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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별이 뜨는 밤 (123)화 (123/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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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3

    그들이 지금
    은원군의 등 뒤에 있습니다.

    “그래.”

    고맙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아직은 이른 말이었다. 모든 것은 일생일대의 도박이 성공하고 난 뒤에 해도 늦지 않았다. 때 이른 감사는 공수표에 지나지 않았다.

    익제는 금세 평소와 같은 냉정함을 되찾았다.

    “우리 편에 설 자가 얼마나 되나?”

    “제 제자들이 뜻을 같이할 것입니다. 스승은 낙향하여 관직에서 물러났으나, 제자들의 상당수는 아직 중요한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거기서 잠깐 말을 끊은 이백중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제자를 자랑스러워하는 스승의 얼굴이었다.

    “그중 도성의 중앙군을 통솔하는 자도 있습니다. 도성을 지키는 중앙군의 반은 우리 편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거병할 준비가 완료되어 있으니, 일단 주군께서 황궁만 접수하시면 나머지 일은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그들이 내 편에 선다?”

    익제의 미심쩍은 물음에 이백중이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연판장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현 황제와 그의 수하들이 짜고 벌인 극악무도한 일을 말입니다. 무관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사이, 황제가 바뀌었습니다. 그것은 무관의 충의를 얕본 행위입니다. 현 황제는 권력을 쥐고 난 후, 무관들부터 싹 다 물갈이를 해야 했습니다. 그러지 않은 것이 그의 패착입니다.”

    “누구도 눈치채지 못한 모반이다. 그를 의심하는 자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겠지. 게다가 그는 선황제 폐하께서 돌아가시기 전부터 국정을 운영하고 있었다. 모두 제 사람이라 여겼을 것이다.”

    모르는 말이라는 듯, 이백중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니 패착이라는 것입니다. 무인은 오로지 황제, 한 분만을 섬깁니다. 정치는 서툴러 요직에서 밀리기 일쑤지만, 충의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것이 무인이란 족속입니다.”

    이백중의 목소리는 자부심이 가득했다. 그는 충성스럽고 우직한 무인, 그 자체였다.

    “연판장을 손에 넣은 심준경은 그것을 가지고 저를 찾아왔어야 합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충신들이 많습니다. 시류에 몸을 맡기느라 쉽게 눈에 띄지는 않지만, 불의를 목도 했을 때 목숨을 걸고 일어나는 부류가 바로 그들입니다. 세상은 여태 그런 이들에 의해 바뀌어 왔습니다.”

    “어째, 나더러 들으라고 하는 말인 것 같군.”

    익제의 목소리가 빈정거리는 빛을 띠었다. 이백중이 눈매를 접으며 허허, 소리 내어 웃었다.

    “눈치채셨습니까? 만에 하나, 이 역모가 성공하여 은원군께서 황제의 자리에 오르시면…… 잘하셔야 할 겁니다. 아주 잘.”

    반쯤 농담 같은 말이었지만, 익제는 그것이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나직하게 대꾸했다.

    “알고 있다. 이것이 내 마지막 칼춤이 될 것이다. 나도,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참이거든.”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었다는 듯, 이백중의 눈썹이 휘어졌다. 그러다 이내 그 속뜻을 깨닫곤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하긴. 그분 앞에선 누구든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을 겁니다.”

    “내 부인을 얼마나 봤다고 아는 척인가.”

    익제가 금세 심기가 뒤틀린 표정으로 낮게 혀를 찼다. 퉁명스러운 눈동자가 그를 못마땅하게 쏘아봤다.

    “하하하.”

    이백중이 별안간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면 된다. 무서운 이가 있다면, 언제라도 멈출 수 있으니 말이다.

    그 사이, 익제는 어느새 원래의 화제로 돌아갔다. 

    “허나, 심 장군의 뜻이 옳았을지도 모른다. 반정이 실패하여 아까운 무인들만 목숨을 잃었을지도 몰라. 그땐 이미 현 황제의 세상이었을 테니.”

    “주군을 위해서라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것이 무인입니다. 충의, 그것은 무엇으로도 꺾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잠깐 말을 끊은 이백중이 익제를 빤히 응시했다. 익제가 그 의미를 가늠하려는 듯 눈매를 좁혀 떴다.

    “그들이 지금 은원군의 등 뒤에 있습니다.”

    “!”

    익제는 조용히 숨을 삼켰다. 목덜미에 소름이 돋았고, 등줄기를 따라 전율이 흘러내렸다. 

    충의에 살고, 충의에 죽는 그 수많은 무인이 제 뒤에 있었다. 그의 명 한마디에 달려 나갈 준비를 마치고.

    불현듯, 이백중을 얻은 것이 신의 한 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황자들과 비교하면 익제의 세력은 한 줌의 티끌과도 같았다. 그를 지지하는 신하 역시 전무하다시피 했다.

    그런데 이백중 한 명을 얻음으로써 단번에 황자들과 견줄 수 있는 위치에까지 올라섰다. 

    이백중이 낙향하였을 때, 너도 나도 그 집 문턱이 닳도록 들락거린 연유를 비로소 알 것 같았다.

    늙은 호랑이는 아직도 이빨과 발톱이 건재했다. 아니, 긴 시간 갈고 닦은 그것은 그 어느 때보다 위협적이고 날카로웠다.

    심채선.

    익제는 천천히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백중을 제 사람으로 만들 수 있었던 건 그녀 덕분이었다. 

    따지고 보면, 이 모든 것은 그녀로부터 비롯되었다. 연판장과 이백중, 둘 중 무엇 하나라도 없었다면 거병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익제가 허공을 응시하며 비장하게 읊조렸다.

    “결행은 내일이다.”

    “예.”

    이백중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내일.

    모든 것은 내일 결정이 된다. 사느냐, 죽느냐, 하는 것도.

    ***

    “바람이 찬데 어찌 나와 있었소?”

    처소 문을 열고 들어가던 익제가 뜰을 거닐고 있는 채선을 발견하곤 춘풍 같은 미소를 베어 물었다. 

    그의 기척에 고개를 든 채선이 사박사박, 풀을 밟으며 익제의 곁으로 다가왔다.

    “저녁을 먹고 소화를 시킬 겸 송하와 산보를 하고 있었습니다.”

    익제는 자신의 겉옷을 벗어 그녀의 어깨에 둘렀다. 짐짓 서운한 표정을 지은 그가 송하에게 눈짓을 했다. 눈치 빠른 그녀가 재빨리 몇 걸음 물러났다.

    “저런. 여태 나를 기다린 줄 알았는데, 아니었단 말이오? 예전에는 내가 출타를 하면 돌아올 때까지 뜰 앞을 서성이더니, 그새 애정이 식었나 보오. 부인께서는 잡은 물고기엔 밥을 주지 않는 성향이시오?”

    “그, 그것이 아니라!”

    익제와 나란히 걷던 채선이 금세 당황한 얼굴로 두 손을 저었다. 그러다 푹, 고개를 숙이며 쥐꼬리만 한 목소리로 시인했다.

    “실은 익제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랬소?”

    익제가 환하게 웃으며 섬돌 위로 올라섰다. 그가 채선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녀가 잡으라는 손은 잡지 않고 빤히 쳐다보기만 하자, 익제가 심통 맞은 목소리로 변명했다. 

    “음흉한 속내가 있는 것이 아니오. 넘어질까, 걱정이 되어서 그러는 것이오.”

    “……예.”

    채선이 그의 손을 잡고 섬돌 위로 올라섰다. 기다렸다는 듯, 그가 엄지로 채선의 손등을 은근슬쩍 문질렀다. 

    그녀의 어깨가 굳었지만, 익제는 눈치채지 못한 척 그녀의 소매 사이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읏.”

    기어코 채선이 짧은 신음을 흘리며 어깨를 움츠렸다. 

    송하가 등 뒤에서 가자미눈을 뜨고, 익제의 수작질을 지켜보았다. 절레절레 고개를 젓던 그녀가 얼른 앞으로 뛰어가 방문을 열었다. 

    채선이 부끄러운 듯 송하의 시선을 피하며 익제에게 잡힌 손을 뺐다. 

    “방에 도착하였으니 이제 손을 놓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또 무엇에 심기가 상했는지 익제가 뚱한 표정을 지었다. 

    “흠. 후회하지 않겠소?”

    “예? ……예.”

    채선이 영문 모를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고작 손 좀 놓은 것 가지고 후회라니.

    익제가 산뜻하게 손을 놓았고, 송하는 대관절 무슨 꿍꿍이가 있으신가 하며 그를 흘겨보았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채선이 방 안으로 들어갔다. 익제가 그녀의 치맛자락을 밟았다.

    “으앗!”

    채선의 몸이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그녀의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어이쿠.”

    기다렸다는 듯, 익제가 그녀의 허리를 낚아챘다. 송하가 어디서 개수작이냐는 표정으로 흰 눈을 떴다.

    홑몸도 아니신데! 그러다 행여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쩌시려고!

    소리 없는 외침이 공허하게 방안을 맴돌았다.

    “괜찮소?”

    익제가 그녀를 품에 안으며 다정하게 물었다. 하지만 채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찌푸린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채선은 멍한 표정으로 자신의 발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익제의 목소리가 언뜻 걱정스러운 빛을 띠었다.

    “저런. 많이 놀라셨소?”

    “…….”

    그러나 이번에도 채선에게선 아무런 대꾸가 돌아오지 않았다. 그제야 익제가 초조한 기색으로 혀를 찼다. 

    그가 반쯤 넋이 나간 채선을 불렀다.

    “부인?”

    송하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입술을 삐죽였다. 군대부인이 놀란 것은 안타깝지만, 주인님의 똥줄이 타는 건 고소했다. 

    “…….”

    채선은 가만히 내리뜬 눈으로 침상을 바라보았다. 아니, 조금 더 정확하게는 침상 아래를. 

    방금 내가 보았던 게 무엇일까.

    생각에 잠긴 그녀의 눈동자가 깊게 침잠했다. 치마를 밟고 바닥으로 고꾸라지는 순간, 그녀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체념 어린 한숨을 삼켰다. 

    넘어지는 것쯤이야 아무렇지도 않았다. 코가 깨지는 것도 상관없었다. 그저 익제에게 큰소리친 게 민망했을 따름이다.

    그런데 그때, 그녀의 시야에 낯선 것이 걸렸다. 나무로 깎은 침상 아래의 빈 공간, 그곳에 검은 가죽신의 밑창이 보였다.

    왜?

    “부인?”

    익제의 애면글면하는 목소리에 채선은 그제야 현실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녀는 전전긍긍하는 익제에겐 눈길도 주지 않고, 문 앞에 서 있는 도영을 바라보았다. 

    시선을 느낀 도영이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도영이 영문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부인께서 많이 놀랐나 보구나. 어서 의원을 불러라.”

    익제의 말에 송하가 “예.” 하고 방을 뛰쳐나가려고 했다. 채선이 침착하게 그녀를 불러 세웠다.

    “송하야.”

    “예, 군대부인.”

    “여러 의원 중에 원진을 불러와 주렴. 내게는 그자가 사용하는 약이 가장 잘 맞더구나.”

    “……원, 진이라구요?”

    송하가 두 눈을 끔뻑이며 채선을 바라보았다. 원진은 의원이 아니었다. 그는 익제의 호위무사였다. 그것도 그를 가장 지척에서 모시는.

    채선이 그걸 모를 리 없었다. 

    혹 넘어지며 머리라도 부딪히신 것일까, 바닥에 넘어지기 전에 주인님이 붙드시는 걸 보았는데. 참으로 이상타.

    송하의 고개가 갸우뚱, 모로 기울었다. 채선이 그런 송하를 향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

    뒤늦게 송하가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예, 알겠습니다. 금방 모셔오겠습니다.” 하고 대답한 그녀가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 

    그와 동시에 익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 역시 심상치 않은 기색을 눈치챈 탓이었다. 채선은 도영을 응시한 채 소리 없이 입술만 달싹였다.

    침상 아래에 자객이 숨어 있소.

    “!”

    순식간에 도영의 안색이 변했다. 그녀를 내려다보던 익제가 눈동자만 돌려 침상언저리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위에서 아래로 내리꽂히는 시야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 말은 채선이 고꾸라지지 않았다면, 자객의 존재는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을 거란 말이다. 

    그랬다면, 과연 지금쯤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그녀의 동그란 정수리를 향해 있던 눈동자가 천천히 방안을 훑었다. 익제의 시선은 방 한쪽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병풍에 오래도록 머물렀다.

    “옆방에서 의원을 기다리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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