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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별이 뜨는 밤 (116)화 (116/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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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

가족.

“예.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채선이 수줍게 눈을 내리깔았고, 익제가 그녀의 눈매를 어루만졌다. 그녀의 속눈썹이 그의 손끝을 간질였다.

익제의 입매가 느슨하게 풀어지고, 그 사이로 만족스러운 한숨이 새어 나왔다. 한참 동안 손장난을 즐기던 익제의 손가락이 슬금슬금 아래로 내려갔다. 

목덜미를 거쳐, 쇄골, 가슴, 그리고 배까지.

그녀의 몸이 흠칫, 긴장했다.

“우리 아이는 잘 있소?”

익제가 음흉한 속셈 따위는 눈곱만큼도 없다는 듯, 상냥한 투로 물었다.

채선이 무심코 배 위로 손을 가져갔다. 그녀의 손이 익제의 손등 위에 겹쳐졌다. 그의 웃음이 조금 더 짙어졌다.

겁 많고 소심하며, 수줍음 많은 그녀가 한 걸음씩 거리를 좁힐 때마다 익제는 마치 커다란 선물을 받는 듯했다. 혹은, 그의 지난한 노력이 비로소 결실을 맺는 것 같기도 했다. 

가증스러움의 대가가 이 정도라면, 그는 일평생 다정한 사람을 연기할 수 있었다.

익제는 봉긋한 그녀의 배를 문지르며 깊은 상념 속으로 침잠했다.

아마 계절이 두 번 바뀔 때쯤에는 두 사람에게 새로운 가족이 생길 것이다. 하얀 겨울이 지나고, 수천수만 가지의 색이 난무하는 봄이 필 때 즈음에는.

가족.

채선은 일렁이는 눈으로 익제를 바라보았다. 줄곧 저를 응시하고 있었던 듯, 곧장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건 굉장히 이상한 기분이었다. 그녀는 태어나면서부터 함께였던 가족을 잃은 순간, 새로운 가족을 얻었다.

인생은 잃는 게 있으면 얻는 게 있는 법이고,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는 법이었다.

어떤 게 더 소중하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늘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고, 제게 주어진 것을 사랑할 뿐이었다. 

“음?”

익제가 일순, 눈을 크게 떴다. 동시에 채선의 눈동자도 동그래졌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엉켰다.

꾸륵.

또 한 번 뱃속에서 무언가가 움직였다. 익제가 눈매를 허물었고, 채선은 조용히 숨을 삼켰다. 그의 입술 사이로 다정한 목소리가 떨어졌다.

“정말로 우리의 아이가 있는 모양이군.”

“그, 런가 봅니다.”

채선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회임을 하였다고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그 존재를 느낀 것은 그녀 역시 처음이었다. 그 순간,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뭉클한 기분이 들었다. 

아이.

그건 익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저도 모르게 손끝에 힘을 주었다. 지켜야 할 생명이 또 하나 생겼다. 

그는 이지가 생기기도 전에 권력의 뒤안길로 내몰렸다. 아비의 얼굴은 기억에도 없었고, 어미의 손에서 자라지도 못했다. 

잊을 만하면 찾아오는 자객이 두려워 까만 밤을 하얗게 지새우기도 했다. 아마 한 가령과 연산댁이 없었다면, 그는 온전히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을 제 자식에게 대물림할 수는 없었다. 익제는 사뭇 결연한 눈으로 허공을 노려보았다. 그 순간, 그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향해 마지막 한 발을 내딛기로 결심했다.

“…….”

평온했다. 누구도 그들을 방해하는 이는 없었다. 하지만 채선은 이 평온이 오래 가지 않으리란 걸 직감했다.

그들을 둘러싼 안온함은 아슬아슬한 균형을 유지했다. 언제 깨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균형이었다. 그녀는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척 익제의 품을 좀 더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가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

“그래, 광무대군은 죽였나?”

익제가 원진을 향해 서늘한 물음을 던졌다. 그를 죽이기 전까진 돌아오지 말라고 하였다. 그런 그가 이곳에 서 있으니 답은 하나뿐이었다.

그런데 원진은 대답 대신 가늠할 수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숙일 따름이었다. 익제의 눈썹이 슬쩍 휘어졌다.

아무리 죄인이라고 해도 광무대군이다. 그를 호송하는 인력이 만만할 리는 없었다. 실패했나, 익제의 미간에 주름이 잡히는 찰나.

내도록 침묵하던 원진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예, 죽었습니다. 제 눈으로 확인했으니 틀림없습니다.”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고도 뜸을 들인 그의 행동에 익제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혀를 찼다. 그때, 원진이 나직한 목소리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허나, 제가 한 것은 아닙니다.”

“…….”

문득, 익제가 눈썹을 찌푸렸다. 

광무대군은 죽었는데, 원진이 한 짓은 아니다?

그가 설명을 요하는 눈으로 원진을 쳐다보았다.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인 원진이 표정 없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주군의 명을 받고 곧장 광무대군의 뒤를 미행하였습니다. 일행은 서른 명 남짓, 호위와 하인이 반반 정도 되었습니다. 그들이 방심한 순간을 노린다면, 충분히 광무대군을 죽일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하여 적당한 때를 기다리며 몸을 숨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야심한 시각, 제가 광무대군을 습격하려던 바로 그때.”

잠깐 말을 끊은 원진이 미간을 좁혔다. 그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익제를 마주보았다.

“한발 앞서 그들을 향해 달려든 그림자가 있었습니다. 총 세 명의 자객이었습니다. 그들은 허둥지둥 방어태세를 갖춘 호위들을 뚫고, 광무대군의 목을 베었습니다. 그리고 귀신같이 사라졌습니다.”

“그들이 누구냐.”

“미리 약속이라도 한 듯, 세 명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흩어졌습니다. 그중 한 명의 뒤를 쫓았지만, 도중에 놓쳐 버리고 말았습니다. 습격과 후퇴, 일을 처리하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 모든 것을 미루어 짐작했을 때, 보통 실력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익제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눈매를 좁혔다. 톡톡, 그가 손톱으로 서탁을 두드렸다. 한참 만에야 그의 입술이 다시 열렸다.

“인애대군인가?”

그것은 반쯤 혼잣말이었다. 원진은 그의 물음에 답을 하지 않았고, 익제 역시 그의 침묵을 다그치지 않았다.

“아니면…….”

또 다른 가능성 하나가 떠오른 듯 익제가 두 눈을 더욱 가늘게 떴다. 그 가능성은 신발 안의 돌멩이처럼 그를 자꾸만 신경 쓰이게 하던 의구심이었다.

뚝.

서탁을 두드리던 손가락이 멈추었다. 방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익제가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동자가 원진의 어깨 너머를 바라보았다. 

“태자인가.”

***

이선은 환관을 따라 태자의 궁으로 향했다. 

그녀는 아직 어떤 첩지도 받지 못했지만, 황궁에 들어와 있었고, 태자의 사람이 되어 있었다. 앞으로 그녀가 얼마나 높은 자리에 앉느냐는 그녀 하기 나름이었다.

그러나 쉽지 않을 것이다. 광무대군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사내였다. 그만큼 그녀를 견제하는 세력도, 못마땅해 하는 사람도 많을 터였다. 

그리고 이선은 그들에게서 자신을 지켜줄 사람이 태자뿐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를 얻으면 모든 걸 얻게 될 테고, 그를 잃으면 모든 걸 잃게 될 터였다. 

이선은 살짝 시선을 떨어뜨린 채 사뿐사뿐, 신중한 걸음을 내디뎠다. 그녀를 지켜보는 눈이 많았다. 

얼마 전까지는 광무대군의 부인이었던 그녀가 이제는 태자의 여인이 되었으니,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기 딱 좋았다.

“태자 전하, 심 씨가 들었습니다.”

“들라 하라.”

복도를 지키던 두 명의 환관이 양쪽에서 문을 밀었다. 닫힌 문이 서서히 열리고, 화려한 방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기둥은 금칠이 되어 있었고, 벽에는 비단이 발라져 있었다. 사방에 놓인 귀한 도자기와 산호장식이 화려함을 더했다.

광무대군의 방 역시 사치스러웠지만, 그와 견줄 수 없을 정도의 호화로움이 느껴졌다. 보는 이를 압도하는 찬란함. 

아아.

이선은 그 자리에 서서 나직한 탄성을 삼켰다. 이제야 황궁에 발을 디뎠다는 실감이 났다. 비록 그녀의 계획대로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이선은 마침내 이곳에 발을 디뎠다.

그토록 바라고 바라던 곳.

이런데도 내가 흉인의 별이라고? 모든 일이 마친 짠 것처럼 내 뜻대로 이루어지는데, 그런데도 내가 귀인이 아니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

“무엇하십니까.”

환관의 날카로운 질책이 상념에 빠져 있던 이선을 깨웠다. 퍼뜩 정신을 차린 그녀가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황궁이 주는 위압감에 천하의 이선도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보이지 않는 압박감이 어깨를 짓눌렀다. 숨이 턱턱 막혔다. 

하지만 이선은 애써 태연함을 가장했다.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태자는 마치 그제야 그녀의 존재를 눈치챈 것처럼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시선을 떨구고 있던 이선 역시 눈동자를 들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뒤엉켰다.

“…….”

강인한 눈동자가 그녀를 뜨겁게 응시했다. 

이선은 운명 따위에 굴하지 않을 것 같은 심지 굳은 태자의 눈을 보며 만족스러운 한숨을 흘렸다. 그는 광무대군처럼 하루아침에 고꾸라질 사내는 아니었다.

오래지 않아, 권력의 정점에 설 사내.

누구도 그의 앞을 가로막을 수 없을 터였다.

그리고 그녀는 그 사내의 옆에 선 고귀한 여인이 될 것이다. 이선은 더 이상 귀인의 별이 아니었지만, 다행히 비장의 패를 지니고 있었다. 그가 그녀를 다시 보게 만들 만한 패.

이곳에서 연판장의 존재를 알고 있는 것은 그녀 하나뿐이었다.

“가까이 오라.”

태자가 그녀를 불렀다. 

그 순간, 이선은 가볍게 몸서리를 쳤다. 전신을 훑는 묵직한 목소리에 짜릿한 전율이 일었다. 

그녀는 두 눈을 감았다가 뜨며, 지남철에 끌린 쇳가루처럼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

“어서 오게.”

인애대군은 마치 친형제라도 살아 돌아온 듯, 반갑게 익제를 맞았다. 

그는 제 손을 더럽히지 않고 광무대군을 제거한 것이 몹시 기쁜 모양이었다. 인애대군의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익제는 말없이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표정 없는 그의 시선에 인애대군이 의아한 기색으로 두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아무리 생각해도 영문을 알 수 없었는지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인가?”

익제는 말없이 계속 그를 응시했다. 그러다 인애대군의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낼 때쯤, 부드러운 어조로 물었다. 마치 날씨 이야기라도 하듯 가볍고 여상하게.

“광무대군을 처리하신 분이 인애대군이십니까?”

“응? 그게 무슨 말인가? 처리라니?”

인애대군이 그 말의 뜻을 가늠하려 미간을 좁혔다. 익제는 그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담담하게 물었다.

“광무대군께서 살해당한 걸 모르십니까?”

“뭐라?”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인애대군이 두 눈을 부릅떴다. 그의 동공이 커다래졌고, 눈 밑이 실룩거렸다. 두툼한 입술이 슬쩍 벌어졌다. 그 사이로 색색거리는 숨이 새어 나왔다. 

장담컨대, 그것은 연기가 아니었다. 

은원군의 얼굴이 사뭇 진지한 빛을 띠었다. 

“광무대군이 살해를 당했다니, 그게 무슨…….”

그가 경악에 찬 표정으로 입을 여는 순간, 문밖에서 다급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인애대군이 들라고 명하자, 가신으로 보이는 자가 방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익제에게 간단하게 예를 표하곤 곧장 인애대군의 곁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의 귓가에 무슨 말인가를 빠르게 속삭였다. 익제에게는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였다.

“끙.”

인애대군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가 익제를 곁눈질했다. 그 행동만으로도 익제는 가신이 전한 말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도 광무대군이 살해당했다는 소식일 것이다.

가신이 고개를 숙이고 물러간 뒤에도 인애대군은 생각이 정리되지 않은 듯, 초조한 표정으로 자신의 뺨을 문질렀다. 그러다 익제에게 의심 어린 시선을 던졌다.

“광무대군이 정체불명의 자객에게 죽임을 당했다는군. 그런데 자네는 그것을 어찌 알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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