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
자네가……!
괴한 두 명이 말에서 떨어졌다.
그제야 자객들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남은 일곱 명의 괴한들은 어디에서 화살이 날아왔는지 찾으려는 듯, 긴장한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영문을 알 수 없는 건 익제와 원진 역시 마찬가지였다. 호위무사는 아니었다. 그들은 아직 석중교에 발이 묶여 있을 터였다.
향덕원에서 보낸 원군도 아니었다. 안타깝게도 그곳 사람들은 익제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고 있을 터였다.
두 사람이 눈짓을 주고받는 찰나, 어둠 속에서 한 사내가 나타났다. 익제는 두 눈을 가늘게 뜨고, 다가오는 이의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러나 짙게 드리운 그림자 탓에 그자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마침내 가까이 다가온 그가 달빛 아래에 모습을 드러낸 순간.
“…….”
“!”
익제는 눈살을 찌푸렸고, 원진은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사내는 들고 있던 활을 어깨에 둘러메고, 허리에 찬 검을 뽑았다. 그가 천천히 말을 몰아 익제의 등 뒤로 다가왔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익제가 나지막하게 그의 이름을 뱉었다.
“효명.”
“자네가……!”
원진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효명이 서슬 퍼런 눈으로 자객들을 노려보며 대꾸했다.
“지금은 한가하게 이야기나 나눌 때가 아닌 듯합니다. 주군의 뒤는 제가 지키겠습니다.”
한때, 익제의 등에 검을 꽂았던 수하가 그의 뒤를 지키겠다고 말했다. 효명은 말을 하고 나서도 익제가 어떻게 반응할지 두려운 듯, 긴장된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무심하게 그를 응시하던 익제가 이윽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효명은 울컥, 감정이 북받치는 얼굴로 턱을 다물었다.
그는 주군을 배신한 수하였다. 그러나 주군은 그를 살려주었다. 그뿐 아니라, 그의 모친까지 구해주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그에게 등을 맡겼다. 그에게 남은 길은 주군에 대한 은혜를 갚는 것뿐이었다. 설령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길은 내가 뚫겠네.”
원진이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역시 효명에게 등을 맡겼다. 효명은 그들의 믿음에 보답하려는 듯,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 마음대로.”
그때, 자객 하나가 효명을 향해 달려들었다. 효명은 능숙하게 허리를 활처럼 뒤로 젖혔고, 자객의 칼은 방금까지 그의 가슴이 있던 곳을 지나갔다.
효명이 그 자세 그대로 검을 휘둘렀다. 날카로운 칼날이 자객의 손등을 베었고, 자객은 쥐고 있던 검을 떨어뜨렸다.
그의 의도를 눈치챈 원진이 재빨리 자신의 검을 뻗어 떨어지는 자객의 검을 툭 하고 쳐올렸다.
효명이 튀어 오른 검을 낚아챘다. 그가 칼날을 잡고, 손잡이를 익제에게 건넸다.
“흠.”
검을 받아든 익제가 그것을 몇 번 허공에 휘둘렀다. 이만하면 되었다는 듯, 그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원진과 효명이 동시에 말을 몰았다. 세 마리의 말이 바람같이 내달렸다.
“이럇!”
두 사람이 말한 대로였다. 원진은 선두에서 검을 휘두르며 길을 열었고, 효명은 맨 뒤에서 쫓아오는 자들을 떨구었다.
익제는 옆에서 날아드는 공격을 막으며 곧장 향덕원으로 향했다.
“저들을 죽일 필요는 없다. 우리의 목표는 향덕원까지 무사히 도착하는 것이다.”
“예!”
때 아닌 한밤의 추격전이 벌어졌다. 두 명의 괴한들이 익제와 나란히 달리며 검을 찔러 넣었다.
“주군!”
원진이 말을 늦추며 반격했다. 효명은 재빨리 등 뒤의 화살을 꺼내 시위에 재었다. 핑, 시위를 벗어난 살이 괴한의 가슴에 꽂혔다. 그가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두 명의 자객이 익제의 좌우에서 동시에 검을 휘둘렀다. 원진은 제게 달려드는 자객을 상대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효명이 화살을 쏘기에는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였다.
익제는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왼쪽과 오른쪽, 둘 중 어느 쪽을 적에게 내어줄 것인지.
그는 왼쪽 팔을 희생하기로 했다. 그가 오른쪽 자객의 심장에 검을 찔러 넣으며, 왼쪽 팔을 들어 얼굴을 막았다. 자객의 검이 그의 팔 위로 떨어졌다.
그 순간.
“!”
서걱.
날카로운 검이 효명의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그는 떨어지는 칼날을 맨손으로 잡았다. 방금까지 활을 시위에 재고 있었던 탓에 검을 꺼낼 시간이 없었던 탓이다.
뚝.
뚝.
그의 손에서 피가 떨어졌다. 예리한 날붙이가 살갗을 가르고 들어갔다. 익제가 재빨리 허리를 비틀며 왼쪽 자객의 목에 검을 박아 넣었다.
쿵, 소리를 내며 그가 말 아래로 떨어졌다.
“효명.”
그가 효명을 돌아보았다. 효명은 두건을 풀어 대충 오른손을 감쌌다. 그가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괜찮습니다. 주군의 뒤는 제가 지킵니다. 주군께서는 곧장 앞만 보고 달리십시오.”
“……가자.”
익제가 짓씹듯이 명령했고, 그들은 다시 말의 허리를 걷어찼다. 남은 자객은 넷. 그들은 끈질기게 세 사람의 뒤를 따라붙었다.
“잡아라! 놓치지 마라!”
마침내 저 멀리 향덕원의 담장이 보이기 시작했다. 달아나는 사람도, 쫓아가는 사람도 기세를 맹렬하게 올렸다.
“조금만 더 힘을 내라. 목적지가 코앞이다.”
“저들이 향덕원에 들어가게 두어서는 안 된다!”
익제와 괴한의 외침이 교차했다.
벌컥.
그때, 향덕원의 대문이 열렸다. 그 안에서 수십 개의 횃불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소식을 들은 사병들이 그를 찾아 나선 것이다.
“주인님이시다!”
말발굽 소리에 고개를 돌리던 사병 하나가 세 사람을 발견하고는 황급히 검을 빼 들었다. 그제야 자객들이 다급하게 고삐를 당겼다.
“으윽.”
실패했음을 직감한 괴한이 나직하게 신음을 삼켰다. 그 사이에도 익제는 속도를 늦추지 않고 향덕원을 향해 달려갔다.
“돌아간다.”
괴한이 말머리를 돌렸다. 그와 동시에 원진 역시 반대 방향으로 말머리를 돌리며, 익제의 호위무사들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놈들을 쫓아라! 한 놈도 놓치지 마라!”
순식간에 전세가 역전되었다. 십여 마리의 말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익제는 멀어지는 원진의 등을 응시하다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가 말에서 떨어질 것처럼 휘청거리는 효명을 일별했다. 후미에서 추격조의 공격을 받은 그의 몸은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어깨에는 화살까지 박혀 있었다.
“의원을 불러라.”
익제가 하인을 향해 명령했다. 방금 전까지 들리던 쓰르라미 소리가 일시에 딱 끊겼다. 갑자기 찾아든 적막과 함께 밤이 깊어갔다.
***
“아니, 이곳이 어디라고 그 뻔뻔한 낯짝을 들이미느냐! 이 금수만도 못한 놈!”
효명을 본 한 가령이 벽력같은 노성을 터뜨렸다. 그는 당장이라도 효명의 멱살을 잡아 끌어낼 것처럼 몸을 부들부들 떨어댔다.
인생의 막바지에 선 메마른 눈동자가 광기로 번들거렸다.
“당장 내 눈앞에서 꺼져라, 이 천하의 배은망덕한 놈아! 주군께서 너를 어찌 대하셨는데, 감히 배신을 해? 육시랄을 놈 같으니라고! 내 너를 씹어 먹어도 속이 풀리지 않는다! 하늘이 너를 용서할 것 같으냐! 천벌을 받을 놈! 아니, 하늘이 너를 용서한다고 해도 내가 너를 용서 못 한다! 여기가 어디라고 네놈이 기어들어 와, 기어들어 오길!”
한 가령은 숨도 쉬지 않고 욕을 쏟아냈다. 효명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얼굴로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비릿한 피 냄새가 방안을 떠돌았다.
겉옷을 벗어 대충 던져둔 익제가 노인을 돌아보았다.
“한 가령.”
“……예.”
한 가령이 마지못한 듯 눈매를 찌푸렸다. 새카만 시선이 그를 응시했다. 그제야 한 가령의 주름진 얼굴에 팽팽한 긴장이 서렸다.
“자객의 습격을 받았다.”
“……예.”
한 가령은 호위무사 하나가 달려와 석중교에서 습격을 당했다고 말하던 끔찍한 순간을 떠올렸다.
주군은 어디 계시냐는 물음에 알 수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을 때의 그 섬뜩함도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사병들이 주군을 찾으러 나서는 그 순간, 익제가 돌아왔다. 천운이었다. 하늘이 도운 게 분명했다.
“그들의 계략에 빠져 십여 명의 자객에게 둘러싸인 채 원진과 단둘만 남았을 때, 효명이 나타나 나의 뒤를 지켰다.”
“하지만, 주군!”
한 가령은 설령 효명이 목숨을 바쳐서 그를 지켰다고 해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그가 입매를 찡그리며, 피투성이가 된 효명을 힐긋거렸다. 역시나 조금의 동정도 생기지 않았다.
사정을 모르는 하인들은 오랜만에 보는 효명을 향해 반가운 얼굴을 했으나, 한 가령은 그를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았다.
“이 시기에 자객이라. 누구의 소행이겠느냐.”
“…….”
무슨 말인가 하려던 한 가령이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는 익제의 생각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미련한 가신은 아니었다.
한 가령은 황궁에서 잔뼈가 굵었고, 이 같은 일에는 이골이 나 있었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마른 눈으로 익제를 보았다.
익제 역시 느릿하게 눈동자를 돌려 그를 마주보았다. 두 사람은 동시에 같은 인물을 떠올렸다.
태자.
익제가 연판장을 가지고 있는 걸 알게 되었다면, 그가 가만히 두고 볼 리 없었다. 태자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연판장을 되찾아 오는 것과 그것을 가지고 있는 익제를 죽이는 것.
그리고 그 결과가 오늘의 습격이라고, 두 사람은 확신했다. 태자는 연판장을 되찾아 오는 번거로운 방법보다 익제를 죽이는 손쉬운 방법을 택한 게 틀림없었다.
“예상보다 빨랐다. 내가 그를 너무 만만하게 봤군.”
“주군.”
한 가령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태자는 지금까지의 상대와는 달랐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수년 간 태자의 자리를 지켜온 그다. 왠지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어차피 넘어야 할 산이다.”
익제가 한 가령의 속내를 헤아린 듯, 한쪽 입꼬리를 당겼다. 그때, 문밖에 인기척이 느껴졌다.
“주인님, 의원이 당도하였습니다.”
“들라 하라.”
하인에게 미리 언질을 받은 의원이 사뭇 심각한 얼굴을 하고 들어왔다. 곧장 익제를 향해 가던 그가 멀쩡한 그의 모습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옆에 있는 효명을 발견하곤 뜨악한 얼굴을 했다. 효명은 어깨에 화살이 박히고, 허벅지와 등이 피투성이였다. 천을 둘둘 감은 오른손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졌다.
익제가 천천히 걸음을 떼며 한 가령을 돌아보았다.
“나는 부인의 처소에 있을 터이니, 효명을 부탁한다.”
“……예.”
한 가령이 못마땅한 기색으로 대답했다. 효명이 “아닙니다. 저는 괜찮습니다.”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당장이라도 향덕원을 떠날 기세였다.
“네놈이 뭐라고 감히 주군의 명을 거역하느냐!”
방금까지 당장 꺼지라고 하던 한 가령이 또다시 버럭, 화를 냈다. 그는 효명의 일거수일투족이 죄다 마음에 안 드는 듯, 사사건건 시비를 걸었다.
익제가 그런 한 가령을 무시한 채 효명에게 시선을 던졌다.
“내게 할 이야기가 있지 않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