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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별이 뜨는 밤 (125)화 (125/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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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5

    그래도 연모합니다.

    채선이 눈매를 허물어뜨리며 웃었다. 익제가 두 눈을 크게 떴다. 생각지도 못한 반응에 반쯤 얼이 빠졌다.

    그녀가 누그러진 목소리로 속삭였다.

    “실은 익제님이 차갑고, 심술궂으며, 냉혹한 성정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아니요, 나는!”

    익제가 뜨끔한 표정으로 서둘러 입을 열었다. 행여 제 본성을 눈치챈 채선이 천리만리 도망이라도 갈까 봐, 그는 또다시 한발을 내밀었다. 

    그리고 덥석, 그녀의 손목을 붙들었다. 이번에는 그녀가 물러설 틈을 주지 않았다. 그의 눈동자가 초조한 빛을 띠었다.

    채선이 그런 그를 올려다보며 환하게 웃었다. 이름 모를 꽃을 바라보듯, 집채만 한 고등어를 상상하듯, 그를 보며 그렇게 웃었다.

    그녀의 작고 붉은 입술이 달싹였다.

    “그래도 연모합니다.”

    “…….”

    “그 봄날,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제 이름을 불러 주시던 순간부터. 제가 감히 어찌할 수 없는 분이라고 오만하게 선언하시던 그 순간부터. 저는 한시도 익제님을 연모하지 않은 순간이 없었습니다.”

    “윽.”

    익제가 목을 뒤로 젖혔다. 그는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눌러 삼키듯 천천히 목울대를 울렸다. 뜨거운 덩어리가 식도를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채선은 한 포기 도라지꽃처럼 소박하게 웃으며 그를 향해 하늘하늘, 두 팔을 뻗었다. 

    익제가 다급하게 그녀를 끌어안았다. 사형 집행 직전에 취소 선고를 들은 사람처럼 희열과 안도에 휩싸여.

    채선 역시 그의 등을 마주 안았다. 두 사람의 몸이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빼곡하게 맞물렸다.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뜬 익제가 불퉁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내가 언제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부인의 이름을 불렀다고 그러시오? 아무래도 부인이 잘못 기억하고 있는 것 같소. 나는 처음부터 다정했소만.”

    그의 능청스러움에 채선이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 문득, 입을 다물고 물끄러미 그를 올려다보았다. 마치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듯, 혜안이 깃든 눈으로.

    “제게 하실 말씀이 있지 않으십니까?”

    “무슨……?”

    “내일, 익제님께서는 저와 함께 출발하여 풍주로 가십니까.”

    아.

    익제는 두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의표를 찔렸다.

    눈과 귀를 막아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한 그녀가 실은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누구보다 현명하고, 누구보다 사려가 깊었다.

    그가 또 한 번 목울대를 울렸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밭은 목소리가 비어져 나왔다.

    “나는 급한 일이 생겨 도성으로 돌아가 봐야 하오.”

    “급한 일이요.”

    “……급한 일.”

    채선이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그 급한 일이 무엇이냐고 캐묻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익제는 그녀가 자신의 설명을 기다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끝내 뒷말을 잇지 못했다. 어쩌면 살아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말을 차마 자신의 입으로 할 수는 없었다. 

    채선은 많은 말이 담긴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그녀가 말을 하지 못하던 그때처럼, 채선은 눈으로 이야기를 건넸다.

    하고 싶은 말을 모두 삼킨 그녀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조용하나, 결연한 목소리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돌아오실 때까지,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익제는 또다시 북받치는 감정을 삭이려 목울대를 울렸다. 그의 눈매가 이지러졌다. 말없이 그녀를 내려다보던 그가 억누른 목소리로 대답했다.

    “반드시.” 

    “…….”

    “반드시 데리러 가겠소.”

    억겁의 세월을 거슬러서라도.

    “……예.”

    그녀의 목덜미를 움켜쥔 익제가 고개를 숙이고 채선의 입술을 찾았다. 그 어느 때보다 갈급하고 절박하게.

    두 사람의 입술이 맞닿았다. 미지근한 체온은 금세 열기를 품기 시작했다.

    익제는 초조한 손길로 그녀의 몸을 더듬었다. 그것은 그녀의 존재를 확인하려는 것 같기도 했고, 혹은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행위를 갈구하는 것 같기도 했다.

    채선은 더욱 강하게 그를 끌어안았다. 그녀는 익제가 하려는 일이 무엇인지 짐작하고 있었다. 

    연판장. 선황제의 독살. 빼앗긴 황위.

    그 단어들이 갖는 의미를 어찌 모를 수 있을까. 

    그리고 그것이 실패했을 때, 어떤 결과가 기다리고 있는지 또한 알고 있었다.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를 밤.

    두 사람은 한 치의 여유도 용납할 수 없다는 듯, 뜨겁게 뒤엉켰다. 커다란 손이 채선의 뺨을 쓸었고, 그녀가 손바닥에 얼굴을 비볐다. 

    어째서인지 눈물이 나올 것 같았지만, 채선은 결코 울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더없이 환하게 웃었다.

    “…….”

    그 순간, 익제가 입매를 일그러뜨렸다. 그는 채선을 바라보며 연신 목울대를 울렸다. 마치 울음을 참는 듯이.

    그가 그녀를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다. 채선은 두 눈을 질끈 감으며 몸을 짓누르는 익숙한 무게를 느꼈다. 

    쏴아아.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가 마치 파도 소리처럼 들렸다. 어디선가 자그락거리는 모래알 소리도 들리는 듯했다. 

    그녀는 넘실거리는 바다 아래로 깊숙이 침잠했다. 이윽고 심해에 도달한 듯, 세상의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

    “먼저 가서 기다리시오.”

    익제가 아쉬운 눈으로 채선을 바라보았다. 등 뒤의 하인들은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로 두 사람의 작별을 지켜보았다.

    고작 며칠 떨어져 있는 것뿐인데 은원군께서 유난이시구나, 도성에 얼마나 급한 일이 생기셨으면 부인을 떼놓고 가시나, 발길이 안 떨어지시는 모양이다, 하인들 틈에서 조용한 속삭임이 흘러나왔다.

    “예.”

    채선이 애잔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익제가 한 손을 뻗어 바람에 흩날리는 그녀의 잔머리를 쓸어넘겼다.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겠소.”

    “예.”

    “그러니 이번에는 누가 불러도 가지 말고, 그 자리에서 나를 기다려 주시오.”

    그것은 산골 처자에게 사람을 보냈으나 허탕을 치고 돌아온 날을 이르는 것이었다. 그가 보낸 사람보다 한발 먼저 이선이 그녀를 데리러 왔었다.

    하지만 이제 그럴 일은 없었다. 그녀와 이선 사이의 끈은 제 손으로 잘라 버렸다.

    “……예.”

    채선이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녀가 갈색 눈동자 가득 익제를 꾹꾹 눌러 담았다. 파르르 떨리는 입매가 간신히 웃음을 그렸다.

    “어디에도 가지 않고, 익제님을 기다리겠습니다.”

    하인들이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누가 보면 죽으러 가시는 줄 알겠네, 며칠 떨어지는 게 저리 애틋할 일인가, 그들이 소리 없는 눈짓을 주고받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익제가 느릿하게 눈동자를 돌렸다. 채선의 등 뒤에 서 있던 도영과 눈이 마주쳤다. 도영은 그를 응시하며 오늘 아침, 익제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주군, 저도…….”

    미처 뒷말을 잇기도 전에 익제가 그의 말을 잘랐다. 칼처럼 단호한 목소리였다.

    “너는 부인을 지켜라.”

    “주군.”

    평소라면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익제의 말에 토를 다는 행위는 감히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평소가 아니었다. 익제는 일생일대의 결전을 앞두고 있었고, 그 자리에 도영이 빠져서는 안 되었다. 

    하물며, 그를 배신했던 효명도 참전하는 전투였다. 그러니 그의 왼팔과 같은 도영이 빠진다는 건 더더욱 말이 안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익제는 완강했다. 그가 도영을 똑바로 응시하며 힘주어 말했다.

    “이번에야말로 부인을 지켜라.”

    그것은 뼈아픈 그의 실책을 찌르는 말이었다. 그래서 도영은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의 눈동자가 어두워졌다. 전쟁에 나가지 못하는 것이 자신의 실책 때문인가 싶었다.

    주군께서는 더 이상 나를 믿지 못하시는가.

    자괴감에 휩싸인 도영이 주먹을 바투 쥐는데, 그 사이로 익제의 묵직한 음성이 이어졌다.

    “부인의 안위를 지키는 것이 나를 돕는 길이다. 그래야 내가 마음 놓고 전장에 나갈 수 있지 않겠나.”

    “하오나, 주군.”

    “그리고.”

    익제가 대수롭지 않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마치 날씨 이야기라도 하듯, 무척이나 평연한 어조로.

    “만약 내가 패했다는 소식이 들리거든.”

    그가 도영을 보며 입꼬리를 당겼다. 그래서 도영은 익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한 번에 알아듣지 못했다. 

    익제가 눈매를 허물어뜨리며 웃었다. 부드럽고 다정하게.

    “그 즉시 부인을 데리고 도망쳐라.”

    “……주군.”

    “반역자의 가족이 어떤 대접을 받는지 너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패했다는 소식이 날아들면, 너는 그 즉시 뒤도 돌아보지 말고 부인을 데리고 도망쳐라. 무슨 일이 있어도 내 부인을 지키라는 말이다.”

    “…….”

    “그리하면 나는 뒤를 걱정하지 않고 싸울 수 있을 것이다. 너를 믿는다.”

    “주군.”

    도영은 북받치는 감정을 삭이려 입술을 깨물었다.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익제는 죽으러 가는 사람치고 지나치게 담담했으며, 또한 지나치게 평온했다.

    도영이 꿀꺽, 목울대를 울리며 대답했다.

    “……예. 이번에야말로 목숨을 걸고서라도 부인을 지키겠습니다.”

    “그래. 고맙다.”

    “!”

    익제가 고맙다고 했다. 명령을 내리는 것이 당연한 그가 도영에게 고맙다고 했다. 난생처음 듣는 인사가 불길해 도영은 저도 모르게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짧은 상념에서 깨어난 도영이 익제를 향해 머리를 숙였다. 목숨을 바쳐서라도 그의 명을 이행하겠다는 뜻이었다.

    익제가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이곤 채선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먼저 가시오.”

    “하지만…….”

    “나는 아직 기다려야 할 이들이 있소. 그러니 부인께서 먼저 출발하시오. 지금 서두르지 않으면, 오늘 밤은 길에서 노숙을 하게 될 것이오.”

    “……예.”

    그러고도 한참 동안 채선은 발을 떼지 못했다. 

    “군대부인.”

    그녀가 자꾸만 미적거리자, 송하가 슬그머니 채선을 불렀다. 곧 다시 보게 될 터인데 왜 그러시냐는 듯.

    “그래. 이만 가자.”

    천천히 심호흡을 한 채선이 그렇게 말하며 익제에게 고개를 숙였다.

    “다녀오십시오.”

    익제는 말없이 웃기만 했다. 언제 오겠다는 기약은 없었다. 어떻게 오겠다는 약조도 없었다. 그 침묵에 숨이 막혔다.

    “…….”

    채선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녀가 가마로 걸어가자, 기다리고 있던 가마꾼이 얼른 문을 열었다.

    우뚝. 

    채선이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송하의 시선이 그녀의 등에 꽂혔다. 가마꾼도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녀를 곁눈질했다. 몇 걸음 뒤에 있던 화영이 지루한 듯 먼저 자신의 가마에 올라탔다.

    그 순간, 채선이 등을 돌렸다. 그리고 익제를 향해 달려갔다.

    “!”

    익제는 제품에 풀썩, 뛰어든 그녀를 보며 두 눈을 크게 떴다. 수많은 하인이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수줍음이 많고 소심한 채선은 절대 하지 않을 행동이었다.

    그것이 그녀의 절박한 마음을 보여주는 듯해 익제의 눈매가 누그러졌다. 그의 마음이 온전히 채워졌다.

    “다녀오겠소.”

    익제는 채선을 강하게 끌어안으며, 다시 한번 그녀의 귓가에 그 말을 속삭였다. 

    채선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기어코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뗐다. 돌아보면 행여 마음이 흔들릴까, 바닥만 보며 걷던 그녀가 마침내 가마에 몸을 실었다. 

    문이 닫히고, 가마가 일어섰다.

    “조심해서 모시거라. 흔들리지 않게 신경 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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