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
내가 자네에게
큰 짐을 지웠군.
“은원군께서?”
국태부인이 그녀답지 않게 당황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채선이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래. 폐하께서.”
국태부인의 잇새로 애틋한 목소리가 비어져 나왔다. 그녀가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녀의 말속에 등장한 폐하는 현 황제를 이르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남편이자, 익제의 부친이었던 선황제.
그녀가 살며시 눈을 떴다. 그리고 수많은 감정이 담긴 눈으로 채선을 응시했다.
“자네 부친이……, 그렇군. 심 장군이었군.”
국태부인은 누군가의 얼굴을 떠올리듯, 채선의 어깨 너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에 그리움과 아련함이 묻어났다.
채선이 다부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 혹 일이 잘못되었을 때를 대비하셔야 합니다. 언제라도 이곳을 뜨실 수 있도록 마음의 준비를 하고 계세요. 국태부인은 제가 모시겠습니다.”
그 말에 국태부인이 두 눈을 곱게 접으며 소리 없이 웃었다. 그녀의 담담한 미소에 채선이 희미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나는 아무 데도 가지 않겠네.”
“하지만!”
채선이 다급한 얼굴로 그녀를 불렀다. 국태부인이 천천히 두 손을 뻗었다. 그녀가 채선의 손을 잡았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처럼.
“…….”
여전히 앙상한 손이었다. 동시에 부드럽고 따스한 손이기도 했다. 채선의 시선이 그녀의 손등 위로 떨어졌다.
“내가 살아봐야 얼마나 더 살겠는가. 폐하께서 독살을 당하셨는데도 그 사실을 까맣게 몰랐다니, 내 죄가 크네.”
“아닙니다! 그것이 어찌 국태부인의 잘못입니까? 누구도 몰랐습니다!”
“이 몸으로 도망을 간다 해도 어디까지 가겠나. 이곳에서도 의원 없이는 벅찬 몸인데 말이네.”
“그러니까 제가……!”
“나는 자네의 짐밖에 되지 않을 것이네.”
“아닙니다!”
채선이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황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국태부인은 여전히 보드랍게 웃으며, 그녀의 손등을 가만히 쓸어내렸다.
“그러니 만에 하나, 일이 잘못되면.”
거기서 잠깐 말을 끊은 그녀가 채선을 자애롭게 응시했다.
“내가 이곳으로 오는 병사들의 발을 묶어둘 터이니, 자네는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가게.”
“국태부인!”
마침내 채선이 경악성을 터뜨렸다. 그러나 국태부인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그녀의 잇새로 단호한 목소리가 비어져 나왔다.
“그것이 은원군께서 바라시는 일일 테야.”
“아닙니다. 아니에요. 은원군께서 바라시는 일은 그런 게 아닙니다. 국태부인께서 가시지 않겠다면 저도…….”
“자네는 홑몸이 아니지 않나?”
“…….”
그녀의 나직한 질책에 채선이 입을 다물었다. 짧게 한숨을 내쉰 국태부인이 이내 온화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은원군의 아이를 보지 못하는 것은 더없이 아쉬우나, 그 아이가 무사히 태어나는 데 일조를 할 수 있다면 바랄 것이 없다네. 나는 폐하도, 은원군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였어. 그러니 내 손주는 지킬 수 있도록 해주게.”
“국태……부인.”
채선이 눈물을 글썽거렸다. 봉긋하게 맺힌 물방울이 기어코 눈꺼풀을 비집고 아래로 떨어졌다. 그녀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안 됩니다. 그건 은원군께서 바라시는 일이 아니에요.”
그녀의 고집스러운 말에 국태부인이 채선의 손등을 부드럽게 쓸었다. 앙상한 뼈마디가 부딪혔다.
“국태부인이 아니라 시어머니로서 하는 부탁이네. 고귀한 여인이 아니라, 할미로서 하는 부탁이야.”
“윽…….”
채선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 모습을 보던 국태부인이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물론, 이것은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둔 가정이네. 내일 당장 은원군께서 옥좌에 앉아 계실 수도 있는 일이지 않나. 그럼 오늘 우리가 나눈 이야기는 아무 소용도 없는 것이 되겠지.”
“분명, 그럴 것입니다. 은원군께서는 분명.”
채선이 끝까지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거렸다.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뺨 위로 동그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국태부인이 가만히 손을 뻗어 그녀의 눈물을 닦았다.
“내가 자네에게 큰 짐을 지웠군.”
“아, 닙니다.”
“때로는 죽는 것보다 사는 것이 더 큰 짐이지. 그러나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주게.”
채선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소리 없이 눈물만 뚝뚝 흘릴 뿐이었다. 한참 그녀의 어깨를 다독이던 국태부인이 채선의 등을 밀었다.
“긴 여정에 지쳤을 터인데 이만 가서 쉬게. 나도 잠시 누워야겠군.”
“예.”
국태부인이 잡은 손을 놓았다. 채선이 미적미적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몇 번이고 국태부인을 돌아보며 방을 나섰다.
국태부인이 웃는 낯으로 그녀를 끝까지 배웅했다. 그러다 마지막 순간, 도영에게 시선을 주었다. 눈치 빠른 그가 채선을 따라가지 않고 그 자리에 남았다.
방문이 닫히고 나서야 국태부인이 입을 열었다. 나직한 목소리가 도영을 향해 날아갔다.
“은원군께서 자네에게 저 아이를 부탁하시던가?”
“예, 국태부인.”
“그래. 그러셨겠지.”
국태부인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도영을 보며 자애롭게 미소 지었다.
“나도 다시 한번 부탁하지. 저 아이와 저 아이가 품고 있는 생명을 지켜주게. 만약 도성에서 좋지 않은 소식이 날아오거든, 나는 신경 쓰지 말고 저 두 사람의 안위를 최우선으로 생각해주게.”
“……그 명, 받들겠습니다.”
도영이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삼키며 고개를 숙였다. 국태부인이 나가보라는 듯 손짓을 했다.
문이 열리고 닫혔다. 방 안의 인기척이 모두 사라졌다.
혼자 남은 국태부인은 닫힌 창을 바라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달싹이는 잇새로 서글픈 혼잣말이 비어져 나왔다.
“……폐하.”
***
도성은 평화로웠고, 황궁은 여느 날과 다름없었다. 두 손을 소맷자락에 찔러넣은 병사들이 성문을 향해 걸어가며 투덜거렸다.
“이제 겨울은 겨울인가 봐. 뼈를 깎는 칼바람에 서 있기만 해도 얼어 죽을 것 같은 계절이 돌아오는군.”
“누가 아니라나. 우리 같은 것들이야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추운 데서 일하는 신세지.”
병사들은 지루함을 이겨내려 시시콜콜한 잡담을 나누었다. 소맷자락에 주먹을 찔러넣고 있던 병사가 손을 빼며 말했다.
“자, 어서 문이나 열자고.”
네 사람은 육중한 나무 문 한 짝을 동시에 당겼다. 끼이익, 문이 조금씩 열렸다. 장정 네 명이 달라붙어 낑낑거렸지만, 성문은 아주 느리게 움직였다.
병사 하나가 거친 숨을 내쉬며 푸념을 늘어놓았다.
“원래는 여덟 명이 하던 일을 네 명이 하라니.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잔말 말고 힘이나 더 써. 윗분들 하시는 일을 우리가 어떻게 알겠는가. 안 그래도 요즘 병사들이 숭덩숭덩 잘려 나가는 판에.”
“그래, 그러니까 어서 문이나 여세. 우리도 잘리고 싶지 않으면.”
“하나, 둘, 셋!”
끄응.
병사들이 다시 힘을 주었다. 끼익, 문이 조금 더 열렸다. 그때, 병사 하나가 고개를 기울였다.
“응? 이게 무슨 소리지?”
“소리?”
“농땡이 부릴 생각 말고 얼른 문이나 열어.”
“아니 정말일세. 지진인가? 땅이 울리는 것 같지 않나?”
그 말에 조용히 신경을 곤두세우던 다른 병사 하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끼이익, 그 사이에도 문이 조금 더 열렸다.
“이런. 지진인가 보군. 내 당장 부장님께 달려가서…….”
“잠깐.”
다른 사내가 그 병사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뛰쳐나가려다 발목이 묶인 병사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왜 그러나?”
“저기, 저게 무엇인가?”
“응?”
그의 망연한 물음에 나머지 세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병사의 손끝은 성문 밖을 가리키고 있었다.
여명이 비추는 지평선 끝에서 뿌연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땅을 울리는 굉음이 점점 더 커졌다. 마치 거대한 산 같은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병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 적이다! 적이다!”
그의 입에서 뒤늦은 고함이 터졌다.
“침입자다!”
그와 동시에 나머지 병사들도 고성을 지르며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성문을 닫아라! 성문을 닫아걸어라!”
상황을 파악한 부장이 다급하게 명을 내렸다. 병사들이 허겁지겁 문을 닫기 시작했다. 그러나 육중한 성문은 사내들 십여 명이 달려들어도 느릿하게 움직일 뿐이었다.
그 사이, 적은 무척 빠르게 다가왔다. 특히, 맨 앞에서 말을 달리는 사내들의 움직임은 눈으로 쫓을 수 없을 정도였다.
“으아아악!”
그들은 문이 닫히기 직전, 아슬아슬하게 성문 안으로 파고들었다.
장검을 빼든 이들이 전광석화 같은 동작으로 이곳저곳을 휘젓고 다녔다. 그때마다 병사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잠시 뒤에 도착한 수많은 군사가 반쯤 열린 성문을 짓치고 들어왔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침입자다!”
누군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곳에서 난 소리는 아니었다. 오래지 않아, “적이다!” 하는 외침이 들렸다.
그제야 얼이 빠진 황궁의 병사들은 동서남북, 네 곳의 성문이 모두 뚫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
그 말은 곧 황궁이 전쟁터가 된다는 뜻이었다.
***
“태자 전하!”
환관이 사색이 된 얼굴로 고함을 지르며, 태자의 방문을 열었다. 옷을 입고 있던 태자가 눈살을 찌푸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환관을 일별한 그가 침상으로 고개를 돌렸다. 천개 너머에 어른거리는 그림자가 보였다. 이선이 드러난 어깨를 이불로 가리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태자의 못마땅한 목소리에도 환관은 머리를 숙이지 않았다. 한층 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가쁜 숨을 내쉴 뿐이었다. 그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비틀거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고 묻지 않느냐.”
태자의 목소리가 좀 더 낮아졌다. 그의 언짢은 기색에 뒤늦게 정신을 차린 환관이 머리를 조아리며 새된 외침을 터뜨렸다.
“바, 반역입니다. 역모입니다!”
“역모?”
태자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졌다. 태자의 수발을 들던 궁녀들이 화들짝 놀란 얼굴을 했고, 천개 너머에 있던 이선 역시 몸을 굳혔다.
“사병들이 황궁을 기습하였습니다. 어서 몸을 피하셔야 합니다.”
“누구의 사병이냐?”
그렇게 묻는 태자의 머릿속으로 은원군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는 역모를 일으킬 만큼의 세력이 없었다. 그의 생각이 깊어지려는 찰나, 환관이 황급히 입을 열었다.
“인애대군입니다!”
“……인애대군.”
태자가 이맛살을 구겼다.
조만간 인애대군을 처리할 예정이었다.
문효대군과 효성대군, 그리고 광무대군을 하나씩 처리한 것처럼 인애대군 역시 사고로 위장해 죽일 생각이었다. 그는 형제이기에 앞서 제 자리를 위협하는 정적이었기 때문이다.
“마침 잘 됐군.”
태자가 의미심장하게 중얼거렸다. 환관이 깜짝 놀란 얼굴로 “예?”하고 되물었다. 그는 당장이라도 인애대군의 사병이 이곳까지 쳐들어올 것처럼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제 발로 명분을 갖다 바치니 더없이 잘된 일이야.”
그렇게 중얼거린 태자가 묵직한 음성으로 명령했다.
“반란군은 내 손으로 제압한다. 황궁에 속한 금군들을 모두 불러라.”
그가 호기롭게 명령하며 방을 나섰다. 방안에 남은 궁녀들이 이리저리 눈치를 보다 재빨리 흩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