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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별이 뜨는 밤 (115)화 (115/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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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

연판장이오.

“연판장이오.”

“연판장이요?”

채선이 익제에게 묻는 듯한 시선을 던졌다. 생소한 단어였다. 

익제가 손에 든 종이로 시선을 떨구었다. 그가 한마디, 한마디 짓씹듯이 뇌까렸다.

“선 황제 폐하를 독살하고, 그의 아우를 황제로 옹립하려는 이들의 회합 명부요. 서로 배신하지 못하도록 이름을 쓰고 지장을 찍은 문서지.”

“!”

채선의 입이 벌어졌다. 그녀의 입술 사이로 소리가 되지 못한 숨이 터져 나왔다. 

그 말은 무슨 뜻인가. 선 황제의 사망이 병환 때문이 아니란 말인가? 독살? 아니, 그보다 이걸 왜 엄마가 들고 있었던 거지?

머릿속으로 두서없는 생각들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익제 역시 그것이 의문이었던 모양이다. 

“모친의 유품.”

나직하게 중얼거린 그가 뚫어질 듯한 시선으로 채선을 응시했다. 그의 의문을 눈치챈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습니다. 어찌하여 어미가 그것을 가지고 있었는지.”

“한 가령.”

익제가 목소리를 높였다. 문밖의 도영이 “즉시 데려오겠습니다.”라고 대답하곤 복도 너머로 사라졌다.

방안에는 짧은 침묵이 흘렀다. 두 사람은 각자의 상념에 빠져 있었다.

채선은 엉킨 실타래를 풀기 위해 노력했지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조차 가늠할 수 없었다. 

그것은 정말로 꼬인 실타래와 같아 생각을 하면 할수록 점점 더 복잡하게 얽히기만 할 뿐이었다.

거대한 폭풍이 끊임없이 두 사람의 주위를 맴돌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음모가 그들의 발밑에 도사리고 있었다. 그 선연한 감각에 등줄기가 오싹하게 식었다.

오래지 않아, 한 가령이 방으로 들어왔다. 급하게 뛰어온 듯, 그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찾으, 셨습니까?”

익제는 말없이 그에게 종이를 내밀었다. 의아한 얼굴로 종이를 받아 든 한 가령이 숨을 가다듬으며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와 동시에.

“이, 이게 무슨……!”

노인이 두 눈을 부릅떴다. 그의 얼굴이 파랗게 질리더니 이내 온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무슨 말인가 할 것처럼 벙긋거리던 입술이 열리고 닫히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털썩, 기어코 한 가령의 무릎이 꺾였다. 

“으아아아!”

바닥에 주저앉은 그가 비통한 외침을 터뜨렸다. 울음과 절규, 그는 그사이에 있었다. 한 가령이 피를 토하듯 절절하게 소리쳤다.

“폐하께서는 살해당하신 것입니다! 그자가, 그자가 역모를 일으킨 것입니다! 그러게 제가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황제의 자리는 주인님의 것이었다고! 그 자리를 도둑맞은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의 목소리가 그렁그렁 끓었다.

“아, 이럴 수가! 죽어서 어찌 선황 폐하의 얼굴을 뵙는단 말입니까! 분명 원통하여 눈을 감지 못하셨을 겁니다! 지하에서 땅을 치고 계실 겁니다!”

그의 울부짖음이 사라진 방은 조금 전보다 더 깊은 적막이 내려앉았다.

애통하고 서글픈 침묵.

늪에 빠지듯 몸이 적막 서서히 아래로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숨이 크게 쉬어지지 않았다.

노인이 땅바닥에 엎드려 흐느꼈다. 가뭄에 시달리는 논처럼 비쩍 말라 주름이 진 그의 얼굴 위를 뜨거운 눈물이 가로질렀다. 

회한의 눈물이다. 그는 자신이 지키지 못한 주군을 그리워하며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 끄윽, 끅, 벌어진 잇새로 짐승의 울음소리 같은 흐느낌이 비어져 나왔다.

“…….”

그 서러운 모습에 채선의 손가락이 움찔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를 달랠 수 없었다. 한 가령의 슬픔을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는 탓이었다.

비통한 울음을 쏟아내던 한 가령이 일순, 고개를 쳐들었다. 그러더니 이해할 수 없는 얼굴로 익제를 바라보았다. 

그의 잇새에서 쇠를 긁는 것 같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런데 이것이 어디서 난 것입니까?”

익제는 간단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눈매를 찌푸린 채 이야기를 듣던 한 가령이 한층 더 이해할 수 없는 얼굴을 했다. 

그가 주름진 얼굴을 들어 채선을 올려다보았다.

“모친의 유품이라고 하셨습니까?”

“……예.”

채선은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괜스레 뜨끔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한 가령이 미심쩍은 시선으로 그녀의 위아래를 훑었다.

그는 채선이 태부의 조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익제가 대놓고 말한 것은 아니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는 그 사실을 숨기려 하지 않았다. 

그러니 한 가령이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그렇다면 그녀는 누구란 말인가?

한참을 침묵하던 한 가령이 신중한 태도로 입술을 달싹였다.

“실례지만, 모친의 함자가 어떻게 되십니까?”

“류, 현 자, 덕 자 되오.”

한 가령이 기억을 되짚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다 이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래 쪼그리고 있던 무릎에서 뚜둑, 하는 뼈 소리가 들렸다.

“기억에 없는 이름입니다.” 

“그럴 것이오. 내 어미는 산골에서 평생을 보내셨소.”

한 가령이 밑져야 본전이라는 식으로 “부친의 함자는 어떻게 됩니까?” 하고 물었다. 채선이 겸연쩍은 얼굴을 했다. 

“내 아비도 어미와 함께 산골에서 평생을 보내셨소.”

“그래서, 부친의 함자가 어찌 되십니까?”

한 가령이 재차 그녀를 다그쳤다. 

채선이 의기소침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이상하게 한 가령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느낌이 드는 탓이었다.

“……심, 준 자, 경 자를 쓰오.”

“심준경.”

그 이름을 입속으로 몇 번 굴리던 한 가령이 이윽고 두 눈을 크게 떴다. 그의 잇새로 놀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심준경? 혹, 심 장군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심…… 장군이요?”

무심코 되묻던 채선이 펄쩍 뛰었다. 그녀는 얼토당토않은 말이라는 듯, 두 손을 휘휘 내저었다.

“아, 아니오! 그렇지 않소. 내 아비는 약초를 캐고 나무를 하는 평범한 사내였소. 그런데 장군이라니…….”

한 가령은 그녀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송곳 같은 시선이 그녀의 얼굴을 꼼꼼히 훑었다. 

“이럴 수가!”

그가 주먹으로 자신의 이마를 탁, 쳤다. 노인의 얼굴에 벼락같은 깨달음이 스치고 지나갔다. 채선은 어찌할 바를 모른 채 그의 눈치만 살폈다.

“그래, 내 누군갈 닮았다고 생각했더니…… 과연. 어째서 좀 더 빨리 눈치채지 못했을까. 죽을 때가 다 되었나 봅니다.”

한 가령의 혼잣말에 채선이 울상을 지었다. 그녀가 도와달라는 듯 익제를 쳐다보았다.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그가 불쑥, 입을 열었다.

“심 장군이라는 자가 이백중의 제자인가?”

“예?”

한 가령이 영문 모를 얼굴로 되물었다. 채선은 어쩔 줄을 모르고 발만 동동 굴렀다. 숫제 울음을 터뜨릴 기세였다. 

왜 안 그렇겠는가. 약초꾼의 딸이 장군의 여식으로 탈바꿈하기 직전인데. 겁 많고 소심한 채선이 두려워하지 않을 리 없었다.

익제는 그런 그녀를 못 본 척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풍주로 가던 중 이백중의 집에 들른 적이 있었다. 그가 부인을 보고 자신의 제자를 닮았다며 애틋하게 구는 바람에 내 심기를 상하게 만들었지. 이백중이 이번에 나를 도와주는 것도 부인 덕분이다.”

“아.”

알 수 없는 탄성을 내뱉은 한 가령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허공을 응시하며, 오래전의 기억을 끄집어냈다.

“예. 심준경은 이백중이 가장 아끼던 제자였습니다. 이백중의 후광뿐 아니라, 그 자신의 능력도 출중하여 젊은 나이에 폐하의 궁을 지키는 수문장이 되었지요. 그러나 폐하께서 붕어하신 후, 사직서를 제출하고 종적을 감추었습니다. 당시 이백중 어른께서 말씀하시길, 폐하를 지키지 못한 책임감을 느낀 모양이라고 하더군요.”

“책임감이라.”

익제의 목소리가 의미심장한 빛을 띠었다. 한 가령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을 들었을 때는 폐하의 지병이 어찌 그의 탓인가, 하며 흘려들었는데……. 어쩌면 그는 폐하의 사망 뒤에 도사리고 있는 음모를 눈치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증거가 없었겠죠. 후에 증거를 입수했다고 해도…….”

한 가령이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익제가 알 만하다는 듯, 대수롭지 않게 그의 말을 받았다.

“이미 숙부의 세상이었겠지. 그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산중에 몸을 숨기고 산 것이로군요.”

한 가령이 안타까운 얼굴로 혀를 끌끌 찼다. 

“젊은 나이에 두각을 나타내던 인재였는데, 나무꾼으로 살다가 죽다니. 시대를 잘못 타고났습니다.”

“그런 게 아닙니다. 제 아비는 정말로 나무꾼이었습니다.”

채선이 초조한 얼굴로 또다시 고개를 저었지만, 둘 중 누구도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녀의 속이 바싹 타들어 갔다.

익제가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 한 가령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런데 이것은 어떻게 얻었을까? 그리고 왜 노리개에 숨겨 아내에게 선물로 주었을까?”

“글쎄요.”

한 가령이 채선을 빤히 응시하며, 생각에 잠긴 얼굴로 말했다.

“어쩌면 때를 기다렸는지도 모르지요.”

익제가 침잠한 눈으로 손안의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전전긍긍하던 채선이 결국 말문을 열었다.

“모두 추측일 뿐이지 않습니까. 제 아비가 장군이라니……. 믿기지 않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제 아비는 약초꾼이었고, 나무꾼이었습니다.”

“딸에게 글을 가르치는 약초꾼이라.”

익제가 가볍게 눈썹을 들썩였다. 채선이 무슨 말인가 하려고 했지만, 그가 좀 더 빨랐다. 익제가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부인의 자매가 이것을 보았다고 하였소?”

“예.”

“그녀가 태자에게 이 문서의 존재를 밝힐 확률은?”

“!”

예상치 못한 말에 채선이 멍하니 입을 벌렸다. 부친의 정체에 안달복달하느라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었다. 

이선은 태자에게 거두어졌고, 그녀의 야심은 현재진행형이었다. 그녀가 이 문서를 탐낸 이유도 아마 태자의 눈에 들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런 그녀가 태자에게 이 문서의 존재를 함구할까?

거기까지 생각하던 채선이 별안간 눈매를 일그러뜨렸다. 그녀의 잇새로 씁쓸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말할 것입니다, 분명.”

멀리서 북풍한설이 몰아쳤다. 겨울을 알리는 바람이다. 채선은 싸늘하게 돌아서던 이선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리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은 매번 달랐다. 꿈에서 현실로 갑자기 끌려올 때도 있었고, 아주 자연스럽게 무의식에서 의식으로 전환될 때도 있었다.

오늘은 전자였다. 채선은 앗 하는 순간 꿈에서 튕겨 나오듯 잠에서 깼다. 눈을 뜨자마자 꿈을 기억하려 애썼지만,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저 그립고 애틋한 느낌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것이 몹시 아쉬웠다.

어쩌면 끊어진 인연에 대한 미련인지도 모른다. 혹은,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시절에 대한 연민인지도 몰랐다.

자신의 축객령에 두 눈을 크게 뜨던 이선의 표정이 떠올랐다. 그녀는 채선의 거절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당혹스러운 얼굴을 했다.

채선이 소리 없는 한숨을 삼키는 순간.

“잘 잤소?”

머리 위에서 다정한 음성이 떨어졌다. 그제야 그녀는 자신이 익제의 품에 안겨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불현듯, 벌어진 옷깃 사이로 그의 맨살이 보였다. 동그란 눈동자가 파르르 흔들렸다. 수십, 수백 번을 보아도 익숙해지지 않는 감각이다.

침착하게 숨을 들이쉰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친 그가 더없이 온화한 미소를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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