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 개의 별이 뜨는 밤 (126)화 (126/131)

16645625749995.jpg

126

진군하라!

익제가 가마꾼들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가마꾼들은 누구의 명이라 어기겠냐는 듯, 성실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예. 걱정 마십시오.”

그가 출발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채선을 태운 가마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인들이 줄지어 가마 뒤를 따랐다. 기다란 행렬이 게으른 뱀처럼 굼실거리며 나아갔다.

익제는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선 채 멀어지는 가마의 꽁무니를 지켜보았다. 문득, 그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주군.”

등 뒤로 다가온 보현이 그를 불렀다. 화영이 오라비를 발견하면 귀찮아질 것을 염려해 몸을 숨기고 있던 그였다. 그가 익제의 한 걸음 뒤에 서서 멀어지는 행렬에 시선을 주었다. 

이미 가마는 시야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그곳을 멍하니 쳐다보던 익제가 느릿하게 등을 돌렸다. 그의 낯빛이 순식간에 일변했다.

“모두 도착했나?”

“예.”

서생 같은 보현의 얼굴에도 예리한 결기가 서렸다. 익제의 서늘한 안광이 보현을 향했고, 말투가 짧아졌다. 두 사람은 지금 혈연관계가 아니라 군신 관계였다. 

“선박은?”

강에는 수십 척의 배가 정박 되어 있을 터였다. 인애대군이 준비한 선박이었다. 익제의 재력과 인맥으로는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규모와 신속함이었다. 

그의 장기 말은 결정적인 순간, 결정적인 역할을 해주었다. 

“출항 준비는 모두 끝났습니다. 오늘 중에는 도성으로 출발해야 합니다. 각 지역의 공물이 도착하는 시기라 여러 척의 배가 움직여도 눈에 덜 띌 것입니다. 어둠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이른 새벽, 황궁의 문이 열리는 틈을 타 쳐들어갈 것입니다.”

“좋다. 이대로 곧장 배를 타고 도성으로 향한다.”

“예.”

그때, 저만치에서 이백중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갑옷을 입은 그는 백전노장처럼 위풍당당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며 고개만 한 번 끄덕였다. 그리고 곧장 같은 방향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

뜰을 가로지르던 익제가 불현듯, 걸음을 멈추고 소매를 들어 얼굴을 가렸다. 

어디선가 흙먼지를 품은 모래바람이 불어왔다. 자욱한 모래바람이 익제의 검은색 포를 사정없이 흔들었다. 

바람이 잦아들고 나서야 그는 소맷자락을 내리고 다시 앞을 바라봤다. 그의 눈매는 언제 다정하고 온화했냐는 듯, 더없이 싸늘한 빛을 띠고 있었다.

“출진이다.” 

***

“오랜만이네.”

국태부인이 자애로운 미소로 채선을 맞았다. 채선 역시 반가운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정중하게 예를 올린 그녀가 국태부인의 안부를 물었다.

“예.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내가 별일이 무어 있으려고. 나보다는 홑몸이 아닌 자네가 더 걱정이지. 그래, 먼 여정이 고단하지는 않은가? 불편한 곳은 없고?”

“예. 무탈합니다.”

채선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던 국태부인이 그녀의 등 뒤를 바라보았다. 있어야 할 얼굴이 보이지 않는 탓이었다.

그녀의 의문을 짐작한 채선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은원군께서는 오는 길에 도성에서 급한 전갈이 당도하여 되돌아가셨습니다.”

“저런, 그러셨나.”

“늦지 않게…… 오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 부인을 홀로 두고 마음 편히 있을 은원군이 아니지. 들어가세.”

국태부인이 먼저 등을 돌렸다. 채선이 천천히 걸음을 떼는 그때, 부인의 등 뒤에 서 있는 중년의 사내가 눈에 띄었다. 그는 이맛살을 구긴 채 한곳을 뚫어지게 노려보고 있었다.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자, 잔뜩 어깨를 움츠리고 있는 화영이 보였다. 그제야 사내가 누구인지 짐작이 갔다.

“따라오너라.”

그가 엄한 표정으로 말했다. 채선을 향해 도와 달라는 시선을 보내던 화영이 “무엇 하느냐, 어서 오지 않고.”라는 부친 호통에 울며 겨자 먹기로 끌려갔다.

그제야 채선이 다시 국태부인에게로 눈길을 주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국태부인이 의아한 표정으로 두 눈을 크게 떴다. 채선의 목소리가 자못 심각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어서 안으로 드세.”하며 먼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채선을 만난 국태부인의 입가에서 옅은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

익제는 갑판 위에 서서 눈 앞에 펼쳐진 강을 바라보았다. 배는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익제와 같았다.

그가 지금부터 하려는 일은 권력을 거스르는 짓이었다. 한편으론, 순리를 되찾는 것이기도 했다.

저 물길 너머 무엇이 있는지 보이지 않는 것처럼 그 역시 자신의 앞날을 짐작할 수 없었다. 최악의 경우, 그는 이 길을 다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싸우지 않을 수 없었다. 남은 평생 태자가 보낼 자객을 두려워하며 살 수는 없었다. 채선을 빼앗길까 불안해하며 살 수도 없었다. 

귀인의 별이 모두가 탐내는 고귀한 존재라면, 저 역시 고귀한 자가 되어 그녀를 움켜쥐어야 했다. 그녀를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되어야 했다.

차가운 강바람이 그의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심장이 선득해질 만큼 싸늘한 한기에 피부가 팽팽하게 긴장했다.

하지만 익제는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는 해가 저물어 시커멓게 변해가는 강물을 그보다 더 새카만 눈으로 응시했다. 

“주군.”

보현이 강바람을 맞으며 곁으로 다가왔다. 익제가 그제야 강물에서 눈을 떼고 그를 돌아보았다.

“이 속도라면, 새벽녘에는 황궁에서 가장 가까운 기슭에 정박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곳에서 황궁까지 빠르게 짓쳐 들어가면 반 시진.”

“인애대군이 나와 있을 것이다.”

그 말에 보현이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물었다. 그의 낮은 목소리가 강바람에 묻혀 희미하게 들렸다.

“그를 어디까지 사용하실 생각이십니까?”

“이이제이.”

보현은 그의 의중을 단박에 눈치챘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랑캐로 오랑캐를 제거한다. 일단 태자를 무너뜨릴 때까지는 그를 사용하실 심산이로군요.”

보현이 시커먼 강으로 눈길을 돌리며 의미심장하게 중얼거렸다.

“이 계획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속전속결이지.”

익제가 알고 있다는 듯 그의 대답을 가로챘다. 고개를 끄덕인 보현이 신중한 어조로 뒷말을 이었다.

“예, 얼마나 빠르게 황궁을 장악하느냐가 이 전쟁의 승패를 가를 것입니다. 다른 곳의 영주들이 지원병을 보내기 전에 모든 것을 끝내셔야 합니다. 그러고 나면, 신료들은 따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명분은 우리 쪽에 있습니다.”

“명분.”

익제가 나직하게 그 말을 되뇌었다. 보현이 장광설을 늘어놓았다. 

“선황제 폐하를 독살하고 황위를 가로챈 역적과 그 무리를 처단하고, 옥좌를 되찾아 오는 데 필요한 정당한 명분. 모든 정치 싸움은 명분으로 시작해 명분으로 끝나는 법이니까요. 연판장을 손에 넣은 건 신의 한 수였습니다.”

“신의 한 수라.”

익제는 자신의 왼쪽 가슴을 꾹 눌렀다. 그 속에는 곱게 접힌 연판장이 들어 있었다. 채선이 아니었다면 얻지 못했을 신의 한 수.

모든 일이 세밀하게 맞물려 돌아갔다. 만약 채선의 어미가 노리개를 건네준 사람이 이선이었다면, 만약 채선이 광무대군에게 납치를 당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그 유품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끝내 알지 못했다면.

톱니바퀴가 하나만 어긋났어도 성사되지 않을 역모였다.

이 또한 예정된 운명이었을까.

“개소리.”

“……예?”

뜬금없는 익제의 말에 보현이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익제는 정해진 운명 따윈 믿지 않았다. 도망치지 않기로 결정한 것은 그의 의지였다. 반역자가 될 위험을 감수하며 궐기한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그의 의지였다. 

운명 따위가 아니었다. 자신의 사람을 지키고자 하는 그의 결심이었다.

“저기, 도성이 보입니다.”

보현의 말대로 어둠 속에 나타난 시커먼 땅덩어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불빛 하나 없는 그곳은 새까만 그림자처럼 보일 따름이었다.

“주군.”

곁으로 다가온 원진이 그에게 갑옷을 건넸다. 익제는 느긋한 동작으로 갑옷을 몸에 걸쳤다. 그 사이에도, 도성은 시시각각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배가 뭍에 정박했다. 병사들이 닻을 내리고, 배를 고정하며, 발판을 설치하느라 분주하게 움직였다. 알 수 없는 열기가 그곳을 가득 채웠다. 

“가자.”

익제가 가장 먼저 배에서 내렸다. 

“은원군!”

육지에서는 인애대군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역시 갑옷을 착용한 채였다.

익제를 발견한 그가 만면에 희색을 띤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차례로 도착한 배에서 군사들이 끝도 없이 하선했다. 

인애대군은 그 모습을 황홀한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그러다 이백중을 보고는 두 눈을 크게 떴다.

“아니, 자네는! 이, 이 공이 여긴 어떻게!”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할 만큼 놀란 인애대군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감격 어린 시선이 익제를 향했다. 

그는 익제와 이백중을 번갈아 보며 나직한 탄성을 터뜨렸다.

“아아, 이 공이 내 편에 서다니, 이것은 지려고 해야 질 수 없는 싸움이로다!”

전운이 감돌았다. 여명이 비추는 새벽, 싸늘한 공기 속에서 수천의 군사가 도열했다. 그들은 비장한 표정으로 어둠에 물든 도성을 노려보았다.

그곳에 모인 이들 중 이제 곧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것이 얼마나 어마어마한 일인지도. 

곧 천지가 개벽하게 될 것이다. 그들의 손으로.

그들은 인애대군의 사병이었다. 황제의 명보다 인애대군의 명이 우선이라는 말이다.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던 이들이 배에서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이건 역모가 아닌가.”

“어허, 역모라니. 말조심하게.”

“그럼 이게 역모가 아니고 무엇인가?”

“황자의 난이지. 어느 때든 이런 일은 있어 왔네. 높은 분들이 권력을 위해 아비를 죽이고, 자식을 죽이는 일이야 그리 드문 일도 아니지 않나. 잘하면 황제가 되는데, 자네라면 한 번 모험을 해보고 싶지 않겠나?”

“그러다 죽으면?”

“죽긴 왜 죽어? 우리 쪽에는 이백중 어른이 계시는데? 누가 알았나. 여태 우리를 훈련시킨 분이 그 이백중 장군이라니. 어쩐지 지릴 만큼 힘들다고 했어.”

“하지만.”

“잘 생각해 봐. 인애대군께서 황제가 되시면 우리를 그냥 두고 보겠는가?”

“두고 보지 않으시면?”

“당연히 큰 상을 내리시겠지. 우리는 그분의 사병 중에서도 선택된 자들이란 말일세. 게다가 성공만 하면 그분을 황제 자리에 앉힌 일등 공신이 되는 거지.”

“그래 봤자 관직에는 나가지도 못할 거 아닌가.”

“누가 아나. 부대장 자리 하나는 줄지. 그게 아니라도 포상을 두둑하게 내리실 거야. 아까 하는 얘기 못 들었나. 그 돈이면 우리 모두 죽을 때까지 배곯을 걱정은 안 해도 된단 말일세.”

“하긴. 어차피 성공하지 못하면 다들 죽은 목숨이니 죽기 살기로 싸워야지, 별수 있나.”

여기까지 와서 돌아갈 순 없었다. 그들은 이미 배수의 진을 쳤다. 실패한 반란을 기다리는 건 죽음뿐이었다.

그렇다면 남은 길은 하나였다. 

승리. 어떻게든 이겨야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인애대군이 잔뜩 기합이 들어간 사병들을 향해 커다랗게 외쳤다.

“진군하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