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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지간히
똥줄이 타는 모양이다.
채선은 아직도 자신의 부친이 장군이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당연했다. 그녀의 기억 속에 있는 아비는 늘 허름한 옷을 입고, 나무를 하며 약초를 캐던 평범한 사내였기 때문이다.
세상에 동명이인이 한둘도 아닐 터인데. 참으로 난감하게 되었구나.
채선이 풀 죽은 얼굴로 어깨를 떨구었다. 그러나 그녀를 보는 한 가령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 흡족했다.
“역시 이백중 어른이 사람 보는 눈이 있으십니다. 어찌 심 장군의 여식이라는 걸 한눈에 알아보셨을까.”
그러니까 그런 게 아니래도.
한 가령의 기대에 채선의 걸음이 무거워졌다. 송하가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며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심 장군은 누구고, 심 장군의 딸은 또 누구란 말인가?
한 걸음 뒤에서 채선을 따르던 한 가령이 아련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주 훤칠한 사내였습니다. 성격은 또 어찌나 강직한지, 융통성이라고는 약에 쓸래도 없었지요.”
언뜻 칭찬인지 험담인지 알 수 없는 말이었다.
“황궁, 특히 폐하께서 머무시는 궁의 수문장이 어떤 자리입니까. 폐하를 딱 한 번만 알현시켜 달라며 사방에서 뇌물을 찔러 주었지만, 어디 가당키나 한 일입니까. 벼락이나 맞지 않으면 다행이지.”
채선은 저도 모르게 걸음을 늦추며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자신의 부친이 심 장군은 아니었지만, 어쩐지 두 귀가 쫑긋 섰다.
“자신의 여식과 혼인을 시키고자 하는 이들도 더러 있었습니다. 이립이 지났는데도 혼처가 정해지지 않았으니, 여기저기서 눈독을 들였지요. 그 나이에 황궁의 수문장이면 출세는 보장된 자리였으니 말입니다.”
내가 태어났을 때 아부지 연세가 어떻게 됐더라?
“허나, 상대가 누구든 칼같이 거절했습니다. 소문으로는 그의 스승인 이백중조차 그에게 퇴짜를 맞았다고 하더군요. 그런 그가 혼인을 하여 아이를 낳았다니 상상이 가질 않습니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흘릴 것 같은 사내였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제 아버지는 심 장군이 아니었다. 채선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제법 단호하게 대꾸했다.
“내 부친은 다정한 분이셨소. 어릴 적에는 아버지께서 나와 내 언니를 하도 안고 다니시는 바람에 세 살이 될 때까지 우리가 걷지 못하여 어머니께서 몹시 걱정하셨다오.”
말도 안 된다는 듯, 한 가령이 눈살을 찌푸렸다.
“심 장군이 그럴 리가 없는데. 깎아 놓은 석상보다 무뚝뚝한 그 자가 말입니까……? 에잉, 믿을 수 없습니다.”
“어머니께 꾸중을 들은 날이면, 나와 내 언니를 무릎 위에 앉히고 조곤조곤 달래주는 게 일이었소. 실은, 하루도 혼이 나지 않은 날이 없었지만 말이오.”
“심 장군이요? 허허.”
그러니까 장군이 아니래도.
채선은 어째서인지 변명을 하는 투로 계속 말을 이었다. 어떻게든 한 가령의 오해를 풀어야만 했다.
“길게 보면, 선한 사람이 이긴다고 착하게 살라 가르치셨소.”
“흠, 그건 심 장군답습니다.”
“착한 것과 아둔한 것은 다르다며, 어린 딸들을 앉혀 두고 글을 가르치셨소.”
“그 역시 심 장군답습니다.”
물론, 저는 그때마다 도망가는 바람에 지금 이리 고생을 하고 있지만.
“그리고 우리를 위협할 만한 적이 나타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죽이라고 하셨소.”
“……그 또한 심 장군답습니다.”
채선은 이야기가 자꾸 도돌이표처럼 돌아오는 바람에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한 가령의 마음속에서 그녀는 이미 심 장군의 딸이 된 듯했다.
문득, 걸음을 멈춘 채선이 머리 위의 나뭇가지를 올려다보았다. 엊그제까지 붉고 노란 이파리를 매단 나무들이 어느새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고 있었다.
팔랑, 또다시 낙엽 한 장이 떨어졌다. 겨울이 다가오는 모양이었다.
불현듯, 가슴속에 찬바람이 불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입구를 돌아보았다. 나무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기다리는 익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쩐지 가슴에 물이 찬 것처럼 심장 밑바닥이 술렁거렸다.
그 순간.
“앗!”
채선이 나직한 비명을 터뜨렸다.
“왜 그러셔요?”
“무슨 일입니까?”
송하와 한 가령이 동시에 뒤를 돌아보았다. 채선이 일그러진 얼굴로 울상을 지었다. 그녀가 천천히 시선을 떨어뜨렸다. 송하와 한 가령도 덩달아 고개를 숙였다.
“윽.”
채선이 치마를 살짝 걷으며 디뎠던 발을 뗐다. 고약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물컹, 기분 나쁜 감각이 종아리를 타고 올라왔다.
“아.”
송하가 저도 모르게 얼빠진 탄식을 흘렸다. “어째서 이런 곳에 말똥이…….”라고 중얼거리던 그녀가 대번에 두 눈을 치떴다.
“풍오의 짓이 분명합니다!”
“내 이놈을 당장! 감히 심 장군의 따님에게!”
한 가령이 씩씩거리며 마구간으로 뛰어갔다. 미처 그를 말리지 못한 채선이 시무룩한 얼굴로 어깨를 떨구었다.
“잠시만 기다리셔요, 금방 새 신을 가져올게요!”
송하가 쏜살같이 사라졌다. 채선은 긴 한숨을 내쉬며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물까치 한 마리가 낮게 날며 까악까악, 그녀를 비웃었다.
***
익제는 해가 지고 나서야 영락궁의 문턱을 넘을 수 있었다. 인애대군이 그의 소맷자락을 붙잡으며 술을 권했던 탓이다.
행여 익제의 마음이 변할까, 인애대군은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감언이설을 늘어놓았다. 그에게 익제는 가장 큰 아군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누가 감히 인애대군의 편에 서서 태자에게 반기를 들 것인가. 한 발만 잘못 디뎌도 천 길 낭떠러지 아래로 추락할 위험한 도박이었다. 그 결과가 불을 보듯 뻔한 싸움이기도 했다.
그러니 인애대군은 어떻게 해서는 익제의 환심을 사야 했다. 그마저 등을 돌린다면, 그는 싸워볼 생각도 하지 못하고 태자에게 목을 내주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성공한다면.
술이 거나하게 오를수록 인애대군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는 이미 옥좌에 앉은 양 황홀했다.
“취하셨습니다.”
원진이 얼큰한 술 냄새가 나는 익제를 보며 걱정스러운 한마디를 건넸다. 익제가 픽, 입꼬리를 당기며 천설의 등에 올라탔다.
원진은 행여 그가 떨어질까, 익제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러다 그가 평소와 다름없이 말고삐를 움켜쥐는 걸 보고서야 저 역시 말에 올랐다.
“어지간히 똥줄이 타는 모양이다.”
천설이 뚜벅뚜벅, 밤길을 걷기 시작했다. 원진은 그의 옆으로 말을 몰았고, 호위무사들이 그 뒤를 따랐다. 이른 저녁달이 동쪽 하늘에 걸려 있었다.
늦가을이었다. 혹은, 초겨울이라 해도 좋았다. 해가 일찍 저무는 계절이라 사방에는 인적이 뜸했다. 해가 저물면 나다니는 사람이 많지 않은 탓이었다.
그 적요한 밤을 말발굽 소리가 뭉툭하게 떠돌았다.
익제는 괜히 마음이 바빠졌다. 채선이 저를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어쩌면 이리 쌀쌀한데도 뜰 앞을 서성거리고 있을지도 몰랐다.
“저녁은 먹었겠지.”
술기운이 도는 혼잣말을 중얼거린 그가 저도 모르게 속도를 높였다.
“주군.”
원진이 당황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뒤따라오는 호위무사들과 제법 거리가 벌어졌다. 그제야 익제가 자신의 조급함을 눈치채곤 천천히 고삐를 당겼다.
그가 막 석중교를 지나던 때였다.
핑.
날카로운 파공음이 들렸다. 익제는 본능적으로 허리를 젖혔다. 그는 허벅지 힘만으로 상체를 지탱하고, 천설의 몸뚱이 뒤로 몸을 숙였다.
방금까지 그의 머리가 있던 자리를 화살 한 대가 빠르게 지나갔다.
푹.
화살이 단단한 나무에 꽂히는 소리가 났다.
“주군!”
원진이 다시 한번 고함을 쳤다. 등 뒤의 호위무사들이 검을 빼 들며 말을 몰았다. 그들은 익제를 보호하듯 동그랗게 에워쌌다.
익제는 순식간에 술기운이 가신 얼굴로 짙은 어둠을 노려보았다. 버드나무가 우거진 곳에서 십여 명의 자객들이 튀어 나왔다.
그들 역시 검을 들고 있었다. 원진이 호위무사들을 향해 일갈을 터뜨렸다.
“은원군을 지켜라!”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펼쳐졌다. 챙, 챙, 날카로운 금속음이 고요한 밤하늘을 갈랐고, 날붙이에서 튀는 작은 불씨가 새카만 시야를 어지럽혔다.
원진 역시 지체하지 않고 검을 뽑았다. 주위를 둘러보던 그가 익제를 향해 외쳤다.
“일단 이곳을 벗어나시는 게 좋겠습니다.”
익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동시에 말의 허리를 걷어찼다.
괴한들이 그들의 뒤를 쫓으려 했지만, 호위무사들이 재빨리 그 앞을 가로막았다. 까앙, 깡, 요란한 소리와 함께 엎치락뒤치락 난전이 펼쳐졌다.
원진은 연신 뒤를 돌아보며 말을 몰았다. 그보다 한 걸음 앞에 있는 익제가 서늘하게 굳은 눈으로 어둠을 쏘아보았다. 두 사람이 막 마을을 벗어나는 순간.
“!”
십여 명의 괴한이 불쑥, 그 앞을 가로막았다. 익제가 서둘러 고삐를 당겼다. 천설이 황급히 그 자리에 멈춰 섰고, 원진도 놀란 말을 진정시켰다.
말을 탄 괴한들이 천천히 움직여 익제와 원진의 주위를 동그랗게 에워쌌다. 느릿하게 눈동자를 굴려 그들을 둘러보던 익제가 비식, 입꼬리를 당겼다.
“나와 호위를 떨어뜨려 놓기 위한 계책이었군. 우리가 올 것을 알고 있었어.”
“주군.”
원진의 목소리가 사뭇 비장한 빛을 띠었다. 그는 검을 들고 익제의 앞을 가로막았다.
괴한들은 복면으로 얼굴을 감추지 않았다. 그 말은 두 사람을 살려두지 않겠다는 선언이나 마찬가지였다.
원진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저 중 두 명은 광무대군을 살해한 바로 그들입니다.”
“…….”
“이곳은 제가 맡을 테니, 다른 곳으로 가십시오.”
“너 혼자 저들을?”
말도 안 된다는 듯 익제가 가벼운 어투로 그를 나무랐다. 그러나 원진은 진심이었다. 그가 한층 더 비장하게 말했다.
“목숨을 걸고 길을 트겠습니다.”
그와 동시에 괴한이 달려들었다. 그가 익제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원진은 황급히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며 그의 공격을 막았다.
챙.
두 개의 검이 맞부딪혔다. 그그극, 힘을 겨루던 원진이 뿌리치듯 검을 밀었다. 자객이 뒤로 물러났다.
원진은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입매를 찌푸렸다. 못해 볼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중과부적이었다.
저쪽은 열, 이쪽은 고작해야 둘. 애초에 상대가 되는 숫자가 아니었다. 게다가 익제는 무기를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서걱.
쏜살같이 달려든 원진이 방심한 괴한의 허리를 깊숙하게 베었다. 그자가 말 등 위에서 떨어졌다. 쿵, 묵직한 소리가 났다. 일단은 한 명이라도 수를 줄여야 했다.
그러나 그의 생각쯤은 자객들도 꿰뚫고 있었다. 다음 순간, 나머지 괴한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원진이 다급하게 외쳤다.
“주군!”
인애대군인가. 아니면……, 태자.
익제의 눈매가 서늘하게 빛나던 그 순간.
피잉, 핑.
또다시 예리한 파공음이 들렸다. 익제의 등이 흠칫 굳었다. 피하기엔 늦었다. 그의 눈매가 난감한 기색을 띠었다. 그 사이에도 그의 눈동자는 활로를 찾아 주위를 빠르게 훑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