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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매가 있으시지요?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를 작별이었다. 손자와 같은 익제는 곧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될 것이다. 그 너머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는 알지 못했다.
더없이 광휘로운 옥좌, 혹은 형장의 이슬.
“…….”
한 가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수롭지 않게 시선을 돌린 익제가 풍오의 허리를 걷어찼다. 풍오는 뒤따라오는 천설을 힐끔, 바라본 뒤 고개를 빳빳이 들고 걸음을 내디뎠다.
푸헹.
풍오의 잇새에서 비웃음이 샜다.
하늘은 맑았고, 햇살은 옅은 온기를 품었다. 그러나 뺨을 스치는 바람은 한없이 차가웠다. 바야흐로, 겨울이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
여행은 순탄했다. 익제는 뱃멀미가 심한 채선을 위해 육로를 택했고, 그 탓에 하인들의 여정은 조금 더 고되어졌지만, 누구도 불평을 터뜨리지 않았다.
“불편하지 않소?”
그가 말 등 위에 앉은 채선을 좀 더 바짝 당겨 안으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솜털을 간질이는 따스한 숨결에 그녀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익제는 그 모습을 느긋한 시선으로 지켜보았다. 그의 예상을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 그녀의 반응을.
“가마를 타지 않고.”
채선은 대답 없이 고개만 살랑살랑 저었다. 그녀는 상냥한 손길로 풍오의 갈기를 천천히 쓸어내렸다.
별안간 풍오의 기세가 오만해졌다. 젖은 까마귀 털처럼 새까만 흑마는 세상에서 가장 잘난 말이라도 되는 듯, 한발 한발 기세등등하게 내디뎠다. 흥흥, 내뿜는 콧김이 거칠었다.
익제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얘기를 해 보시오.”
“무슨 얘기를요?”
“아무 얘기든. 이제까지 있었던 불운한 사건이라거나.”
아니 남의 불운을…….
두 눈을 뾰족하게 뜨던 채선이 다음 순간, 어깨를 떨구었다. 그녀는 익제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불운한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앞둔 일이 무엇인지 짐작하고 있는 탓이다. 그것은 무척 큰 행운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채선이 고개를 들며 나직하게 말했다.
“초여름에 이곳을 지날 때만 해도 색이 선명하였는데, 그 사이 강물도, 나무도, 풀잎도, 모두 색이 바랬습니다.”
“그렇군.”
익제는 그제야 그 사실을 눈치챈 사람처럼 새삼스러운 눈으로 제 앞에 펼쳐진 풍경을 바라보았다. 잿빛이었다. 강도, 나무도, 풀도.
하지만 그조차 아름답게 느껴지는 걸 보면, 아마 제가 미친 모양이었다. 그 잿빛 풍경 속에서 오직 채선만이 선명한 색채를 지니고 움직였다.
그녀는 보랏빛 저고리에 손등을 숨기고, 물빛 치마를 흩날렸다. 젖은 낙엽 같은 갈색 눈동자는 밤하늘의 별처럼 명멸했고, 단풍처럼 붉게 물든 목덜미는 그의 시야를 어지럽혔다.
그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익제가 채선에겐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언젠가, 그대와 함께 이 풍경을 다시 볼 수 있으면 좋겠군.”
문득, 채선의 눈매가 이지러졌다.
***
채선은 눈앞에 있는 사내를 보며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의 잇새로 놀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니……!”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그녀의 눈동자에 뒤늦은 반가움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 기색을 읽은 이백중이 흐뭇한 얼굴로 인사를 올렸다.
채선이 허겁지겁 고개를 끄덕였다.
“예, 잘 지내셨습니……까.”
무의식적으로 한 가령을 찾아 굴러가던 눈동자가 멀뚱멀뚱 서 있는 송하를 일별했다. 그제야 채선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가령은 향덕원에 있지.
이곳에는 그녀를 나무랄 사람이 없었다. 아니다. 한 가령도 최근에는 잔소리를 하지 않게 되었으니, 그가 있었다고 해도 타박을 들을 일은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그녀가 심 장군의 딸이라는 걸 철석같이 믿게 된 후로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엔 어떻게……?”
채선이 의아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곳은 인애대군의 영지였고, 그들이 있는 집은 인애대군의 별저였다. 가는 길이 고단할 터이니 쉬었다 가라며, 그가 내어준 집이라고 하였다.
그곳에 이백중이 있는 게 몹시 의아하여 저도 모르게 물음을 던지던 채선이 이내 입을 다물었다.
한 박자 늦게 그 이유를 짐작한 탓이었다. 그녀의 얼굴이 문득, 침울한 빛을 띠었다.
이백중이 자애로운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준경의 딸이라고요?”
“아……!”
채선이 저도 모르게 나직한 탄식을 흘렸다. 그녀는 아직도 자신의 아비가 그리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한 가령이 단단히 오해를 한 게 틀림없다고 말이다.
채선이 뭐라고 답을 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하는데, 이백중이 눈매를 누그러뜨리며 말했다.
“닮아도 너무 닮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렇군, 준경의 딸이라.”
그가 회한에 젖은 눈을 들어 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게 아니라고 말하려던 채선이 시무룩하게 머리를 떨구었다.
누구도 그녀의 말을 새겨들을 마음이 없었다. 채선의 외침은 공허했다.
“아끼는 제자의 여식이라고, 이제 와 친정 아비 노릇을 할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오.”
비딱한 눈으로 두 사람을 지켜보던 익제가 나직하게 경고했다. 채선은 두 뺨을 발갛게 물들이며 눈동자를 굴렸다. 인애대군의 별저에도 쥐구멍이 있을까, 하고.
너털웃음을 터뜨린 이백중이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그의 시선은 채선의 정수리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 녀석이 사라진 후, 백방으로 수소문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내 딸도 성에 차지 않는다고 퇴짜를 놓은 놈이 말도 없이 혼인을 했다고 하니 부아가 치밀지 않겠습니까.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여인과 혼인을 하였는지 궁금하여 좀 더 알아보았습니다. 그런데 딸 쌍둥이를 낳았다는 소식을 끝으로 행방이 묘연했습니다.”
“!”
일순, 채선이 두 눈을 부릅떴다. 그녀가 번쩍, 고개를 쳐들곤 그를 바라보았다. 갈색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심준경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내는 여럿 있을 법했다. 그런데 딸 쌍둥이를 가진 심준경이란 사내는 세상에 단 하나뿐일 것 같았다.
정말로 그분이 저의 아버지인가. 심 장군이 내 아버지라고?
채선의 심장이 쿵쿵, 소리를 내며 뛰기 시작했다. 자신의 출신성분이 수직 상승한 데 대한 희열은 아니었다.
그보다 제 아비가 그리 대단한 사람이었다는 게, 한 가령의 이야기 속에 등장한 사내가 정말로 자신의 아비가 맞았다는 게 놀라웠을 따름이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리웠다.
그녀를 안아주던 단단한 팔과 넉넉한 웃음이. 아비의 품을 독차지하려고 다투던 그 시절의 이선이.
이백중이 느슨한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자매가 있으시지요?”
처음 그를 만난 날, 그에게 받았던 질문이다. 그때는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었다. 태부의 조카에게는 여자 형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채선이 울 것 같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가, 있습니다.”
심이선.
심준경의 여식이자, 그녀의 언니였다.
“그렇군요.”
이백중이 애틋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쩌면 그녀가 아니라, 그녀와 무척이나 닮은 그의 제자를 보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 순간.
“한 번만 더 내 부인을 그런 눈으로 쳐다보면 눈깔을 뽑아 버린다고 말했을 텐데.”
익제가 서늘하게 뇌까렸다.
그제야 이백중이 태연하게 시선을 거두었다. “큼.” 짧은 침음을 흘린 그가 허공으로 눈길을 돌렸다.
채선이 익제를 돌아보며 큰 눈을 깜빡였다. 익제가 대수롭지 않은 태도로 빙긋, 입꼬리를 당겼다.
“이백중과 나는…….”
“예, 그런 농담도 주고받으실 정도로 가까운 사이시죠.”
채선이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불현듯, 이백중이 똥 씹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제가 언제 익제와 그렇게 막역한 사이가 되었냐는 말이다.
서늘한 눈으로 그를 노려본 익제가 금세 온화한 표정으로 채선을 내려다보았다.
“남은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이만 안으로 들어가 쉬시오. 괜한 영감 때문에 홑몸이 아닌 부인의 건강이 상할까, 걱정이오.”
“……예.”
괜한 영감, 과보호.
익제의 말속에는 지적할 부분이 많았다. 하지만 채선은 얌전히 걸음을 옮겼다. 그가 이백중과 나누어야 할 말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채선의 뒷모습이 멀어지고 나서야 이백중이 보란 듯이 익제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괜한 영감이라 죄송합니다.”
“알면 두 번 다시 내 부인을 그런 눈으로 보지 마라. 눈깔을 뽑는다는 건 농담이 아니다. 늘그막에 앞을 못 보면 그 신세가 얼마나 처량하겠나.”
만만치 않은 사내였다. 그를 돕기 위해 열 일을 마다하고 달려온 신하에게도 아낌없이 악담을 퍼붓는 사내.
이백중이 가벼운 웃음을 흘렸다. 그런 사내를 택한 건 자신이었으니, 이제 와 남에게 불평을 할 수도 없었다.
유약하셨던 선황 폐하와는 아주 딴판이시군. 국태부인께서도 자애롭기로 이름이 나신 분이신데, 대관절 누굴 닮으셨나.
“그건 그렇고.”
이백중이 속으로 무엄한 생각을 떠올리는데, 익제가 집무실을 향해 걸음을 옮기며 물었다. 이백중은 얼른 허리를 펴고 그를 따라갔다.
운을 떼어 놓고는 묵묵히 걷기만 하던 익제가 방안에 도착해서야 뒷말을 이었다. 그의 시선이 날카로운 빛을 띠었다.
“병사들은 모두 도착했나?”
이백중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방금까지 허허실실로 하던 표정을 버리고, 노련한 장수로 변모했다.
“이미 반 이상이 도착했고, 나머지 인원들도 오늘 밤 안으로 당도할 것입니다. 이곳에서 도성까지 배를 타고 이동하면 반나절. 언제든 명령만 내리시면 됩니다.”
익제가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깊은 침묵이 흘렀다. 이백중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참 후, 익제의 담담한 목소리가 묵직한 적막을 갈랐다.
“살아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 성공보다 실패 확률이 높은 도박이다.”
“남은 생에 미련을 가질 정도로 젊지 않으니 괜찮습니다.”
“자네뿐 아니라 일가가 몰살당할 수도 있는 일이다. 이것은.”
어려운 말을 하려는 듯 잠시 말을 끊은 익제가 조용히 숨을 들이켰다.
“역모고, 반역이다.”
또다시 위태로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역모.
그 단어가 주는 압박감이 상당했다. 그 길의 끝에는 모 아니면 도, 두 가지 결과만이 있었다.
성공한 역모는 광휘로운 권력을 안겨주겠지만, 실패한 역모를 기다리는 건 죽음뿐이었다.
찢어질 듯이 부푼 풍등처럼 아슬아슬한 적막을 깨고, 이백중이 입을 열었다.
“역모가 아니라 빼앗긴 황위를 되찾는 것입니다. 간악무도한 무리들이 선황 폐하를 독살하고 황위를 찬탈하였으니, 신하 된 자로 어찌 두고만 보겠습니까? 이것은 만고에 길이 남을 정의로운 전쟁입니다.”
“그건 우리 입장이고.”
익제가 가벼운 어조로 반박했다. 이백중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대꾸했다.
“반기를 드는 자가 이 정도 믿음도 없다면 어떻게 목숨을 걸겠습니까? 무인을 움직이는 것은 주군께서 기치로 내건 명분, 그것밖에 없습니다.”
주군.
그 말에 익제가 조용히 주먹을 말아 쥐었다. 이백중은 자신의 의지로 익제의 신하가 되는 길을 택했다.
가장 세력이 미약하고 볼품없는 은원군의 신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