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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별이 뜨는 밤 (121)화 (12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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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1

    안 되겠나?

    “주군께서 광무대군의 손아귀에 있던 제 모친을 구해주셨습니다. 우리 두 사람은 광무대군의 눈을 피해 낯선 땅에 몸을 숨겼습니다. 주군께서 주신 돈으로 궁핍하나마 머물 곳을 구하고, 저는 목수 일을 도우며 날품을 팔았습니다. 덕분에 모친께서는 배곯지 않고 편히 지내다 가셨습니다. 마지막에 제 손을 잡으시며,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저와 시간을 보내게 되어 행복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거기서 잠깐 말을 끊은 효명이 고개를 들어 익제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결연한 기개를 품었다.

    “제 모친은 저를 이 땅에 묶어 놓는 마지막 미련이셨습니다. 저는 비로소 자유의 몸이 되었고, 언제 어디로든 떠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돌아온 것입니다.”

    “그래서 돌아왔다?”

    “제가 감히 주군을 배신하고도 살고자 했던 것은, 홀로 계신 모친에 대한 걱정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어깨의 짐을 내려놓았으니, 그때 받지 못했던 벌을 받고자 합니다. 죽음으로 그 빚을 갚겠습니다.”

    “죽음.” 

    그 말을 중얼거리던 익제가 비릿한 혼잣말을 흘렸다.

    “하, 이놈이고 저놈이고.”

    잠자코 효명의 이야기를 듣던 한 가령이 한발 앞으로 나섰다. 그가 밉살맞은 목소리로 거들었다.

    “주군. 저리 원하는데 목을 치십시오. 한 번 배신한 자는 두 번, 세 번 배신할 수 있습니다. 누런 떡잎은 미리 싹을 자르는 것이 낫습니다.”

    익제가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눈이 마주친 원진은 그의 명에 따르겠다는 듯, 무심한 얼굴로 고개를 숙일 따름이었다.

    “한 가령.”

    익제가 평연한 어조로 그를 불렀다. 노인이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주름진 입매가 연신 실룩거렸다.

    “예.”

    “한 가령도 알다시피 나는 남을 쉽게 믿는 성격이 아니다. 하물며 수하에게 두 번이나 뒤통수를 맞은 바에야.”

    두 번.

    한 가령은 그게 언제를 말하는지 알고 있었다. 첫 번째는 효명이 그의 등에 칼을 꽂았을 때, 두 번째는 그의 호위무사가 채선을 꾀어냈을 때. 

    “나는 지금이라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효명의 목을 칠 수 있다.”

    한 가령이 당연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주군. 자고로, 남들 위에 서는 자는 타인을 쉽게 믿어선 안 됩니다. 그들 위에 군림하기 위해선 압도적인 힘을 과시해야 합니다. 때로는 무자비하게 보일지라도, 체제를 유지하는 것은 공포입니다. 망설이지 마십시오.”

    “그런데 말이야, 한 가령.”

    “……예.”

    장광설을 늘어놓던 한 가령이 문득, 불안한 얼굴을 했다. 

    익제가 천천히 몸을 돌려 그를 마주보았다.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나는 그렇게 무정하고 몰인정한 사람인데 말이야, 좀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

    “……주군.”

    “내가 세상에서 가장 근사한 사람인 줄 아는 내 부인의 환상에 어울리는, 다정하고 사려 깊은 사람이 되고 싶단 말이지. 피 냄새가 날까 전전긍긍하며 살갗이 벗겨질 때까지 몸을 씻는 건, 이제 지겨워.”

    “…….”

    “안 되겠나?”

    픽, 익제가 입꼬리를 당겼다.

    그 자조 섞인 웃음에 한 가령이 주름에 파묻힌 눈을 부릅떴다. 제 앞에 있는 사람이 익제가 맞는지, 다시 한번 확인하려는 듯.

    불현듯,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왜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단지 나이가 들어서 눈물샘이 고장이 난 것일 수도 있었고, 웃고 있는 그의 얼굴이 애틋해 보였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혹은, 지난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 탓일 수도 있었다.

    방금까지 성난 목소리로 열변을 토하던 한 가령이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그는 마치 새로운 제왕의 탄생을 눈앞에서 목도한 듯, 장엄한 분위기에 압도당했다.

    이윽고 한 가령이 자신의 황제를 향해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주군의 뜻대로 하십시오.” 

    ***

    “무슨 생각을 하는가?”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이선은 노란 달에서 눈을 떼고 천천히 몸을 돌렸다. 방문이 열리는 소리도 듣지 못했는데, 어느새 태자가 등 뒤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녀가 나른하게 입꼬리를 당겼다.

    “오늘은 안 오시는 줄 알았습니다.”

    태자는 대꾸 없이 의자에 몸을 묻었다. 그녀는 쌀쌀한 바람이 들어오는 창을 닫고, 그의 곁으로 걸어갔다. 

    태자가 사뿐사뿐, 걸어오는 이선을 이글거리는 눈으로 응시했다. 그 강인한 안광을 맞닥뜨릴 때면 그녀는 늘 가벼운 전율을 느끼곤 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고, 솜털이 곤두섰다. 

    그는 귀인이 필요한 게 아니었다. 흉인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그에게 그녀는 오직 심이선일 뿐이었다.

    그것은 이선의 발밑을 흔들었다. 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자 하는 야망과 그냥 이대로도 좋을지 모른다는 만족감이 혼재했다.

    무뚝뚝하던 태자의 눈매가 언뜻 만족스러운 빛을 띠었다. 그가 이선을 향해 한 손을 내밀었다.

    잠시 주춤하던 그녀가 그 손을 잡았다. 태자가 슬쩍 힘을 주었고, 앗 하는 사이 이선은 그의 무릎에 앉아 있었다. 

    살며시 시선을 떨구는 그녀의 모습은 수줍은 듯 보이기도 했고, 반대로 유혹하는 듯 보이기도 했다.

    “무엇이 갖고 싶은가.”

    태자가 그녀의 잘록한 허리를 안으며 물었다. 화려한 궁과 아름다운 비단, 눈부신 보석. 그는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 무엇이든 이루어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선이 달빛을 머금은 눈으로 그를 마주보았다.

    “오갈 데 없는 저를 거두어주신 것만으로도 그 은혜를 갚을 길이 없는데, 여기서 더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욕심이 없군.”

    태자가 아쉬운 듯 미간을 접으며 한숨을 쉬었다. 그가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이선은 조심스럽게 그의 어깨를 감쌌다.

    욕심이 없다.

    이선은 태자 몰래 웃음을 삼켰다. 

    그녀는 누구보다 욕심이 많았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고작 비단이나 보석 따위가 아니었다. 그녀는 가장 고귀한 여인이 되고 싶었고,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르고 싶었다.

    광무대군의 부인이 되었을 때, 그녀는 천지가 개벽한 것처럼 놀랐다. 그곳에 놓인 것은 이제까지 그녀가 알던 세상이 아니었다. 

    손끝만 까딱해도 하인들이 알아서 움직이고, 그녀를 떠받들었다. 그녀가 원하는 건 무엇이든 손에 들어왔다. 평생 먹어보지 못한 기름진 음식이 젓가락에 닿지도 못하고 버려졌다.

    그녀에겐 하늘과 땅이 뒤집히는 것만큼이나 커다란 충격이었다. 

    거기에 만족할 줄 알았다. 그럴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그녀는 더 위가 있다는 걸 깨닫고 말았다. 아무리 하인들이 그녀에게 굽실거린다고 한들, 이선은 다른 부인들 앞에서 기를 펼 수 없었다.

    그래서 더 높이 올라가고 싶었다.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여인이 되고 싶었다. 모두가 우러러보는 단 한 명의 여인.

    그리고 마침내 첫발을 내디뎠다. 태자의 궁이라니. 아직 정식 직첩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태자는 이선에게 푹 빠져 있었고 매일 밤 그녀의 처소로 향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서로를 처음 본 순간, 형언할 수 없는 감각이 그녀의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건 아마 태자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두 사람은 운명처럼 뜨겁게 빠져들었다.

    듣기로는 그녀에게 어떤 직첩을 내릴지 논의 중이라고 했다. 태자는 그녀를 빈의 자리에 앉히고 싶어 했고, 태자비는 광무대군의 부인이었던 그녀를 태자궁에 들이는 것부터 반대했다.

    태자의 눈에 든다는 건 내명부 여인들을 모두 적으로 돌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선은 그들을 모두 꺾을 자신이 있었고, 끝내는 태자비의 자리마저 거머쥘 야심에 가득 차 있었다.

    “달이 밝아…… 부끄럽습니다.”

    이선의 잇새로 수줍은 목소리가 비어져 나왔다.

    닫힌 창 너머에서 휘영청 밝은 달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태자가 피식, 가벼운 웃음을 흘리며 그녀를 안아 들고 침상으로 향했다.

    그가 한 손을 뻗어 천개의 끈을 풀었다. 후두둑, 천개가 쏟아져 내렸다. 그곳에 오직 둘만의 세상이 펼쳐졌다. 

    두 눈을 감는 이선의 머릿속에 불쑥, 익제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눈동자에서 불이 튀었다.

    한 번은 내 앞길을 막았지만, 두 번은 안 돼.

    그녀가 태자의 목을 끌어안으며 입매를 비틀었다. 하얀 달빛이 그녀의 어깨를 툭 건드리고 지나갔다.

    “은원군은,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이선이 가쁜 숨을 내쉬며 물었다. 태자는 난데없이 등장한 다른 사내의 이름이 불쾌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그 기색을 눈치챈 그녀가 재빨리 덧붙였다.

    “늘 마음 한구석이 불안합니다. 혹, 그가 태자 전하께 위해를 끼칠까. 손에 넣은 연판장으로 무슨 짓을 꾸밀까……, 그것이 두려워 단 하루도 마음 편히 잠들 수가 없습니다.”

    태자가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뺨을 훑어 내렸다.

    “걱정할 것 없다. 듣자 하니, 곧 풍주로 내려간다더군.”

    “풍주요?”

    “그곳에서 겨울을 보내고 올 예정이라고 하였다. 허나, 그것이 그의 마지막 여정이 될 것이다. 그는 두 번 다시 도성에 돌아올 수 없을 것이다. 살아서는.”

    이선이 두렵다는 듯 어깨를 떨었다. 태자가 그런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부드러운 입술을 묻었다. 

    그제야 이선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

    “준비는 끝났소?”

    “예.”

    익제의 등 뒤에는 수많은 하인이 도열해 있었다. 그는 뚱한 표정으로 서 있는 화영을 보며 희미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는 풍주로 돌아가는 것이 못마땅한 듯 연신 불퉁한 얼굴로 땍땍거렸다. 익제가 그 이유를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익제의 관심 밖이었다. 화영의 기분이 어떻든, 그가 신경 쓸 일은 아니라는 뜻이다.

    심드렁하게 고개를 돌린 익제가 채선과 눈이 마주치자 금세 다정한 미소를 머금었다.

    “긴 여정이 될 터이니, 언제라도 몸이 편찮으면 얘길 하시오.”

    “가마 안에 편히 앉아갈 제가 불편할 일이 뭐 있겠습니까?”

    “홑몸이 아니지 않소.”

    그 말에 채선이 살포시 시선을 떨구었다. 요즘 들어 몸이 무거워지긴 했다. 하는 일 없이 잠이 쏟아지기도 했고, 괜한 허기가 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웃기만 했다. 자신의 어리광으로 익제의 짐을 더하고 싶진 않았다. 그의 앞에 무엇이 놓여 있는지 알고 있는 탓이다.

    평소와 다름없는 여정이었다. 세 번째 풍주 나들이에 하인들은 능숙하게 짐을 꾸렸고, 익숙하게 길을 나섰다.

    채선은 풍오의 콧잔등을 다정하게 어루만지곤 가마에 올랐다. 풍오는 그녀가 곧 가마에서 내려 자신의 등에 올라탈 걸 안다는 듯, 기분 좋게 거드름을 피웠다.

    “출발하자.”

    “예.” 

    기다란 행렬이 뱀처럼 꾸물꾸물 움직이기 시작했다. 

    길을 나서는 하인과 배웅하는 하인이 여상하게 인사를 나누었다. 춥고 지난한 겨울이 끝나고, 꽃 피는 봄이 오면 다시 만나자며 서로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익제가 문득, 고개를 돌렸다. 한 가령과 눈이 마주쳤다. 

    주름진 눈꺼풀 안에 숨은 건조한 눈동자가 습기를 머금었다. 그는 회한이 가득한 눈으로 익제를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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