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 개의 별이 뜨는 밤 (114)화 (114/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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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

익제님도 나의 가족이니까.

맨 오른쪽에 적힌 글자를 읽으려던 채선이 다시 한번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커졌다.

“왜, 뭐라고 쓰여 있는데 그래?”

“이건…… 내가 모르는 글자야!”

덩달아 긴장한 얼굴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선이 이내 맥 빠진 표정으로 어깨를 떨구었다. 그녀가 눈을 흘기며 퉁을 놓았다.

“그러게, 아빠가 글을 가르쳐 줄 때마다 줄행랑을 치더라니. 어디, 이리 줘 봐. 내가 읽어볼게.”

“아니거든! 나 요즘에 공부 열심히 하거든? 웬만한 글자는 다 읽을 수 있거든? 나 혼자서 소설책도 읽거든?”

채선이 씩씩거리며 반박했다. 이선은 그녀의 변명을 듣는 둥 마는 둥 채선의 어깨 너머로 고개를 쭉 뺐다.

찬찬히 글을 읽던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딱딱하게 굳었다. 그녀를 둘러싼 기척이 심상치 않은 기색을 띠었다. 

이선이 종이를 향해 다급하게 손을 뻗었다.

“그거 이리 줘 봐!”

그녀가 종이를 낚아채려는 순간.

“!”

채선이 그것을 등 뒤로 감추었다. 이선이 눈살을 찌푸렸고, 채선은 두 눈에 힘을 주었다.

둘 사이에 짧은 침묵이 흘렀다. 방금까지의 온화하던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어색한 침묵이 그 자리를 메꾸었다.

“이게 뭐야?”

채선이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이선은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짐짓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별거 아니야.”

“별 것 아닌데 왜 달라고 해?”

채선은 종이 속에 적힌 글자를 읽진 못했지만, 이선의 표정은 읽을 수 있었다. 그녀가 자신의 마음을 읽는 것과 마찬가지로 채선 역시 그녀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탓이었다. 

이선은 자신의 손에 들린 종이를 욕심내고 있었다. 그것은 이 종이가 그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의미였다.

“채선아.”

이선이 그녀를 불렀다. 어릴 적과 마찬가지로 한없이 다정하고 상냥한 목소리였다. 채선의 심장이 울렁거렸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긴장한 눈동자가 이선에게 못 박혔다.

이선이 그녀를 향해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채선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매가 동그랗게 굽었다.

“그걸 내게 줘.”

“언니.”

“네게는 소용이 없는 종이야.”

“내게는 소용이 없는데, 언니에게는 소용이 있어?”

채선이 혼란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이선이 입꼬리를 당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채선을 달랬다.

“채선아, 부탁이야. 그건 너보다 나에게 더 필요해. 내 착한 동생아, 넌 어려서부터 내 부탁을 한 번도 거절한 적이 없었지.”

머뭇머뭇, 채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잇새로 망설이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응. 언니의 부탁이라면 얼굴도 모르는 이와 혼인을 할 수도 있었어. 언니는 내게 소중한 가족이니까.”

이선이 그런 채선의 뺨을 가만히 어루만졌다. 알고 있다는 듯, 다정하고 애틋하게.

“그래. 나도 그래, 채선아. 내게는 네가 가장 소중해. 우리는 이 세상에 단 한 명 남은 가족이잖아.”

“언……니.”

채선이 일렁이는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그러니까 그 종이를 내게 주렴. 어머니의 유품이니, 내게도 그것을 가질 권리가 있지 않겠니?”

채선이 스르륵, 시선을 떨구었다. 그녀의 말이 옳았다. 엄마의 유품은 저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녀는 이선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누가 뭐래도 이선은 그녀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 중 한 명이었으니까.

채선이 마침내 결심한 듯,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이선이 옅은 미소를 흘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채선이 무슨 결정을 했는지 짐작한 듯, 그녀의 눈동자가 대견한 빛을 띠었다.

채선의 입술이 열렸다. 그 사이로, 단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도영.”

그녀의 부름과 동시에 방문이 열렸다. 문 앞을 지키고 있던 도영이 곧장 방안으로 들어왔다. 

채선은 이선을 응시한 채로 그에게 명령했다.

“손님께서 가신다는군. 배웅을 부탁하오.”

“!”

도영이 이선에게 시선을 주었다. 이선은 이 상황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크게 떴다. 이윽고 그녀의 눈매가 찌푸려졌다. 

이선의 목소리가 다급한 빛을 띠었다.

“채선아!”

“도영.”

채선이 다시 한 번 도영을 재촉했다. 그제야 방 안의 분위기를 파악한 도영이 이선의 곁으로 다가갔다.

“이만 일어나시지요.”

그의 재촉에도 불구하고, 이선은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이 없었다. 채선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그녀가 미간을 찌푸렸다. 곧게 뻗은 아미가 일그러졌다.

“채선아, 나야 이선이. 네 쌍둥이 언니, 이선이라고.”

그녀의 목소리는 황망했고, 당혹스러웠으며, 동요를 감추지 못했다.

채선은 그 말을 듣지 못한 척 조용히 고개를 떨구었다. 이선은 여전히 그녀에게 소중한 사람이었다. 

그녀가 덜 소중해진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녀보다 더 소중한 사람이 생겼을 뿐이었다. 이선이 고귀한 여인의 자리를 탐내듯, 채선에게도 욕심나는 것이 있었다. 

익제.

사내는 끊임없이 그녀에게 믿음을 보여 주었고, 어떤 상황에서도 그녀를 포기하지 않았다. 또한, 단 한 번도 그녀를 이용하지 않았다. 

그러니 그녀 역시 그 믿음에 보답해야 했다. 그것이 채선의 최선이었다. 사내의 얼굴이 실망으로 일그러지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설령 그로 인해 이선이 화를 내더라도.

“내가 너의 하나밖에 없는 가족이라는 걸 잊은 거니? 그깟 사내 때문에!”

뒤늦게 배신감을 느낀 이선이 새된 목소리로 그녀를 비난했다. 도영이 이선의 팔을 붙잡고 강제로 일으켜 세웠다.

그녀가 입술을 질끈 깨문 채 채선을 노려보았다. 도영이 그녀를 방 밖으로 끌어냈다.

채선은 도영의 힘에 질질 끌려가는 이선을 향해 나직하게 말했다.

“하나밖에 없는 가족이 아니야, 언니. 익제님도 나의 가족이니까. 언니가 만들어준 나의 가족. 잊지 않았지?”

“윽.”

이선이 눈매를 일그러뜨렸다. 채선은 두 눈에 잔뜩 힘을 주고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그리고 제게 날아오는 그녀는 날 선 시선을 고스란히 맞받아쳤다. 

찰나의 순간이 수없이 지나고, 이선이 서늘한 낯으로 등을 돌렸다. 그녀는 도영의 팔을 뿌리치며 제 발로 방을 나갔다.

툭.

강철보다 굵고 단단하던 실이 끊겼다. 아니, 제 손으로 끊었다. 잘리지 않을 것 같던 인연의 실은 너무도 쉽게 잘려나갔다.

탁, 방문이 닫혔다. 그제야 채선의 얼굴이 울 것처럼 일그러졌다. 커다란 상실감이 그녀를 덮쳐왔다. 몸의 반이 잘려나가는 듯한 고통이 채선을 옥죄었다.

그러나 그녀는 울음을 터뜨리는 대신 조용히 입술을 사리 물었다. 지킬 것이 있는 사람은 강해지는 법이다.

***

“무슨 일이오?”

소식을 들은 익제가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채선은 그가 올 줄 알고 있었다는 듯, 입꼬리를 당기며 그를 맞았다.

그 아련한 미소에 익제는 더 이상 다가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알 수 없는 눈을 했다.

무슨 일일까.

그의 머릿속이 바쁘게 움직였다. 그토록 그리워하던 자매다. 그녀를 보았으니 기뻐해야 마땅했다.

설마 그녀를 따라가고 싶어진 건 아니겠지? 이제 와 혈육과 함께 살겠다는 말을 하는 건 아니겠지?

최악의 상황을 떠올린 익제의 얼굴에서 서서히 표정이 사라졌다. 새카맣게 가라앉은 눈으로 채선을 바라보던 그가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오?”

그러나 입 밖으로 나온 물음은 처음의 것과 똑같았다. 그는 생각보다 이성적이지 못했고, 생각보다 냉철하지 못했다.

채선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할 뿐 쉽사리 입을 열지 않았다. 익제의 입안이 바짝 타들어 갔다. 

그가 채선에게로 한발 다가서며 성마르게 물었다.

“보지 않는 편이 나았소?”

채선은 말없이 시선을 떨구었다. 그러다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잇새로 조용하나, 강인한 목소리가 비어져 나왔다.

“아니요, 볼 수 있어서 다행이었습니다. 덕분에 제게 가장 소중한 이가 누구인지 알았으니까요.”

익제는 그녀의 말 속에 담긴 뜻을 헤아리려는 듯 미간을 모았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가장 소중한 이가 누구라는 것인가? 나인가, 아니면 쌍둥이 언니인가? 역시 보여주지 않는 편이 나았나?

그때, 채선이 품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얇은 종이가 그녀의 손안에서 바스락, 하고 구겨졌다.

“어머니의 유품에 들어 있던 종이입니다. 이선이 이것을 탐냈습니다. 저는 아무리 봐도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서…….”

글자를 읽지 못하는 게 부끄러운 듯 채선이 다시 한번 시선을 떨구었다. 그녀의 귓불이 발갛게 물들었다.

익제는 그 종이를 받아드는 대신 채선의 얼굴을 뚫어질 듯이 쳐다보았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선은 태자 전하의 사람이 되지 않았습니까? 그런 이선이 탐을 낸다는 건 태자 전하에게 도움이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익제님께도 의미를 가질지 모르기에.”

아아, 그러니까 한마디로 그녀보다 나를 택했다는 것이로군.

그제야 익제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만으로도 그는 이미 세상을 손에 쥔 것처럼 의기양양했다. 가슴이 빠듯하게 부풀었고, 뱃속이 충만했다.

그토록 그리워하던 혈육보다 나를.

“…….”

다시 한번 그 말을 음미하던 익제가 느릿하게 목울대를 넘겼다. 그러다 뒤늦게 채선의 손에 들린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익제가 채선의 손에서 종이를 건네받았다. 대수로운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어미가 가지고 있던 종이라면 끽해 봐야 땅문서 정도가 아니겠는가.

혹은, 어디에 숨겨 놓은 재산이 있다던가.

익제의 심드렁한 시선이 종이 위에 적힌 글자를 더듬었다. 다음 순간, 그의 눈이 커다래지고 그 속에 경악이 스몄다. 

“이건!”

채선은 서서히 굳어지는 익제의 얼굴을 보며 조용히 숨을 삼켰다. 

이선의 반응으로 보아 심상치 않은 문서라곤 생각했지만, 그 역시 저런 얼굴을 하는 걸 보니 그녀의 짐작대로 보통 문서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꿀꺽, 마른침을 삼킨 채선이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익제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가 알 수 없는 눈으로 채선을 바라보았다. 새카만 눈동자 안에 격렬한 감정이 요동쳤다. 채선으로서는 짐작도 할 수 없는 감정의 덩어리였다.

그가 나직하게 울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모친의 유품이라고 하였소?”

“예. 어미가 숨이 끊어지기 직전, 제게 은으로 만든 노리개를 남겼습니다. 광무대군에게 납치를 당했을 때, 노리개를 이용해 창문의 덮개를 떼어내느라 그만 부러지고 말았지요. 그 덕에 이 종이를 발견하였습니다. 그 후 여러 가지 일들이 많아 까맣게 잊고 지내다가 이선을 만나고 나서야 생각이 났습니다. 그래서 그녀에게 보여 주었던 것입니다.”

잠시 침묵한 채선이 그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제가 아직 배우지 않은 글들이 많아…….”

익제가 어금니를 깨문 채 짓이기듯이 말했다. 그것은 분노 같기도 했고, 슬픔 같기도 했으며, 혹은 원망 같기도 했다. 그래서 채선은 섣불리 뒷말을 잇지 못했다.

이윽고 그의 잇새를 뚫고 서슬 퍼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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