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 개의 별이 뜨는 밤 (111)화 (111/131)
  • 16645625196528.jpg

    111

    반드시 죽여야 한다.

    채선의 물음에 방금까지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던 익제가 금세 씁쓸한 웃음을 흘렸다. 그는 느릿하게 수면 위로 시선을 떨구었다.

    “글쎄.”

    익제의 잇새로 자조 어린 목소리가 비어져 나왔다.

    “마음 같아서는 그자를 뼈째로 잘근잘근 씹어 먹고 싶으나, 태자 전하께서 나선 이상 내게 기회가 올 것 같진 않소. 분하지만, 태자 전하의 처분을 기다릴 수밖에.”

    익제는 그 사실이 몹시 탐탁잖았다. 꽉 다물린 턱, 핏대가 선 목, 가늘게 떨리는 주먹을 보던 그녀가 살며시 한숨을 삼켰다. 

    태자 전하.

    폭풍은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진로를 바꾸었다. 

    침울한 채선의 얼굴을 본 익제가 아차 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허나 걱정 마시오. 태자 전하께선 형제라고 하여 광무대군의 죄를 눈감아줄 마음이 없으니 공명정대하게 판단하실 것이오.”

    짐짓 다정한 얼굴을 꾸민 그가 채선에게 손을 내밀었다.

    “돌아갑시다. 바람이 제법 차가워 풍한이 들까 염려되는군.”

    “혼자서도 걸을 수 있습니다.”

    송하와 도영의 눈치를 살핀 채선이 겸연쩍은 얼굴로 말했다. 

    “그러다 또 넘어지면 어찌할 것이오?”

    “홑몸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욱 조심하고 있어요. 이제는 예전처럼 쉽게 넘어지지 않습니다.”

    “흠.”

    익제의 눈매가 불퉁한 빛을 띠었다. 그가 주인 잃은 제 손을 내려다보다가 머쓱하게 팔을 거두었다.

    “그럼 어디 혼자 걸어 보시오.”

    “예.”

    익제의 목소리가 퉁명스럽게 변한 것을 모르고 채선은 야무지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보란 듯이 신중하게 걸음을 내디뎠다. 사박사박, 비단 천이 바닥을 쓸고 지나갔다.

    채선은 익제와 송하가 지나치게 걱정이 많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그 험한 산중에서도 홀로 삶을 이어나갈 만큼 억척스럽고 씩씩했다. 

    그래서 저를 애지중지하는 두 사람의 모습에 가끔은 낯이 붉어지기도 했다.

    그녀는 충분히 조심했고, 어느새 아치형 다리 아래까지 내려왔다. 그것 보라는 듯 채선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한 걸음 뒤에서 그녀를 따라가던 익제가 슬쩍, 그녀의 치맛자락을 밟았다.

    “그러니까 걱정이 너무 많…… 앗!”

    채선이 비틀거렸다. 익제가 기다렸다는 듯 팔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붙잡았다. 마치 맞춘 것처럼 자신의 품에 꼭 들어맞았다. 빈틈없이 두 사람의 몸이 맞물렸다.

    익제가 웃음을 참으며 짐짓 엄한 얼굴로 그녀를 나무랐다.

    “그것 보시오, 그러게 처음부터 내 손을 잡고 갔으면 이럴 일이 없지 않겠소? 내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기는 법이오.”

    채선이 시무룩하게 눈꼬리를 떨구었다. 어째서 넘어졌나, 도무지 알 수 없다는 듯 잔뜩 풀이 죽은 기색이었다.

    “조심한다고 했는데…… 치마를 밟았나 봅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까진 없고, 이제라도 알았으면 됐소. 자, 갑시다.”

    그녀를 품에서 떼어 놓은 익제가 채선을 향해 다시 손을 내밀었다. 이번에는 거절하지 않고 그 손을 마주잡았다. 두 사람은 나란히 후원을 가로질렀다.

    몇 걸음 뒤에 있던 송하가 슬그머니 눈을 흘기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방금, 주인님께서 부인의 치마를 일부러 밟지 않으셨습니까?”

    “으음.”

    도영은 차마 제 주군의 치부를 밝힐 마음이 들지 않는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송하가 안타까운 시선으로 채선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때, 익제가 살짝 고개를 숙이더니 그녀의 귓가에 무슨 말인가를 속삭였다. 채선의 눈매가 흐드러지고, 마침내 꽃망울 같은 웃음이 터졌다.

    뭐, 행복하시니 상관없나. 

    단념의 한숨을 삼키던 송하가 채선의 귓불을 지분거리는 익제의 수작을 보며 두 눈을 뾰족하게 떴다.

    아니, 그래도 상관없을 것 같진 않은데…….

    ***

    익제는 서탁을 톡톡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방안에는 원진과 한 가령이 있었지만, 둘 중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익제의 심기가 편찮은 걸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귀양?”

    그의 물음에 한 가령이 긴장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황급히 뒷말을 덧붙였다.

    “예. 말이 귀양이지 죽는 것보다 못할 것입니다. 재산과 지위, 가족을 모두 잃고 혼자 몸으로 유배를 떠나는 것이니까요. 집 주위를 가시나무로 두르는 위리안치 형을 선고받았다고 합니다.”

    “위리안치.”

    “위리안치는 중죄인에게 내리는 형벌입니다. 들리는 소식으로는 지금 병사들이 정안궁으로 들이닥쳐 재산을 압류하는 중이라고 합니다. 영지와 재물뿐 아니라, 사병과 하인들도 팔려 갈 겁니다. 가족들도 뿔뿔이 흩어지겠지요. 그의 부인들은 자제와 함께 친정에 몸을 의탁할 테고, 가신들은 남의집살이를 하게 될 것입니다. 광무대군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결국.”

    이리되는 것인가.

    익제는 허공을 노려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나직한 실소를 흘렸다. 작금의 상황이 아주 못마땅하다는 듯.

    “광무대군의 숨이 붙어 있다?”

    그는 광무대군을 용서할 수 없었다. 채선뿐 아니라 두 사람의 아이까지 없애려고 한 자였다. 그와 같은 하늘을 이고 산다는 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유배를 간다고 하여 그의 야심이 사라질 리 없었다. 그는 언제고 자신의 세력을 되찾으려 할 것이고, 황제의 자리를 탐낼 것이다.

    그런 그가 가장 먼저 노릴 것이 무엇이겠는가.

    귀인의 별.

    후환은 남겨둘 필요가 없었다. 그것이 채선과 관련된 일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원진.”

    “예, 주군.”

    익제가 서늘한 시선으로 그를 보았다.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냉혹한 명령을 내렸다.

    “너는 이 길로 귀양길에 오르는 광무대군을 쫓아가라. 그리고 기회를 틈타 그의 숨통을 끊어놓아라. 반드시 죽여야 한다. 그를 죽이기 전까지는 돌아오지 마라.”

    “예.”

    원진이 고개를 숙인 후, 곧장 방을 나섰다. 잠시 침묵하던 익제가 이번에는 한 가령에게 시선을 던졌다. 

    “부인들은 친정에 몸을 의탁한다?”

    “예, 아무래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광무대군은 끊어진 연입니다. 더 이상 그 집에 머물 수는 없을 테지요. 집이 남아 있을 리도 없을 테고 말입니다. 원래라며 부인들 역시 평민으로 강등되어야 하나, 태자 전하께서 아량을 베푸신 모양입니다.”

    “아량? 하, 황제가 되기 전에 뒷말이 나오는 걸 원치 않아서겠지.”

    “예. 지금은 냉정하다거나 잔혹하다는 평가를 듣고 싶지 않으실 테니까요. 한 번 낙인이 찍히면, 후에 무슨 일을 하든 그 말이 따라다닐 겁니다.”

    익제가 생각에 잠긴 얼굴로 다시 서탁을 두드렸다. 한 가령이 줄줄 말을 이었다.

    “죄인의 가족은 원하는 이가 있을 경우, 그에게 보내기도 합니다. 간혹 공을 세운 장군이나, 지체 높은 황족들이 죄인의 가족을 데려가는 경우도 있었지요. 특히, 미모가 빼어난 여인이 있다면, 이때다 싶어 눈독을 들이는 이들이 더러 있습니다.” 

    잠깐 말을 멈춘 한 가령이 옛 기억을 회상하듯 주름진 눈매를 가늘게 떴다.

    “허나, 광무대군의 가족들입니다. 누가 섣불리 나서겠습니까? 아무리 고꾸라졌다 한들 명색이 황족이었고, 그 부인들 역시 그랬는데 말입니다. 게다가 광무대군의 부인들은 하나같이 친정의 세력이 크니, 친정에서 그 꼴을 가만히 두고 보겠습니까?”

    문득, 잔잔한 호수 같던 이선의 얼굴이 떠올랐다. 서슬 퍼런 광무대군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고, 그의 죄를 고변하던 모습이었다.

    그녀에게는 친정이 없었다. 어미가 명을 달리한 후, 채선이 혼자 몸으로 그 깊은 산골에서 살았던 것을 보면 일가친척이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어쩐다.”

    익제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탐탁잖은 혼잣말을 흘렸다. 사실 답은 나와 있었다.

    그러나 그의 심보가 그것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것뿐이었다. 그에게 이선은 눈엣가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결심한 듯 익제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는 못마땅한 표정을 하면서도 한 가령에게 출타 준비를 하라고 명했다.

    그녀를 데려와야 했다. 이선을 위해서는 아니었다. 자신을 위해서도 아니었다. 이유는 오직 하나, 채선이 그녀에게 마음을 쓰는 탓이었다. 

    제게 내색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가 채선의 마음을 모를 리 없었다. 

    요즘 들어, 딴생각에 빠지는 시간이 많은 것 또한 알고 있었다. 아마도 그중 대부분은 이선에 대한 생각일 터였다. 

    “그것도 마음에 안 든단 말이지. 고작해야 핏줄이 뭐라고.”

    뒤끝 긴 그는 그녀가 채선에게 낙태약이 든 선물을 배달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그녀가 광무대군을 배신했다고 해서 그의 분노가 상쇄되는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그는 이선이 그 선물의 정체를 몰랐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익제는 그리 호락호락한 성격이 아니었다. 언젠가는 그때의 빚을 갚아 주리라, 벼르고 있었다.

    “데려와서 얼굴을 보여 주고, 부인의 마음을 달랜 뒤에 외딴 절에 처박아 놓으면 되겠지. 비구니가 되어 평생 속세 구경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도 괜찮겠군.” 

    심술궂게 중얼거린 익제가 한쪽 입꼬리를 당기며 방을 나섰다. 한 가령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의 뒤를 따랐다.

    별안간 걸음을 멈춘 익제가 등을 돌렸다.

    “부인께 내 오늘 귀한 선물을 가져올 터이니, 식사를 남기지 말라고 전하라. 요 며칠 먹는 양이 줄어 마음이 쓰인다.”

    “……예.”

    선물이라. 

    한 가령이 점점 더 영문을 알 수 없는 얼굴을 했다. 

    ***

    익제는 눈앞의 사내를 물끄러미 보았다. 태자 역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눈으로 그를 마주보았다.

    생각에 잠겼던 익제가 희미하게 눈살을 찌푸리며 다시 물었다.

    “그러니까 그 여인은…… 안 된다고 하셨습니까?”

    “그리 말했네.”

    익제는 도로 입을 다물었고 태자도 침묵했다. 익제가 그를 향해 이해할 수 없는 시선을 던졌다.

    한 가령의 말처럼 죄인의 가족을 다른 귀족이 데려가는 건 꽤 흔한 일이었다. 

    그런데 태자가 그의 청을 거절했다. 다른 부인도 아니고, 있으나 마나 한 여섯 번째 부인인 이선을.

    “혹, 그 연유를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저보다 먼저 청을 넣은 자가 있습니까?”

    “아닐세.”

    “그럼……?”

    익제가 뒷말을 흐리며 신중한 시선을 던졌다. 태자가 천천히 눈을 들었다. 그가 익제를 똑바로 쳐다보며 대꾸했다.

    “그 여인은 내 궁으로 데려갈 것이네.”

    “…….”

    익제는 또다시 말을 잃었다. 그의 시선이 태자의 얼굴에 못 박혔다.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는 익제의 머릿속으로 몇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어째서 태자가 그녀를 신경 쓰는 것인가. 두 사람은 광무대군을 문책하던 날 처음 만났던 게 아니었나? 태자는 그녀가 흉인의 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그렇다면, 채선이 귀인이라는 것은?

    “그러는 자네는.”

    익제의 머릿속이 점점 복잡해지던 그때, 태자가 여유롭게 입술을 뗐다. 그는 눈동자만 돌려 익제를 응시했다. 

    무심함을 가장한 눈빛에서 예기와 같은 날카로운 기운이 느껴졌다.

    “어찌하여 그 여인을 탐내는가?”

    익제는 지금이 아주 중요한 순간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그는 애써 대수롭지 않은 표정을 꾸몄다.

    “태자 전하께서도 아시다시피, 그 여인은 제 부인에게 광무대군의 선물을 전달하였습니다.”

    “그래서 복수라도 할 참인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