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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별이 뜨는 밤 (117)화 (117/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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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

그러니까 우리 아부지는
장군이 아니래도.

저보다 빠르게 정보를 입수한 익제가 미심쩍었는지 인애대군의 목소리가 설핏 날카로운 기색을 띠었다.

익제는 대답 대신 능숙하게 화제를 전환했다.

“그렇다면 누가 광무대군을 죽였을까요?”

“으음.”

인애대군이 생각에 잠겼다. 그는 지금 이 상황이 영 이해가 되지 않는 듯, 희미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익제가 목소리를 낮추며 의미심장한 분위기를 풍겼다. 인애대군이 솔깃한 표정으로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실은 이해가 가지 않는 것 있습니다.”

“무엇이 말인가?”

“광무대군께서는 제 하녀를 포섭하여 독약을 탄 사실은 인정하였습니다. 제 부인을 납치한 사실도 인정하였지요. 허나, 문효대군과 효성대군이 돌아가신 건 자신과 상관이 없는 일이라며 끝까지 부정하셨습니다.”

“그야 당연한 것 아닌가. 황자를 살해하는 것은 다른 어떤 죄보다 무겁네. 아무리 광무대군이라도 그 사실을 인정할 수는 없었을 테지.”

그게 아니라는 듯 익제의 목소리가 조금 더 낮아졌다. 

“광무대군이 효성대군을 만난 이튿날, 효성대군께서 사망하셨습니다. 광무대군께서 그리 허투루 일을 처리할 분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본인에게 화살이 꽂힐 거라는 걸 알면서 당장 효성대군을 죽여야 할 정도로 급박한 상황도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아니, 오히려 문효대군께서 사망하신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니, 너무 이른 감이 있었습니다.”

듣고 보니 일리가 있는지 인애대군의 표정도 덩달아 심각해졌다. 그제야 모든 일이 마치 짜 맞춘 것처럼 돌아가는 듯했다. 그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렇다면……?”

“혹, 또 다른 흑막이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또 다른 흑막이라니…….”

무심코 중얼거리던 인애대군이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 그는 그 속에 숨은 뜻을 모를 정도로 아둔하지 않았다.

“설마, 형님이!”

인애대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의 눈동자에 경악이 어렸다. 익제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광무대군께서 황제의 자리를 욕심낸다는 걸 태자 전하께서 모르셨을 리 없습니다.”

“으음.”

인애대군이 언짢은 표정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그의 머릿속이 한층 더 복잡해졌다.

익제가 그의 불안감을 부채질하듯, 나직한 목소리로 쐐기를 박았다.

“어쩌면 이 모든 일의 배후에는 태자 전하가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광무대군을 핑계로 정적을 하나씩 제거해나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정적.

그 말에 어떠한 가능성을 떠올린 인애대군이 흙빛이 된 얼굴로 익제를 돌아보았다. 그의 잇새로 망연한 물음이 흘러나왔다.

“그렇다면 형님의 다음 목표는 내가 아닌가.”

익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침묵이 긍정이라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할 리는 없었다.

“맙소사.”

인애대군은 소름이 돋은 듯 별안간 어깨를 떨었다. 익제의 추측이 사실이라면 제가 광무대군에게 한눈을 판 사이, 태자는 이미 세 명의 형제를 제거했다.

문효대군과 효성대군, 그리고 광무대군까지. 

격이 달랐다. 목덜미에 서늘한 날붙이가 드리워진 느낌이었다. 그제야 더럭, 겁이 나기 시작했다.

인애대군이 상체를 바짝 당겨 앉으며 동요한 눈으로 익제를 보았다.

“자네가 아니었으면 눈 뜨고 당할 뻔하였군. 그럼 나는 이제부터 어찌해야 하는가.”

익제는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인애대군을 어디까지 장기 말로 쓸 수 있을까, 그의 머리가 바쁘게 굴러갔다.

“상황이 심상치 않게 흘러가는 것 같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남은 황자 분은 인애대군과 한위대군, 두 분뿐이로군요.”

그 말에 인애대군의 얼굴이 한층 더 딱딱하게 굳었다. 익제는 일부러 그의 불안감을 부채질했다. 

“한위대군이야 워낙 몸을 사리시는 성격이신 데다, 그분이 황제의 자리에 욕심이 없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형님의 말씀처럼, 태자 전하의 다음 목표는.”

말을 하다 말고 익제가 입을 다물었다. 때로 침묵은 말보다 더 큰 의미를 지닌다. 아니나 다를까, 인애대군이 초조하게 입술을 짓이겼다.

“그래, 그러니 이제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이대로 가만히 앉아서 목에 칼이 들어오는 걸 뻔히 보고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가 덥석, 익제의 손을 잡았다. 익제가 난처한 표정으로 아무 말을 하지 않고 있자, 점점 더 애가 타는 모양이었다.

안절부절못하던 인애대군이 은근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자네와 나는 이미 한배를 타지 않았나.”

“하지만 태자 전하께 반기를 드는 것은 역모나 마찬가지입니다. 제 한 목숨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가문이 몰살당하는 대역죄이지요.”

“그렇다면 자네는 이대로 내가 죽는 것을 지켜만 볼 것인가!”

인애대군이 버럭, 화를 냈다. 그러다 아차 하는 얼굴로 다시 익제의 손을 붙들었다. 그가 애면글면했다.

“내 이번 일만 잘되면 자네의 공을 잊지 않겠네. 그래, 내가 황제가 되면 자네에게 태부 자리를 내리겠네. 어떤가?”

하.

익제는 실소가 비어져 나오려는 것을 가까스로 눌러 참았다. 애초부터 황제의 자리는 그의 것이었다. 

제 것을 도둑질해 간 놈의 아들이 제게 고작 태부의 자리를 내린단다.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내색하지 않고 어렵사리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씁쓸하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하긴. 이미 저도 그 배에서 내리기에는 너무 늦었습니다.”

“그렇지. 그렇고말고. 태자 전하께서 자네가 내 편에 선 것을 모르시겠는가? 그러니 우리에게 남은 길은 오직 하나뿐일세.”

“하지만 태자 전하께서는 중앙군을 지휘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그들을 상대할 수 있겠습니까?”

“내 사병들이 있지 않나?”

“도성을 지키는 중앙군의 반도 되지 않는 숫자가 아닙니까? 게다가 다른 지역에 있는 지방군까지 가세하면 저희에게는 승산이 없습니다.”

익제의 말이 냉정한 현실을 일깨웠다. 인애대군은 점점 더 애가 닳았다. 당장이라도 태자가 자신의 목을 따러 올 것만 같았다.

그가 절박한 목소리로 부탁했다.

“그러니 자네에게 도와 달라는 것이 아닌가. 정녕 방도가 없겠는가?”

“한 가지 있긴 한데…….”

익제가 말끝을 흐리며 뜸을 들였다. 안달이 난 인애대군이 그를 닦달했다.

“그게 무엇인가?”

“최대한 빠르게 군사를 이끌고 도성으로 와 곧장 황궁을 치는 것입니다. 군권을 쥐고 계신 태자 전하께서 눈치채기 전에 황궁을 빼앗아야 합니다. 기습, 인애대군께서는 그 외에 다른 방도가 없습니다. 지방군이 가세하기 전에 모든 상황을 끝내야 합니다.”

“황궁을 말인가? 일이 커지는 것이 아닌가? 나는 태자 전하만 제거하면 되는데……. 자객을 보낸다든가?”

그제야 인애대군이 한발 물러서며 망설이는 기색을 내비쳤다. 익제가 내심 혀를 차며 그를 나무랐다.

“어떤 자객이 황궁을 뚫을 수 있단 말입니까? 설령 궁인을 포섭해 밥에 독이라도 탄다고 해보십시오. 그것이 발각되면, 궁인이 형님에 대한 의리를 지키겠습니까? 태자 전하께 빌미를 주는 것밖에는 안 됩니다. 형님께서는 이러나저러나 국문장에 서게 되실 겁니다. 반역죄로 말이지요.”

“끄응.”

인애대군이 신음을 흘렸다. 익제의 말이 옳았다. 황궁은 태자의 세상이었고, 바깥에서 안을 무너뜨리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저희에게 승산이 있다면, 태자 전하께서 미처 생각하지 못한 방법으로 허를 찌르는 것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전면전은 피할 수 없습니다.”

“음.”

일리가 있다는 듯 인애대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눈살을 찌푸린 채 익제를 쳐다보았다. 

“허나, 태자 전하께서는 나를 예의 주시하고 계실 것이네. 나는 이곳에서 꼼짝도 할 수 없는 처지란 말일세. 내가 도성을 떠나기라도 해보게. 태자 전하의 눈이 따라붙지 않겠는가. 그럼 반란은 꾀하지도 못하고, 다 같이 몰살을 당할 것이네. 그런 내가 어떻게 군사를 이끌고 도성으로 오겠나?”

인애대군이 말을 마치며 익제에게 은근한 시선을 던졌다. 하나부터 열까지 제게 다 떠맡기는 인애대군의 태도가 썩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그것 역시 그의 계획대로였다.

생각에 잠긴 얼굴로 침묵하던 익제가 마침내 결심한 듯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면 제가 그들을 이끌고 이곳으로 오겠습니다. 형님께서는 도성에서 저희를 맞아 주십시오.”

“좋네. 그래, 그러지.”

인애대군이 이윽고 환한 얼굴로 웃었다. 그가 꽉 움켜쥔 익제의 손을 위아래로 거칠게 흔들었다.

“내 이 은혜는 잊지 않음세.” 

“문제는.”

희색이 만면한 그와 달리 익제가 희미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인애대군의 낯빛이 대번에 심각해졌다. 

“그 많은 병사를 어떻게 태자 전하의 눈을 피해 도성까지 데려오느냐, 하는 것입니다. 형님이 말씀하신 대로, 반란을 꾀하기도 전에 태자 전하께서 눈치를 채시면 우리가 역공을 당할 것입니다.”

“내 영지를 따라 이동하게. 미리 연통을 열어 놓겠네. 그들이 은밀하게 길을 내줄 걸세. 사병들이 더 필요하다면 그 또한 전갈을 넣어 놓겠네.”

곰곰이 생각하던 익제가 고개를 저었다.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있었다. 자칫하면 일족이 몰살당하는 반역이었다. 괜한 오합지졸이 투입되어 분위기를 망칠 수도 있었다. 그건 그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오히려 기동성이 떨어질 것입니다.”

“그래. 자네 말도 일리가 있군. 무엇보다 중요한 건 속전속결이니.”

인애대군이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침묵 속에서 의미심장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

졸졸.

“으음.”

풍오를 보러 가던 채선이 난감한 표정으로 눈동자만 데구르르 굴렸다. 힐긋, 그녀가 송하를 곁눈질했다. 

눈이 마주친 송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별 뾰족한 수가 없는 건 그녀도 마찬가지였던 탓이다.

채선이 어색한 분위기를 떨치려는 듯 입을 열었다.

“화영이 보이질 않는구나.”

“아, 화영 아가…….”

“화영 아가씨는 한 시진 전에 출타를 하였습니다.”

한 가령이 송하의 대답을 가로챘다. 채선은 저를 빤히 응시하는 그의 시선에 눈 둘 곳을 찾지 못하고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데구르르, 갈색 눈동자가 괜히 바닥 어림을 배회했다.

알 수 없는 압박감이 느껴졌다. 채선이 슬그머니 처소로 발길을 돌렸다.

“음, 방으로 가서 글공부나 해야겠다.”

“갑자기 글공부를요? 풍오를 보러 가시는 길이셨잖아요.”

송하가 아닌 밤중에 웬 홍두깨냐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채선이 한 가령의 눈치를 살피며 “아니다. 갑자기 독서가 하고 싶어졌다.” 하고 시무룩하게 중얼거렸다.

그때, 한 발짝 뒤에 있던 한 가령이 입을 열었다.

“풍오가 부인을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풍오를 만난 뒤에 책을 읽으시지요. 책에 발이 달려서 어디로 도망가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힐긋, 채선이 걸음을 멈추고 그에게 눈길을 주었다. 그래도 되느냐고 묻는 듯한 눈길이었다.

“역시 심 장군의 따님이라 그런지, 명마를 알아보는 눈이 탁월하십니다.”

“…….”

그러니까 우리 아부지는 장군이 아니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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