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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별이 뜨는 밤 (124)화 (124/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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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4

    누가 너희를
    내게 보낸 것이냐.

    익제가 천천히 채선의 등을 밀었다. 그녀는 멈칫멈칫, 걸음을 내디뎠다. 

    그가 빙긋 입꼬리를 당기며 그녀를 안심시켰다. 그리고 아무 말 하지 말라는 듯, 자신의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댔다.

    채선이 고개를 끄덕이며 방 밖으로 물러났다. 그때, 복도를 달려오는 원진의 모습이 보였다. 그 뒤로 호위무사 몇 명이 따라왔다. 그들 모두 한 손에는 날카로운 검을 든 채였다. 

    채선은 맨 뒤에서 헐레벌떡 달려오는 송하를 보며, 역시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히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

    익제가 문 앞에 선 채선의 등을 복도 밖으로 툭, 하고 밀었다. 

    “익제님은……!”

    그녀가 깜짝 놀란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방문이 닫혔다. 저도 모르게 한 발자국 다가서는 그녀를 송하가 등 뒤에서 덥석, 끌어안았다.

    “안 돼요!”

    방안에서는 이미 예리한 날붙이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깡, 깡.

    그것이 무슨 소리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군대부인!”

    복도에 있던 하인들이 화들짝 놀란 얼굴로 채선을 불렀다. 그리고 다급하게 그녀를 데리고 처소 밖으로 나갔다. 채선은 복도를 가로지르면서도 연신 뒤를 돌아보았다.

    ***

    “모두 넷.”

    방문이 닫힘과 동시에 익제의 나직한 목소리가 공기를 흔들었다.

    “침상 아래 하나, 병풍 뒤에 셋.”

    “!”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도영과 원진이 뛰쳐나갔다. 자객들 역시 들켰다는 사실을 깨닫곤 곧장 모습을 드러냈다.

    익제는 그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한 데 뒤엉킨 이들을 예리한 눈으로 주시했다.

    자객들의 솜씨는 예사롭지 않았다. 그러나 이쪽은 도합 열 명이었다. 하물며 원진과 도영은 일당백이라 불리는 실력자들이었다. 

    카앙, 캉.

    맞부딪힌 검이 힘겨루기를 시작했다. 팽팽하던 싸움의 전세가 기우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쿵.

    도영에게 걷어차인 자객이 문갑을 들이받았다. 문갑 위에 놓여 있던 도자기가 위태롭게 흔들리다 아래로 떨어졌다. 

    챙그랑, 요란한 소리와 함께 도자기가 깨지고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서걱.

    허공을 빠르게 오가던 검이 천개를 베었다. 하늘하늘한 천이 잘려나갔다. 익제는 제 앞에 떨어진, 피처럼 붉은 천 조각을 내려다보았다. 

    자객들은 제법 실력이 좋았지만, 수적 열세에 몰려 있었다. 아마도 그들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기습을 당했다면, 익제의 목숨은 장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자객들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느려졌다. 복면 사이로 드러난 눈동자에 언뜻 체념의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호위무사들은 기세를 늦추지 않았다. 그들의 살벌한 검을 피해 한 걸음씩 물러서던 자객들이 서로의 등을 맞댄 채 막다른 궁지에 몰렸다. 그렇게 몇 번의 검을 더 주고받던 순간.

    푹.

    도영의 검이 자객의 오른쪽 어깨를 깊숙이 파고들었다. 동시에 원진이 다른 자객의 허리를 그었다. 울컥, 피가 뿜어져 나왔다.

    챙강. 챙그랑.

    두 사람이 들고 있던 검을 떨어뜨렸다. 항전 가능한 것은 고작해야 두 명. 승기를 잡은 호위무사들의 기세가 점점 더 거세졌다. 

    “큭.”

    세 번째 자객이 배를 움켜쥐며 쓰러졌다. 그의 손가락 사이로 붉은 피가 나왔다. 마지막 남은 자객마저 등에 검 상을 입고 난 뒤에야 치열한 전투는 끝이 났다.

    자객들의 숨이 끊어진 건 아니었다. 네 명 모두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바닥은 그들이 흘린 피로 흥건했지만, 어쨌든 숨은 붙어 있었다.

    호위무사들이 그들의 검을 빼앗고, 뒷머리를 잡아 강제로 일으켰다. 

    “컥.”

    자객의 잇새에서 밭은 호흡이 터져 나왔다. 호위무사가 그들을 무릎 꿇렸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있던 익제가 그제야 시선을 들었다. 감정을 읽을 수 없는 눈동자가 느릿하게 움직였다.

    “누구냐.”

    일견 담담하게까지 들리는 억양이 없는 목소리였다. 그러나 넷 중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익제가 픽, 하는 웃음을 흘렸다. 호위가 자객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큭, 낮게 숨을 들이켠 그가 고통스러운 숨을 내쉬었다.

    호위무사가 그의 복면을 벗겼다. 자객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의 일그러진 안광이 의지로 번들거렸다.

    “아.”

    원진의 잇새에서 나직한 탄성이 터졌다. 

    그자였다. 광무대군을 죽이고, 익제를 습격한 자.

    익제 역시 그 얼굴을 알아보았는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천천히 몸을 숙인 그가 자객의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익제는 부드럽게 입꼬리를 당겼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는 조금도 웃지 않았다.

    “누가 너희를 내게 보낸 것이냐.”

    “…….”

    자객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적에게 붙잡힌 포로답지 않았다. 귀가 들리지 않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 만큼 초연하고 평온한 표정이었다. 

    “태자인가.”

    서늘한 물음이었다. 또한, 핵심을 관통하는 질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은 어떤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익제는 그들이 끝내 입을 열지 않을 거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잘 훈련된 자객이었다. 

    최선을 다해 목표물을 죽이고, 행여 붙잡히더라도 배후를 발설하지 않도록 훈련받은 자. 

    자객을 응시하는 익제의 눈동자가 더없이 차가웠다. 태자는 익제가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살수를 보낼 것이고, 익제는 죽임을 당하지 않기 위해 발버둥을 칠 것이다.

    그래. 죽을 수는 없었다. 그에게는 지켜야 할 사람이 있었다. 제가 살기 위해 누군가를 죽여야 한다면, 그는 망설이지 않고 상대의 숨통을 끊어놓을 터였다.

    이제 이 싸움을 끝내야 할 때가 왔다.

    “죽여라.”

    그 말을 끝으로 익제가 먼저 등을 돌렸다. 호위들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무자비하게 검을 휘둘렀다. 그들의 검이 자객들의 목에 깊숙이 박혔다.

    왈칵.

    분수처럼 쏟아져 나온 피가 익제의 포를 더럽혔다. 네 명의 자객들이 차례대로 그 자리에 쓰러졌다.

    ***

    채선은 초조하게 방안을 오갔다. 그녀의 걱정스러운 표정에 무슨 말인가 하려던 송하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지금 그녀의 귀에는 어떤 말도 들리지 않을 것이다. 

    “아무 일도 없으실 겁니다. 호위무사들이 있지 않습니까.”

    옆에 있는 연산댁이 차분한 어조로 그녀를 달랬다. 연산댁의 목소리는 다정하면서도 확신에 차 있었다. 

    그러나 채선의 표정은 조금도 풀어지지 않았다. 연산댁이 한결 침착한 어조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애면글면하시면 복중 태아에게 좋지 않습니다.”

    그제야 채선의 걸음이 우뚝 멎었다. 그녀는 울 것 같은 얼굴로 연산댁을 돌아보았다. 그녀의 잇새로 초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헌데, 왜 이리 늦으시는 걸까.”

    그때, 방문이 열렸다. 방금까지 연산댁을 향해 있던 그녀의 고개가 휙 하고 돌아갔다. 

    “아.”

    채선은 방안으로 들어서는 익제의 모습을 보고서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어깨를 툭 떨구었고, 연산댁과 송하가 인사를 한 후 자리에서 물러났다.

    “…….”

    습기를 머금은 채선의 갈색 눈동자가 익제를 천천히 훑어 내렸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그 어느 때보다 세심하고 꼼꼼한 시선이었다. 

    문득, 그녀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옷을…… 갈아입으셨습니다. 혹, 다치셨습니까?”

    채선이 저도 모르게 그를 향해 한 걸음 다가섰다. 익제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 다정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행여 부인께 피 냄새가 날까, 새 옷으로 갈아입고 온 것뿐이오. 시간이 좀 더 있었다면 목욕까지 하고 왔을 터인데.”

    그 말에 채선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그녀는 말없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어째서 그리 보느냐는 듯, 익제가 한쪽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그러다 아차, 하는 표정으로 내심 혀를 찼다.

    피 얘기를 하는 게 아니었다. 안 그래도 심약한 여인이 아니던가. 평소처럼 적당히 둘러댔어야 했다.

    그가 다급하게 입을 열었지만, 채선이 한발 빨랐다. 그녀의 고요한 목소리가 발아래로 떨어졌다.

    “부부는 일심동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

    입을 떼던 그가 도로 침묵했다. 그 말의 의도를 짐작할 수 없었던 탓이다. 익제의 눈매가 스윽, 하고 좁아졌다.

    “즐겁고 건강할 때만 곁에 있는 게, 아니라고 하셨잖습니까?”

    채선의 표정은 전에 없이 딱딱했다. 그녀는 억지로 화를 참는 것 같기도 했고, 혹은 울음을 터뜨리기 직전인 것 같기도 했다.

    적잖이 당황한 익제가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손가락만 움칫거렸다. 채선의 목소리는 온화했지만, 마치 비수처럼 그의 심장을 후볐다.

    “아니면, 익제님께서는 그저 좋고 즐거울 때만 제가 필요십니까?”

    “!”

    생각지도 못한 말에 익제가 그답지 않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가 무심코 한발을 내디뎠다. 채선이 한발 물러섰다.

    “…….”

    믿을 수 없는 듯, 익제가 두 눈을 크게 떴다. 이번에는 그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서서히 고개를 떨구어 뒤로 물러선 채선의 발을 내려다보던 그가 조용히 눈동자를 들었다. 아주 천천히, 그녀의 얼굴을 확인하는 게 두렵다는 듯. 

    “아니오, 나는.”

    무슨 말인가 하려던 익제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할 말을 찾지 못한 사람처럼 한참 동안 입술만 달싹이던 그는 초조하게 주먹을 쥐었다 폈다 했다.

    “나는.”

    익제는 어째서인지 낯설게 느껴지는 그녀의 갈색 눈동자를 마주보며 억지로 목소리를 쥐어 짜냈다. 

    입안이 바짝 말랐다. 손안에 움켜쥔 것을 놓칠 듯한 불안함이 발밑을 아득하게 만들었다. 까마득한 공포가 그를 덮쳐왔다.

    익제가 성마른 목소리로 변명했다. 그의 눈매와 입매가 일그러졌다.

    “나는 그대에게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소.”

    “저는 익제님과 같은 것을 보고 싶습니다.”

    채선이 담담하게 대꾸했다. 의표를 찌르는 그녀의 대답에 멍하니 입을 벌리던 익제가 황급히 뒷말을 이었다. 

    “나는 그대에게 괜한 걱정을 안기고 싶지 않소.”

    “저는 익제님과 같은 것을 생각하고 싶습니다.”

    저를 향한 단호한 눈빛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손끝이 차게 식었다.

    마치 그동안 그녀를 기만한 벌을 받는 것 같았다. 다정한 미소로 그녀의 눈을 가리고, 달콤한 말로 그녀의 귀를 막은 벌.

    “나는…….”

    익제가 마른 손으로 자신의 턱을 문질렀다. 그의 눈동자가 허공을 헤집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한참을 망설이던 그가 마침내 툭 하고 어깨를 떨어뜨렸다. 

    그는 전쟁에서 살아 돌아온 패잔병처럼 비루하게 입을 열었다. 오랫동안 숨겨 왔던 비밀이 그의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나는 그대가 내 곁을 떠나지 않길 바라오.”

    “……저는 익제님의 곁을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그대가 나를 연모해주길 바라오. 내가 어떤 사람이든.”

    마지막 말은 흡사 고집스러운, 철부지 어린아이 같았다. 익제는 그 말을 하고 나서야 괜한 속내를 까발리고 말았다는 듯 곤혹스럽게 혀를 찼다. 

    그는 조금 전 자객이 그랬던 것처럼 채선의 처분을 기다리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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