걸치고 머리를 매만졌다. 힐긋, 그녀의 시선이 창밖을 향했다가 다시 거울로 돌아왔다. 거울 속 그녀가 희미한 미소를 그렸다.

    ***

    황궁은 순식간에 쑥대밭이 되었다. 어디선가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것은 마치 먹구름처럼 하늘을 자욱하게 뒤덮었다.

    익제는 황궁의 남과 북을 가르는 불길을 바라보았다. 불길의 북쪽에는 황제의 부인들과 궁녀들이 있었다. 애꿎은 여인들까지 전란에 말려들게 할 필요는 없었다.

    저 불이 꺼질 때쯤에는 모든 것이 끝나 있을 것이다. 까만 잿더미 위에 서 있는 것이 누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스스로 항복하는 이들은 죽이지 마라!”

    익제가 모두에게 들릴 만큼 큰소리로 외쳤다.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는 이들은 살려줄 것이다!”

    한 발 뒤로 물러선 인애대군과 달리 익제는 최전방에서 검을 휘둘렀다. 그는 풍오와 함께 황궁 안을 종횡무진했다.

    금군은 사방에서 쏟아져 나온 사병들의 공격에 당황했지만, 이내 지휘관의 명에 따라 체계적으로 응전하기 시작했다.

    제대로 훈련받은 이들은 갑작스러운 상황에서도 금세 노련하게 대처했다.

    캉, 카앙!

    날카로운 쇠붙이 소리가 마른하늘을 뒤흔들었다. 둘 중 누구도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양 진영의 실력이 엇비슷하다면, 승패를 가르는 것은 병사들의 사기다.

    인애대군의 사병은 물러설 곳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는 중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금군들의 기세가 조금씩 밀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이게 무슨 짓이냐!”

    금군들 뒤에서 휘황찬란한 갑옷을 걸친 태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모습에 사병들이 주춤했다.

    “형님.”

    그제야 뒤로 물러나 있던 인애대군이 말을 몰며 앞으로 나왔다. 두 사람은 대치하듯 서로를 마주 보았고, 치열한 전투는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금군과 사병들이 태자와 인애대군의 눈치를 살피며 슬금슬금 자신의 진영으로 한 발씩 물러섰다. 언제 깨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스스로 명을 재촉하는군. 목숨이 아깝지 않으냐?”

    태자의 물음에 인애대군이 비식, 입꼬리를 당겼다. 그는 싸늘한 눈으로 태자를 노려보았다. 

    “어차피 형님 손에 죽을 목숨이었지 않습니까?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거라면 살기 위해 발버둥 정도는 쳐보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태자의 눈동자가 선득하게 빛났다. 그가 더없이 싸늘한 목소리로 일갈했다. 

    “정 그렇게 원한다면, 네 소원을 들어주마. 형으로서 그 정도 아량이야 베풀 수 있지.”

    그 말과 동시에 태자가 말을 허리를 걷어찼다. 그는 한 손으로 고삐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 검을 뽑으며 곧장 인애대군을 향해 달려갔다. 

    그와 동시에 금군이 “우와아아!” 하는 함성을 지르며 태자의 뒤를 따랐다.

    “나를 보호하라!”

    인애대군이 겁에 질린 얼굴로 다급하게 외쳤다. 그의 호위무사들이 순식간에 인애대군을 에워쌌다. 금군의 대장과 부장들이 호위무사들을 뚫기 위해 검과 창을 휘둘렀다.

    난전이 펼쳐졌다. 아수라장이 있다면, 아마도 이런 모습이리라. 

    태자는 제게 날아오는 검을 피하며, 상대의 가슴에 검을 찔러 넣었다. 인애대군의 호위무사 하나가 피를 뿜으며 말에서 떨어졌다.

    아래에서는 사병과 금군들이 치열하게 맞부딪혔다. 사방에서 깡깡거리는 병장기 소리가 난무했다. 비명과 신음이 끝도 없이 울려 퍼졌다.

    푹, 푹.

    사람들이 고꾸라졌다. 사병, 금군 할 것 없었다. 찰나의 순간, 산 자와 죽은 자가 갈렸다. 살아남은 자들은 조금 더 살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타인을 죽여야만 내가 살 수 있는 곳, 그곳이 바로 전장이었다.

    “죽어라!” 

    익제는 제게 날아오는 창을 여유롭게 툭툭 쳐냈다. 공을 세우려 혈안이 된 금군 하나가 빈틈이 많은 동작으로 창을 찔러왔다. 

    익제는 허리를 젖혀 그의 창을 피하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의 목을 베었다.

    “컥.”

    금군이 말에서 떨어졌다. 등 뒤에서 다른 병사 하나가 “으아아!” 하는 기합을 넣으며 창을 휘둘렀다. 

    풍오가 뒷발을 찼다. 흑마의 거센 발길질에 나가떨어진 병사는 뼈가 부러졌는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익제는 잠시 검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금군의 시체가 산처럼 쌓였고, 사병의 피가 강처럼 흘렀다.

    자신의 병사는 아니었다. 태자의 병사와 인애대군의 병사였다. 그의 입장에서는 누가 죽든 손해는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많이 죽어 나갈수록 좋았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입안이 씁쓸했다. 익제의 눈동자가 고뇌하는 빛을 띠었다.

    피로 물든 권좌.

    세상의 모든 권력은 이름 없는 이들의 희생 위에 세워졌다. 

    불현듯, 채선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가 이 모습을 보았다면, 무슨 생각을 할까? 자신에게 실망한 표정을 지을까, 아니면 저를 두려워할까?

    익제의 눈매가 일그러지는 찰나.

    “으아아아!”

    말을 탄 장수가 곧장 익제를 향해 돌진했다. 잠시 상념에 빠져 있느라 방어가 늦었다. 익제가 낮게 혀를 찼다. 

    전장 한가운데에서 한눈을 팔고 있다니. 

    그가 난감한 표정으로 검을 드는 순간.

    깡!

    불쑥, 끼어든 검이 장수의 공격을 막았다. 눈동자를 돌리자, 무시무시한 기세로 검을 짓쳐들어가는 효명이 보였다. 

    일전에 자객에게 입은 부상이 모두 완치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익제를 지키기 위해 뛰어들었다.

    몇 번의 공방 끝에 효명이 장수의 말을 베었다. 말이 쓰러지며, 장수의 몸이 말 아래에 깔렸다. 효명은 옆에 있는 병사의 손에서 창을 빼앗아 그의 등을 내리찍었다.

    장수가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숨을 거뒀다.

    “괜찮으십니까?”

    효명이 거친 숨을 내쉬며 등을 돌렸다. 익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효명의 시선이 그의 등 뒤를 향했다.

    익제가 느릿하게 몸을 틀었다. 때마침 태자가 인애대군의 호위를 뚫는 데 성공했다. 그가 인애대군을 향해 달려들었다.

    “여봐라! 어서, 어서 나를 보호하라!”

    인애대군이 겁에 질린 목소리로 고함을 지르며, 허겁지겁 말을 몰았다. 그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호위무사들은 각자의 적을 상대하느라 그를 도와줄 여력이 없었다.

    인애대군이 말을 돌려 반대편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태자는 파죽지세로 사병들을 쓰러뜨리며 그를 뒤쫓았다.

    “하.”

    익제의 입에서 조소가 비어져 나왔다. 

    전장에서 등을 돌리고 도망치는 주군이라니.

    애초에 인애대군은 태자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는 사냥을 좋아하는 것치고 무예가 뛰어난 편은 아니었다. 고작해야 하인들이 몰아준 어린 짐승을 잡는 것이 전부였다.

    그에 반해 태자는 검에 망설임이 없었다. 

    “어떻게 한다.”

    익제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원진과 효명은 익제를 향해 달려드는 적들을 죄다 도륙 내는 중이었다.

    “도울까요?”

    그의 속내를 눈치챈 원진이 물었다. 태자의 손에서 인애대군을 구해낼까, 묻는 것이다. 잠시 생각하던 익제가 고개를 저었다.

    “되었다.”

    캉.

    원진은 창을 든 병사의 목을 베며 다시 익제에게 눈길을 주었다.

    푸륵, 풍오가 뒤에서 달려드는 병사를 향해 발차기를 날렸다. 흑마는 자신의 못된 성격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었다.

    풍오의 몸이 뜨끈하게 달아올랐다. 빠르게 질주하고 난 뒤처럼 꿈틀거리는 근육 위에서 하얀 김이 피어올랐다. 

    익제가 태자와 인애대군을 응시하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인애대군의 쓰임은 여기까지다.”

    “예.”

    그 말과 동시에, 태자의 검이 달아나는 인애대군의 등에 박혔다. 쑤욱, 날카로운 검이 갑옷 틈새를 비집고 깊숙이 박혔다.

    “으아아악!”

    인애대군의 잇새에서 비명이 터졌다. 그의 눈이 홉 뜨이고, 입이 벌어졌다. 

    익제는 무심한 눈으로 말에서 굴러떨어지는 인애대군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경련을 일으키듯 몸을 파들파들 떨던 인애대군이 문득,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와 익제의 눈이 마주쳤다. 인애대군이 다급하게 한 손을 뻗었다.

    “…….”

    무언가 움켜잡을 것처럼 그가 주먹을 말아쥐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의 손은 바닥으로 힘없이 떨어지고 말았다.

    황제의 둘째 아들, 그 고귀한 신분과는 어울리지 않는 죽음이었다. 반면, 그의 탐욕스러움에 어울리는 마지막이기도 했다.

    “이, 인애대군께서……!”

    “인애대군께서 돌아가셨다!”

    일순, 분위기가 술렁거렸다. 인애대군의 죽음을 확인한 사병들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우두머리를 잃은 병사는 오합지졸일 뿐이었다.

    태자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병졸들은 그들을 이끄는 자가 있을 때 비로소 그 빛을 발한다. 머리가 없는 손발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고 우왕좌왕했다.

    “우와아아아!”

    금군들의 기세가 더욱 올라갔다. 방금 전까지 팽팽하던 전투의 균형이 깨어졌다. 이대로면 태자가 사병들을 진압하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바로 그때.

    “물러서지 마라! 실패한 반란 뒤에 남은 것은 죽음뿐이다! 어차피 너희들은 여기서 살아 돌아갈 수 없다! 그렇다면 죽기 살기로 싸워라! 기필코, 우리는 승자가 될 것이다!”

    익제의 목소리가 마치 천둥처럼 그곳을 뒤흔들었다. 말을 마친 익제가 풍오의 허리를 걷어찼다. 그는 곧장 금군의 장수를 향해 달려갔다.

    “주군!”

    원진이 그 뒤를 따르려 했지만, 효명이 검을 뻗어 그의 앞길을 막았다. 원진이 찌푸린 눈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효명이 느릿하게 시선을 돌렸다. 그제야 익제를 뚫어지게 응시하는 인애대군의 사병들이 보였다. 주군의 뜻을 눈치챈 원진이 이를 악다물며 익제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주군.”

    무장은 만만치 않았다. 그는 커다란 덩치에 걸맞은 괴력을 지니고 있었다. 

    보통 검보다 서너 배는 큰 장검이 익제를 향해 날아왔다. 부웅,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릴 정도로 무게감이 있었다.

    푸륵.

    풍오가 노련하게 거리를 조정했다. 영리한 흑마는 물러서야 할 때와 뛰어들어야 할 때를 알고 있었다. 

    무장이 검을 휘두르면 재빨리 간격을 벌렸고, 그가 검을 거두는 순간 무장의 품을 파고들었다.

    그앙, 그앙.

    묵직한 소리가 주위를 울렸다. 장검이 익제의 귀를 스치고 지나갔다. 투구가 벗겨지며, 그의 얼굴이 드러났다. 

    윽, 효명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은 듯, 그의 근육이 움찔움찔 떨렸다.

    하지만 익제는 그 어느 때보다 냉정했다. 그는 일부러 빈틈을 보였고, 기회를 잡은 장수가 팔을 크게 휘둘렀다. 그의 검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으랴아아앗!”

    익제의 노림수가 적중했다. 그는 날아오는 검을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핏, 예리한 검 끝이 뺨을 스치고 지나가며 피가 터졌다. 

    “주군!”

    원진이 당혹스러운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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