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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별이 뜨는 밤 (113)화 (113/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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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3

    이선아!

    “……응.”

    채선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선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녀의 숱 많은 속눈썹이 나비의 날갯짓처럼 가볍게 팔랑거렸다. 

    이선은 일견 담담하게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잇새를 비집고 나오는 말은 그 어느 때보다 묵직했다.

    “그 당시에 나는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 놓여 있었어.”

    “…….”

    “광무대군에게 쓰임이 다하였거든.”

    “쓰임을 다했다고? 어째서? 언니는 귀인의 별이잖아.”

    채선이 미심쩍은 얼굴로 되물었다. 광무대군은 어딜 가도 이선과 동행했고, 그녀의 지위는 날로 견고해졌다. 

    대문 밖을 나가지 않는 채선에게까지 그녀에 대한 소문이 들릴 정도였으니, 이선의 위세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쓰임을 다했다니?

    채선의 눈동자가 한층 더 영문 모를 빛을 띠었다.

    “…….” 

    이선은 이곳으로 오기 전, 채선에게 그녀가 귀인의 별이란 사실을 알리지 말라던 익제의 협박을 떠올렸다. 그래, 그것은 협박이었다. 

    ‘어떤 연유로 태자 전하의 궁에 들어가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분께 네가 흉인의 별이라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거든 입단속 잘하는 게 좋을 것이다. 거기서 쫓겨나면 갈 데라고는 외딴 절밖에 없을 테니.’

    그의 목적이 무엇이든, 그녀에게는 잘된 일이었다. 자신의 입으로 제가 흉인의 별이라는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죽기보다 싫었다.

    그녀는 자신의 동생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그 마음에 거짓은 없었다. 다만,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여인이 되고 싶은 욕심이 동생에 대한 애정보다 아주 조금 더 컸을 뿐이다.

    이선은 산골에서와 달리 하얗게 피어난 채선을 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달지를 만나지 않았다면, 마을에 약을 사러 갔던 사람이 저였다면, 그리하여 광무대군의 부인이 되지 않았다면…… 지금 채선이 앉은 자리는 자신의 것이었을까?

    이선은 이미 지나간 일에 ‘만약’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녀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야 했다. 그리고 지금 그녀의 자리는 태자의 옆이다.

    짧은 상념에서 깨어난 이선이 차분하게 덧붙였다.

    “응. 광무대군께서는 더 이상 나를 필요로 하지 않으셨어. 처소도 정안궁 내에서 가장 외진 곳으로 바뀌었고, 하인들 역시 나를 무례하게 대했지. 다른 부인들은 숫제 나를 없는 사람으로 취급했단다. 얼마 전까지 나는 이름만 부인이지, 하녀보다도 못한 처지였어.”

    “그럴 수가…….”

    채선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이선이 안타까웠다. 그녀의 처지가 바뀐 것도 모르고, 이곳에서 호의호식했던 스스로가 한심했다.

    “그때, 광무대군께서 내게 보따리를 쥐여 주며 네게 전해주라 하였어. 그의 명을 거절했더라면, 아마 난 지금 살아 있지 못했을 거야.”

    “그럼…….”

    채선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꽉 움켜쥔 주먹이 긴장으로 바르르 떨렸다. 묻고 싶지 않았지만,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 너는 거기에 뭐가 들어 있었는지 몰랐던 거야?”

    이선이 다시 한숨 같은 웃음을 흘렸다. 그녀는 어리석은 아이를 보듯, 애틋하고 가여운 시선으로 채선을 보았다.

    “광무대군께선 그것이 무엇인지, 내게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어.”

    “그럴 줄 알았어.”

    비로소 채선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어깨를 툭 떨구며 눈물을 글썽였다. 그래, 그럴 줄 알았다. 어떻게 이선이 제게 그런 짓을 하겠는가. 말도 안 된다.

    채선이 다행이라는 듯 해사한 미소를 베어 물던 순간, 이선이 평온한 어조로 덧붙였다.

    “하지만 그의 속셈을 모를 정도로 내가 멍청하진 않아.”

    “!”

    “나는 거기에 뭐가 들어 있는지 듣지 못했지만, 짐작은 할 수 있었어.”

    일순, 채선이 낮게 숨을 들이켰다. 황망한 눈동자가 동그랗게 벌어졌다. 삐걱삐걱, 그녀의 고개가 어색하게 이선을 찾아갔다.

    “알고도……, 알고도 그것을 내게 전해줬다고?”

    채선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망연하게 되물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이선이 나직하게 속삭였다.

    “아이는 언제든지 다시 가질 수 있잖아.”

    “이선아!”

    채선이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뜨악한 눈으로 이선을 내려다보았다. 

    달싹이는 입술 사이로 가쁜 숨이 터졌다. 제 앞에 앉아 있는 것이 정말로 이선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녀의 몸이 외줄 아래로 기우뚱, 하고 기울었다. 

    이선이 그런 채선을 빤히 올려다보며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숱 많은 속눈썹이 그녀의 눈 밑에 짙은 그늘을 드리웠다.

    “나라면 당연히 그랬을 거야. 아이는 언제든 다시 가질 수 있으니, 채선이 네가 안전하길 바랐을 거야.”

    “…….”

    채선은 혼란스러웠다. 어쩔 줄 모르는 눈동자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했다.

    우선은 이선의 태연한 모습이 그랬다. 이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 그녀가 몹시 낯설었다. 자신이 이제까지 알고 있던 이선은 누구였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그런 한편으로 그녀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채선 역시 그녀를 위해서라면 모든 걸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이는 아니었다. 그건 누구도 건드려서는 안 될 그녀의 역린이었다.

    채선은 저도 모르게 배 위로 손을 가져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평평하던 배가 어느새 봉긋하게 부풀어 있었다. 

    이선의 시선이 그녀의 손을 따라갔다. 알 수 없는 눈으로 채선의 배를 응시하던 그녀가 불쑥, 물음을 던졌다.

    “유산을 하지 않았다지?”

    “……응.”

    “그럴 거라 생각했어.”

    “…….”

    “은원군께서 광무대군의 부인이 주는 약재를 네게 먹일 리가 없잖아. 그리 호락호락한 분이 아니신걸.”

    “아!”

    그 순간, 섬광 같은 깨달음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선은 이 모든 걸 예상하고 있었다. 익제가 그녀를 믿지 않으리라는 것까지.

    “이선아.”

    채선이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면 그렇지, 채선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입꼬리를 당겼다. 

    이제야 그녀에 대한 오해가 풀렸다. 저를 다정하게 바라보는 이선, 그녀는 여전히 자신의 언니였다.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핏줄.

    “이선아!”

    기어코 채선의 눈에서 눈물이 뚝, 하고 떨어졌다. 이선이 보드랍게 웃으며 손등으로 그녀의 눈물을 훔쳤다.

    “미안해. 내가 그것도 모르고 널 오해했어. 내가 미안해.”

    훌쩍거리던 채선이 그녀의 품을 파고들며 기어코 으아앙, 하는 울음을 터뜨렸다. 어린 시절, 어미에게 혼난 뒤면 늘 그랬듯이.

    이선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체념 어린 한숨을 흘리며 그녀의 등을 끌어안았다. 이선의 목소리에 희미한 웃음이 맺혔다.

    “어미가 될 여인이 이리 아이처럼 울다니.”

    “이선아, 다행이야. 정말로…… 다행이야. 널, 널…….”

    “그래.”

    토닥토닥, 이선이 채선의 등을 두드렸다. 한참을 흐느끼던 그녀가 훌쩍, 코를 들이마시며 고개를 들었다. 콧등이 발갛게 변해 있었다. 그것도 어릴 때와 똑같았다.

    머쓱하게 얼굴을 붉힌 채선이 소매로 눈가를 슥슥 닦았다. 그러다 마침 생각났다는 듯, “아, 참.”하고 입을 열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이선에 대한 애정으로 반짝였다.

    “태자 전하께서 너를 거두셨다는 이야기는 들었어. 대관절 어떻게 된 거야?”

    “그냥 그렇게 되었어.” 

    훌쩍, 또다시 코를 들이마시던 채선이 가만히 눈을 흘겼다. 품속을 뒤지던 그녀가 무언가를 꺼냈다. 

    탁자 위에 놓인 것을 보던 이선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게 뭐야?”

    채선이 코끝을 발갛게 물들인 채로 대답했다. 다시 만난 언니가 마냥 좋은지, 그녀의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울다 웃으면 엉덩이에 털 난다는 이선의 구박에도 채선은 또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엄마 유품.”

    “유품?”

    이선은 반으로 쪼개진 모란 문양의 노리개를 두 손에 하나씩 들었다. 쪼개진 것뿐만이 아니다. 노리개는 울퉁불퉁 휘어져 있었고, 가장자리는 깎여나가 뭉툭했다.

    채선이 면목 없다는 듯이 고개를 푹 숙이며 시무룩하게 덧붙였다.

    “내가 잘 간수를 했어야 하는데, 깨뜨리고 말았어. 좀 구부러지긴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딱 붙이면 감쪽같아.”

    전혀 감쪽같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몹시 채선다워 이선은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어릴 때도 어떤 물건이든, 채선의 손에만 가면 산산조각이 나곤 했다.

    그래서 밥상을 나르는 건 늘 이선의 몫이었다. 채선이 깨뜨린 접시와 부러뜨린 상이 한두 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아비는 달포에 한 번씩 밥상을 깎아야만 했다.

    오랜만에 옛 기억을 떠올리던 이선이 노리개에 시선을 주었다. 

    모란이 쪼개진 연유는 알지 못했지만, 그럴 만한 사연이 있었을 거라고 짐작했다. 어쩌면 그 사연은 광무대군과 관련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녀가 깨진 모란 조각을 들더니 반쪽은 제가 갖고, 나머지 반쪽은 채선에게 건네주었다.

    “잘했어. 네 덕분에 둘이서 하나씩 나눠 가질 수 있잖아.”

    “아!”

    그제야 그 사실을 깨달은 듯, 채선이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러다 이내 울듯이 눈매를 찡그렸다. 

    채선이 글썽거리는 눈으로 한껏 입매를 당겼다. 

    “그래. 이렇게 하면 엄마의 유품을 나눠 가질 수 있구나. 우리가 자매라는 증표로.”

    “그런데 엄마가 이걸 가지고 있었다고? 먹고 죽으려고 해도 돈이 없다는 게 엄마 입버릇이었는데 말이야.”

    “응. 나도 깜짝 놀랐어.”

    채선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노리개를 빤히 들여다보던 이선이 다음 순간, 두 눈을 살짝 크게 떴다. 그녀의 눈동자가 영특하게 반짝였다.

    “그런데 이렇게 딱 절반으로 쪼개지다니, 원래 금이 가 있었던 거 아냐?” 

    “그런가?”

    “아무리 그래도 은으로 만든 건데, 이리 쉽게 쪼개질 리가 있니? 여기, 이 안쪽의 틈은 뭐야?”

    “아, 그거! 맞다, 나도 까맣게 잊고 있었어.”

    채선이 그제야 생각난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어떻게 그걸 잊고 있었냐는 듯 자신의 머리를 콩, 하고 쥐어박았다. 

    그 모습에 이선이 또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거기에 웬 종이 한 장이 들어 있었는데 말이야. 내가 그걸 어디에다 뒀더라…….”

    향덕원으로 돌아오고 난 뒤, 갑자기 많은 일이 일어난 탓에 그 종이에 대해 완전히 잊고 있었다. 

    그럴 만도 했다. 광무대군이 문책을 당하고 귀양을 갔다. 그 모든 일이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빠르게 진행되었다. 그러니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골똘히 기억을 되짚던 채선이 타박타박, 침상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베갯잇을 뒤져 곱게 접힌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이거야.”

    “이 종이가 노리개 안에 들어 있었다고?”

    이선이 미심쩍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가 채선의 손에 들린 종이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응.”

    채선 역시 의심스러운 눈으로 종이를 보았다. 도대체 무엇이길래 어미의 노리개 안에 꽁꽁 숨겨 놓았을까, 그녀가 천천히 종이를 펼쳤다. 

    “?”

    일순, 채선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종이 위에는 동그란 원 모양으로 여러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었고, 이름 옆에는 붉은색의 지장이 찍혀 있었다. 마치 붉은 꽃이 핀 것처럼.

    “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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