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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별이 뜨는 밤 (112)화 (11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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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2

    그대는 나의 귀인이었소.

    “복수라니요?”

    익제가 우스운 농담이라도 들었다는 듯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태자의 눈동자는 조금도 웃지 않았다. 

    “제 부인은 마음이 매우 여립니다. 땅에 돋아난 꽃 한 송이, 열없이 날아다니는 나비 한 마리까지 애틋하게 여기는 여인입니다.”

    익제는 부인 자랑에 어쩔 줄 모르는 팔불출처럼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태자가 그런 그를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전후 사정을 전해 들은 부인이 그 여인을 걱정하더군요. 그녀는 아무것도 몰랐던 게 분명하다고 말입니다. 좋은 마음으로 광무대군의 선물을 전했는데, 일이 이렇게 되어 곤욕을 치르지는 않을까, 근심이 깊었습니다.”

    거기서 잠깐 말을 끊은 익제가 태연하게 미소 지었다.

    “그래서 얼굴이나 보여주자, 싶었던 것뿐입니다. 무사히 있는 것을 보면 안심하지 않을까 하고 말입니다. 애초에 처첩으로 들일 생각은 없었습니다.”

    태자는 그 말의 진위 여부를 가리기라도 할 것처럼 익제의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는 익제가 보기만큼 만만한 사내는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광무대군의 속셈을 꿰뚫어 보고, 부인에게 약재를 먹이지 않은 것부터가 그랬다.

    겉으로는 허허실실, 사람 좋은 얼굴로 웃고 다니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어쩌면 그는 인애대군보다 더 큰 정적이 될지도 모른다. 

    다만, 지금은 그를 지지하는 세력이 한 줌의 티끌처럼 미미하여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는 것뿐이었다.

    익제가 콧잔등을 긁적이며 허허허,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듣자 하니, 그 여인은 친정이 없다 하여 좋은 절이라도 소개시켜 줄까 하였는데, 그럴 필요는 없겠군요. 태자 전하의 궁이라.”

    반쯤 혼잣말을 읊조린 익제가 미련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담백한 투로 덧붙였다.

    “그러면 잠시 향덕원에 들러 제 부인과 인사나 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시겠습니까? 그녀의 얼굴을 보면 부인도 마음을 놓을 듯합니다. 회임 중이라 그런지 작은 일도 크게 생각하는 바람에 마음을 달래주는 게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닙니다. 회임을 하면 다 이런 것인지, 아니면 제 부인이 유난스러운 것인지. 부인의 비위를 맞추려 하루하루가 살얼음 위를 걷는 것 같습니다.”

    익제가 보란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의 눈매에는 웃음이 걸려 있었다. 까다로운 부인이지만,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태자는 그의 의중을 파악하려는 듯 잠시 침묵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군대부인이 그리 엄혹한 일을 겪었는데도, 자신보다는 남을 먼저 생각하는군. 그 정도 배려야 하지 못할 게 무엇인가. 내일 자네의 집으로 보내겠네.”

    “감사합니다, 태자 전하. 제 부인도 태자 전하의 은혜에 한량없는 기쁨을 느낄 것입니다.”

    익제가 순순한 얼굴로 고개를 조아렸다. 

    그러나 바닥을 향한 그의 표정은 어느새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태자의 꿍꿍이를 알 수 없는 탓이었다. 그의 눈동자가 가을 새벽의 서리처럼 시린 빛을 띠었다.

    ***

    “정말입니까?”

    채선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믿기지 않는 사실 앞에서 그녀의 눈동자가 가느다랗게 파동했다.

    익제는 부드럽게 미소 띤 얼굴로 그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놀람과 당혹, 기쁨과 그리움이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그녀의 표정을.

    그것만으로도 태자에게 머리를 숙이고 온 보람이 있었다.

    “맙소사!”

    나직한 탄성을 터뜨린 채선이 두 손으로 자신의 입을 막았다. 왈칵, 터져 나오던 감정이 도로 목구멍 안으로 들어갔다.

    “어떻게……?”

    한참 만에야 채선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녀는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듯, 일렁이는 눈으로 익제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다정하게 미소 지으며 채선의 눈가를 매만졌다. 익제의 손끝이 스칠 때마다 그녀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부부는 일심동체라 하였는데, 부인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내가 모를 것이라 생각하였소?”

    “하지만 언니는……!”

    “걱정 마시오.”

    채선은 그것이 익제에게 있어 얼마나 어려운 결정인지 알고 있었다. 어찌 되었든, 이선은 광무대군의 사람이었고, 그런 그녀를 용서하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제게 이선은 더없이 소중한 쌍둥이였지만, 익제에게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이었다. 아니, 그에게 칼끝을 겨눈 광무대군의 사람이었으니 남보다 못한 존재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익제가 그윽한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채선의 눈동자가 그에 대한 강렬한 감정으로 요동쳤다. 아마도 짙은 애정과 고마움, 혹은 미안함. 

    그게 무엇이든 그는 채선을 붙들어둘 족쇄 하나를 더 채웠고, 그녀는 더욱 단단하게 그 땅에 뿌리를 내렸다. 그것만으로도 익제에게는 남는 장사였다.

    불현듯, 그녀의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다. 

    “어쩌면.”

    채선이 무심코 말을 뱉었다. 그러다 자신의 목소리에 놀란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익제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는 그녀를 시선만으로 재촉했다. 눈가를 더듬던 손가락이 내려와 그녀의 입술을 매만졌다. 그리고 입술 사이를 살짝 벌렸다. 

    치열을 더듬는 그의 손가락에 채선이 할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어쩌면 저는 정말로 귀인일지 몰라요.”

    “…….”

    일순, 익제가 입을 다물었다. 그의 얼굴에서 서서히 표정이 사라졌다. 채선이 그것을 어찌 알았을까, 그의 머릿속으로 진실을 알고 있는 이들의 얼굴이 하나씩 떠올랐다 사라졌다.

    그중 입방정을 떤 것은 누구인가.

    익제의 머릿속이 차갑게 식어가던 그때, 채선이 감격에 겨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제가 정말로 흉인이었다면, 어떻게 익제님의 만날 수 있었겠습니까.”

    “!”

    문득, 그가 허를 찔린 표정을 지었다. 익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채선이 한 걸음을 내디뎠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좁혀졌다. 그의 소맷부리를 살짝 거머쥔 그녀가 익제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

    그녀가 제 발로 그의 품에 안겼다. 그리고 어리광을 부리는 어린 동물처럼 그의 품속을 깊숙이 파고들었다.

    익제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아니, 숨조차 크게 쉴 수 없었다는 말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는 뜻하지 않은 선물을 받은 사람처럼 놀라고 당혹스러운 얼굴을 했다. 그것은 생각지도 않았던 큰 선물이 분명했다. 익제가 그답지 않게 초조한 낯으로 자신의 턱을 문질렀다.

    다음 순간, 그의 얼굴이 봄눈처럼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처음에는 눈매가 허물어지나 싶더니, 마침내는 입술이 벌어지고, 그 사이로 따스한 숨결이 터져 나왔다. 

    그것이 웃음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건 조금 뒤의 일이었다.

    하하하.

    기꺼운 웃음이 방안을 맴돌았다. 익제는 두 팔을 뻗어 그녀를 마주 안았다. 그가 채선의 머리에 자신의 뺨을 묻고 살짝살짝 문질렀다. 

    “처음부터.”

    그의 목소리가 채선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나직한 웃음이 묻어 있는 목소리였다.

    “그 봄날, 아무도 모르는 깊은 산골에서 그대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채선은 그의 음성에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어쩌면 그가 울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목소리 끝이 희미하게 떨렸기 때문이다.

    “그대는 나의 귀인이었소.”

    “!”

    채선의 몸이 파드득, 떨렸다. 익제가 마치 날아가는 새를 붙잡듯 더욱 힘주어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대가 나의 목숨을 구해준 순간부터. 내 손을 잡고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기던 순간부터. 내 귓가에 쉴 새 없이 수다를 늘어놓던 순간부터. 내게 하얗게 웃어 준 그 순간부터. 그때부터 그대는 이미 나의 귀인이었소.”

    “아……!”

    채선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울고 있을 거라 생각했던 익제는 웃고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 다정하고 자상하게.

    우는 것은 그녀였다.

    익제가 손을 뻗어 그녀의 눈물을 닦았다. 그의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그리고 그대가 울보라는 걸 알게 된 순간부터.”

    기어코 채선은 소리 없는 울음을 터뜨렸고, 익제가 그녀를 향해 느릿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는 자신의 입술로 채선의 눈물을 닦았다. 

    그의 입술이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익제는 그녀의 눈꺼풀을 핥았다. 퐁퐁, 솟아나던 눈물이 흔적도 없이 그의 입속으로 사라졌다.

    그녀의 눈물 맛은 조금 짜고, 또 조금 달았다.

    “…….”

    그것이면 되었다. 그녀가 귀인이든 흉인이든 상관없었다. 그에게는 처음부터 귀인이었으니, 그녀는 심채선이면 되었다. 

    익제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채선은 수많은 감정이 혼재된 눈으로 제 앞에 앉아 있는 여인을 바라보았다. 할 말이 무척 많았다. 그러나 정작 입 밖으로는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방 안에는 오직 둘뿐이었다. 눈앞의 여인은 평소와 다름없는 미소를 짓고 있었고, 채선은 울음을 삼키려 애쓰고 있었다. 

    그녀가 간신히 입술만 달싹여 여인의 이름을 불렀다.

    “이……선아.”

    “또 이선이래. 언니라는 말은 대관절 어디다 팔아먹은 거니?”

    이선의 퉁에 채선은 말없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채선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그새 수척해진 이선의 얼굴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묻고 싶은 게 많았다. 하고 싶은 말도 많았다. 

    하지만 이선은 별다른 말이 없었다. 잘 지냈냐는 안부도, 미안하다는 사과도. 그저 평소와 똑같이 다정하게 미소 지을 뿐이었다.

    그게 몹시 이상했다. 그녀는 자신에게 낙태약을 건네주었다. 그런데 어째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일까.

    설마, 아무것도 몰랐던 것일까. 그저 광무대군에게 보기 좋게 이용당한 것뿐일까.

    달싹이던 입술을 도로 다물기를 몇 번, 채선이 가까스로 목구멍을 쥐어짰다. 반쯤의 기대와 반쯤의 두려움이 섞인 목소리가 그녀를 향해 날아갔다.

    “아니……지?”

    밑도 끝도 없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이선은 채선이 무엇을 묻는지 알고 있었다. 이선은 채선이 말하지 않는 속마음까지 눈치채는 그녀의 분신이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날 때부터 함께였다. 기쁠 때도 함께였고, 슬플 때도 함께였으며, 즐거울 때도, 화가 날 때도 함께였다. 그러니 서로의 마음을 모르는 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채선은 이선의 입으로 아니라는 말을 듣고 싶었다. 그러면 그녀를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선이 감정을 읽을 수 없는 눈으로 채선을 쳐다보았다. 길어지는 침묵에 채선의 숨이 턱하고 막힐 때쯤, 이선의 입술이 열었다.

    “맞아.”

    “이선아!”

    “언니라는 말은 어디다 팔아먹었냐니까.”

    “!”

    이선이 누그러진 얼굴로 웃었다. 

    경악성을 터뜨리던 채선이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선은 여전히 상냥했고, 여전히 살가웠다. 

    그게 섬뜩했다. 눈앞에 있는 여인은 그녀가 아는 이선이 아닌 것 같았다. 

    마치 예전 언젠가, 정안궁 앞 나무에 숨어 가마 안에 있던 고귀한 그녀를 보았던 때처럼 낯설고 생경한 느낌이 선득하게 목덜미를 훑고 지나갔다.

    “…….”

    채선은 저도 모르게 조용히 숨을 들이켰다. 

    그녀는 놀이패에 등장하는 광대처럼 아슬아슬한 줄 위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조금만 균형을 잃어도 천 길 낭떠러지 아래로 추락하는 위태로운 외줄 타기였다.

    그래서 섣불리 움직일 수도, 입을 열 수도 없었다. 그녀가 한마디를 하는 순간, 살얼음 같은 균형이 깨어질까 봐.

    그때. 

    “채선아.”

    이선이 다정하게 그녀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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