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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별이 뜨는 밤 (120)화 (12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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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도 귀인의 별 덕분인가.

효명의 얼굴이 딱딱하게 변했다. 할 이야기라니. 그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처지였다. 이것으로 은혜를 갚았다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나는 네게 들을 이야기가 있다.”

익제가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애초에 효명을 살려둔 것은 그의 의지가 아니었다. 자신을 배신한 자는 그게 누구든 가혹한 대가를 치러야 마땅했고, 익제는 충분히 그럴 수 있는 냉혹한 성정의 소유자였다.

내가 왜 저놈을 살려두었더라?

길게 생각할 것도 없었다. 채선이었다. 그녀의 동그란 눈을 들여다보는 사이, 그의 마음이 바뀌었다. 그래서 생전 하지도 않던 아량을 베풀었다.

그런데 그자가 돌아와 자신의 목숨을 구했다. 죽음의 칼날이 목구멍에 드리워진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이것도 귀인의 별 덕분인가.

“웃기는 소리.”

익제는 제 귀에만 간신히 들릴 정도로 나직한 혼잣말을 내뱉었다. 그녀가 귀인의 별이라서가 아니었다. 심채선이기 때문이다. 

동그란 갈색 눈동자에 오롯한 진심을 담아 저를 올려다보는 그녀였기에 그의 마음이 움직인 것이었다. 

“시각이 늦었으니 내일 이야기하지. 한 가령은 지금 당장 이백중에게 서신을 띄워라.”

그 말을 끝으로 익제가 방을 나섰다. 킁킁, 소맷부리의 냄새를 맡던 그가 뒤따르는 하인을 향해 명령했다.

“목욕부터 해야겠다.”

“예. 지금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등 뒤의 하인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익제는 싸늘한 복도를 가로지르며, 어둠에 물든 허공을 쏘아보았다.

***

침상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던 채선은 문이 열리는 소리에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익제가 한 손으로 늘어진 천개를 걷었다. 그 사이로, 다정한 미소를 머금은 그의 얼굴이 드리웠다.

덜 마른 머리카락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고, 그의 어깨는 이미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저런. 시각이 늦었는데 여태 안 자고 나를 기다렸소?”

“예. 이야기가 길어지셨나 봅니다.”

익제가 침상으로 올라가며 그녀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그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던 채선이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혹,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바깥채가 소란스럽던데.”

“일이라니. 내가 들어오지 않아 하인들도 잠을 이루지 못했던 모양이오. 인애대군께서 어찌나 한잔하고 가라며 붙잡던지. 대작을 하느라 조금 늦었소. 피곤할 터인데 먼저 자지 않고.”

익제가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로 웃었다. 

그 말에 채선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동그란 갈색 눈동자는 여전히 염려스러운 기색을 담고서 익제의 뺨을 훑었다.

“제가 피곤할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술 냄새가 안 납니다.”

“혹, 부인이 싫어할까 열심히 씻고 와서 그러오.”

“싫어하다니요?”

채선이 깜짝 놀란 얼굴로 펄쩍 뛰었다. 그러고도 모자랐는지 이내 두 손까지 휘휘 내저었다. 

그 모습을 보던 익제가 문득 떠오른 기억에 슬며시 입꼬리를 당겼다. “그러고 보니.” 하며 운을 떼는 그가 나른하게 속삭였다.

“처음 부인과 함께 풍주로 가던 날, 지방 유지의 집에서 하룻밤 묵었던 적이 있소.”

“예, 기억납니다.”

그녀는 언제를 말하는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그들이 올리는 잔을 거절하지 못해 얼큰하게 취해 돌아왔던 밤.”

거기서 잠깐 말을 끊은 익제가 그녀의 귓가로 가만히 몸을 숙였다. 은근한 목소리가 그녀의 솜털을 간지럽혔다.

“그대가 내 옷을 벗겼지.”

“오, 옷을 벗기다니요?”

채선이 또다시 펄쩍 뛰었다. 익제가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눈썹을 휘었다.

“내 말이 틀렸소?”

“펴, 편히 주무시라고 신발을 벗겨 드리고, 허리띠를 풀어 드리고, 옷깃을 느슨하게 풀어헤친 것밖에…….”

“세간에서는 그런 걸 두고 옷을 벗겼다고 표현하오만.”

“그, 으…….”

채선이 제법 억울한 표정으로 입술을 달싹였지만, 제대로 된 항변이 나오지 않았다. 기어코 박장대소를 터뜨린 익제가 그녀를 덥석, 품에 안았다. 

“아하하.”

바르작거리던 채선이 이내 체념한 듯 몸을 축 늘어뜨렸다. 목덜미로 차가운 물방울이 떨어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익제는 두 눈을 감고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그녀의 체취가 그의 마음을 누그러뜨렸다.

“조만간 다시 풍주에 내려갑시다.”

“풍주에요?”

채선이 빠끔, 고개를 들었다. 느릿하게 눈을 뜬 익제가 금세 다정한 미소를 머금었다. 굽은 눈매가 온화했다.

“어머니께서 부인을 몹시 보고 싶어 하오.”

“예, 저도 국태부인이 그립습니다.”

“바다가 있어 겨울에는 이곳보다 따뜻하다오. 그곳에서 추운 겨울을 나고 오는 것도 좋겠지.”

그의 말에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던 채선이 망설이는 기색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익제가 그런 그녀를 빤히 응시했다. 어서 말해 보라는 듯.

한참 주저하던 채선이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같이…… 가시는 거죠?”

“…….”

익제는 그녀의 갈색 눈동자를 조용히 들여다보았다. 동그란 눈망울이 걱정과 불안으로 흔들렸다. 어쩌면 그녀는 그가 말하지 않은 결심을 알아차린 것인지도 모른다. 

풍주에 가는 진짜 이유.

가끔 그럴 때가 있었다.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휘적휘적한 그녀가 누구보다 날카롭게 그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때가.

익제가 다정한 손길로 그녀의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물론이오. 실이 가는 데 바늘이 가고, 꽃이 피는 데 나비가 날아오는 것처럼, 그대가 가는 곳에 내가 가지 않을 수 있겠소?”

그제야 채선이 도로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그녀의 표정은 여전히 한 줌의 불안을 품고 있었다. 

덜컹, 덜컹.

바람이 닫힌 창문을 마구 흔들었다. 익제의 품에 안긴 채선이 고개만 돌려 천개 너머의 창을 바라보았다. 

창문에 비친 나무 그림자가 기기괴괴한 모양으로 춤을 추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익제가 좀 더 강하게 그녀를 당겨 안았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싸늘한 느낌이 사라지지 않았다.

***

“요즘 얼굴 보기가 힘드네. 바쁜 일이라도 있는가?”

채선의 말에 화영이 뜨끔한 얼굴로 눈동자를 굴렸다. 이리저리 굴러다니던 눈동자가 결국 갈 곳을 잃은 채 다시 채선을 향했다. 

“바쁜 일은요. 어제도 뵈었지 않습니까.”

“급한 볼일이 있다며 부리나케 사라지는 뒤꽁무니만 보았는데.”

“음.”

화영이 시선을 피하며 대답을 흐렸다. 두 사람에게 차를 가져다주던 송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한위대군…….”

“으아아악!”

송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화영이 꽥, 하고 비명을 질렀다. 깜짝 놀란 송하가 찻잔을 놓쳤다. 달그락, 요란한 소리가 방안을 울렸다. 

찻물이 조금 넘치긴 하였으나, 채선은 신경 쓰지 말라는 듯한 손을 휘적휘적 저었다. 그녀가 태연하게 찻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화영이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신경질을 냈다.

“아니, 하라는 일은 하지 않고 남의 이야기만 지껄인다더냐? 소문은 또 무엇이냐?”

송하가 다 알고 있다는 듯한 눈으로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채선이 “그건 그렇고.” 하며 화제를 바꾸었다.

“은원군께서 곧 풍주로 가신다고 하였으니, 자네도 준비를 하게.”

“풍주요?”

화영은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 그녀의 안광에 채선이 주춤거리며 상체를 뒤로 물렸다.

“갑자기 풍주는 왜 간다는 것입니까?”

“그곳에서 겨울을 나고 오기로 하였네.”

“저는 안 가겠습니다.”

화영이 고집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채선은 그 대답이 의외였던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것으로도 모자랐는지, 화영은 못이라도 박듯 다시 한번 같은 말을 반복했다.

“저는 이곳, 도성에 있을 것입니다. 풍주에는 돌아가지 않겠어요.”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던 채선이 천천히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녀가 차분하지만 강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가야 하네.”

“예?”

그것은 채선답지 않은 단호함이었다. 화영이 믿기지 않는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희미하게 눈살을 찌푸린 화영이 미심쩍은 투로 되물었다.

“가야, 한다고 하셨습니까?”

“반드시 가야 하네. 그러니 자네도 미리 준비를 해두게.”

화영은 망연한 시선으로 그녀를 보았다. 

채선은 평소보다 훨씬 강단 있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고집을 부리면 못 이긴 척 져주던 그녀가 아니었다. 바늘 들어갈 틈도 없이 단단해 보였다.

화영을 마주보던 채선이 문득, 입꼬리를 당겼다. 화영이 두 눈을 크게 떴다. 어째서인지 웃고 있는 그녀의 표정이 당장이라도 울 것처럼 아련해 보였던 탓이다. 

그래서 화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더 이상 억지를 부리지도 못했다. 

찻잔으로 시선을 떨군 채선이 한숨 같은 혼잣말을 떨구었다.

“다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네. 아마도, 꽃피는 봄이 오면.”

***

“죽었다고?”

원진의 보고에 익제가 미간을 찌푸렸다. 방 안에 있던 한 가령과 효명도 덩달아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예. 저희가 추격을 시작한 이후, 자객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즉시 사병을 네 개 조로 나누어 그들의 뒤를 쫓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중 둘을 붙잡았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그 자리에서 목숨을 끊었습니다.” 

“하.”

익제가 싸늘한 조소를 흘렸다. 천천히 고개를 든 그가 원진에게 묻는 듯한 시선을 던졌다. 그 의미를 눈치챈 원진이 고개를 저었다. 

“정체를 추측할 수 있는 어떠한 물건도 소지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렇단 말이지.”

익제의 눈매가 가느스름해졌다. 그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허공을 응시했다. 그러다 불쑥, 효명을 쳐다보았다.

“그건 그렇고.”

그의 목소리가 진중한 빛을 띠었다.

“내게 할 말이 있지 않던가.”

효명은 제게 꽂히는 시선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끝내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두 눈을 꾹 감았다 뜬 그가 느릿하게 심호흡을 한 후 입을 열었다. 

“주군을 배신한 죄는 달게 받겠습니다.”

“내가 네 목을 치더라도?”

“……예. 각오하고 왔습니다.”

효명이 털썩,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그는 자신의 처분을 익제에게 맡기려는 듯 고개를 늘어뜨리고 깊게 침묵했다. 

한 가령이 못마땅한 눈으로 혀를 찼다. ‘저리 원하는데, 당장이라도 목을 치십시오!’라는 말이 하고 싶은 표정으로. 말만 하면 알아서 칼을 대령할 기세였다.

“내가 네 목을 칠 걸 알면서도 돌아온 연유가 무엇인가.”

효명은 다시 한 번 눈을 감았다. 그의 얼굴 위로 미처 숨기지 못한 슬픔과 애통함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그는 금세 불안정한 감정을 갈무리하고, 담담하게 대꾸했다.

“모친께서 돌아가셨습니다.”

한 가령은 주름진 눈을 일그러뜨렸고, 원진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익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눈으로 효명을 바라보았다.

효명이 느릿하게 뒷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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