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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별이 뜨는 밤 (110)화 (11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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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

증거를 만들어 내거나.

태자가 위압감 넘치는 목소리로 명령했다. 사내는 말없이 고개만 푹 숙였다. 그가 침묵하자, 병사가 창끝으로 사내의 허벅지를 쿡쿡 찔렀다.

“태자 전하께서 말하라고 하신다!”

“콜록.”

기침을 터뜨린 그가 잇새에서 흘러내린 피를 닦았다. 광무대군이 부리부리한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한마디만 하면 찢어 죽일 것 같은 사나운 시선이었다.

병사가 다시 창으로 그를 찔렀다. 사내가 마지못한 듯,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마른 논처럼 쩍쩍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의 목덜미에 난 흉터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

그 순간, 익제는 사내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광무대군의 호위다. 채선이 납치되어 정안궁으로 쳐들어간 밤, 광무대군의 등 뒤에 서 있던 심복이었다.

“제가 은원군의 하녀를 매수하여 독을 타도록 사주하였습니다. 그녀의 가슴에 활을 쏜 것도 접니다.”

그가 죄를 시인했다. 익제는 사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의 안광이 시퍼렇게 타올랐다. 

“계속 말하라.”

“그리고 군대부인을 납치한 것도, 부인을 향해 화살을 날린 것도 모두 접니다. 제가 한 짓입니다.”

저자가 채선을.

익제는 저도 모르게 한발을 내디뎠다. 

덥석. 

이번에는 인애대군이 그의 팔을 잡았다. 익제가 아주 느리게 고개를 돌렸다. 그의 서늘한 낯에 흠칫 놀란 인애대군이 퍼뜩 정신을 차리곤 고개를 저었다. 끼어들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의 말이 옳았다. 익제는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삭이려는 듯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관절이 하얗게 도드라졌다. 그제야 인애대군의 손이 떨어져 나갔다.

“그렇다면 네게 사주한 것은 누구인가.”

태자가 느릿하게 물었다. 사내는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병사가 다시 창끝으로 그를 찔렀지만, 사내는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움푹 들어간 창끝에서 스멀스멀 피가 배어 나왔다. 사내의 미간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는 끝내 침묵을 고수했다.

태자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심관.”

“!”

광무대군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태자가 그런 그를 보며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이자의 이름이다. 그리고 이자가 네 가신이라는 걸 증명해줄 사람 또한 여럿이다. 원한다면 국문장에 그들 모두를 부르겠다.”

그 말에 광무대군이 두 눈을 부릅떴다. 그의 얼굴이 분노와 수치, 모욕감으로 뒤덮였다.

“국문이라니요! 태자 전하, 저는 광무대군입니다! 황제 폐하의 여섯 번째 아들, 광무대군이란 말입니다. 그런 제가 국문장에 서서 죄인 취급을 받으란 말입니까! 하늘이 무너져도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대관절 누가 저를 심판한단 말입니까!”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공기를 뒤흔들었다. 그가 입가에 하얀 거품을 물며 연신 노성을 토해냈다.

태자가 대수롭지 않은 어투로 대꾸했다.

“그러고 싶지 않다면, 이 자리에서 자백하는 게 좋을 것이다. 피차간에 껄끄러운 일은 피하는 편이 좋지 않으냐.”

“형님!”

광무대군의 비명이 다시 울려 퍼졌다. 짧은 침묵이 흘렀다. 태자는 이 일을 덮어 줄 마음이 없었고, 광무대군은 자신의 죄를 인정할 마음이 없었다.

빠드득, 이를 갈던 광무대군이 서슬 퍼런 목소리로 읊조렸다.

“그렇다고 하지도 않은 일을 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가.”

태자가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여유로운 태도에 광무대군은 한층 더 불안한 얼굴을 했다. 

익제는 태자를 바라보았다. 일순, 알 수 없는 위화감이 들었다.

모든 일이 너무 빠르게 결론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도성의 군권을 장악한 태자라서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익제가 찾지 못한 증거를 찾을 수 있는 인력과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아니면 반대로.

“증거를 만들어 내거나.”

“응? 뭐라고 했나?”

익제의 나직한 혼잣말에 인애대군이 그에게 시선을 던졌다. 혼자만의 생각에 잠긴 익제는 그 말을 듣지 못하고 태자를 빤히 응시했다.

운 좋게도 태자는 증인과 증거를 손에 넣었다. 그리고 익제의 편에 서서 광무대군을 단죄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가슴속은 시원해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한층 더 답답해질 따름이었다.

“…….”

불현듯, 어쩌면 이 모든 게 태자의 흉계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효대군과 효성대군을 죽이고, 광무대군에게 그 죄를 덮어씌우는 것이.

그렇게 제 자리를 위협하는 형제들을 하나씩 처리해 나가는 것이.

그 순간, 눈앞에 서 있는 태자의 모습이 마치 커다란 벽처럼 느껴졌다. 

***

히이잉.

풍오가 채선의 어깨에 주둥이를 비볐다. 다른 사람에 비해 그녀를 편애하기는 하지만, 고귀한 흑마의 자존심은 하늘을 찔렀다. 그런 풍오가 평소답지 않게 어리광을 부렸다.

하하하, 채선의 잇새에서 싱그러운 웃음이 터졌다.

“그래, 그래. 고마워.”

채선이 풍오의 콧잔등을 손으로 문질렀다. 흑마의 눈매가 가늘어지며 기분 좋은 얼굴을 했다.

“군대부인께서 그렇게 오냐 오냐 하시니, 기껏해야 말 따위가 사람을 우습게 아는 게 아니겠습니까?”

곁에 선 화영이 뾰로통하게 중얼거렸다. 풍오가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리더니 입술을 까뒤집고 푸르르, 침을 튀겼다.

“꺄아아악!”

마른하늘에 날벼락도 아니고, 침 벼락을 뒤집어쓴 화영이 비명을 질렀다. 푸헬헬, 풍오가 얄미운 웃음을 터뜨렸다. 

“괜찮은가?”

채선이 송하에게 눈짓을 했고, 송하가 소매에서 깨끗한 천을 꺼내 화영에게 건네었다. 침 범벅이 된 얼굴을 박박 문질러 닦은 화영이 성난 눈으로 풍오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풍오는 어느새 풀밭에 고개를 박고 있었다. 우적우적, 풀을 뜯어 먹는 풍오의 얼굴이 유독 즐거워 보였다. 

송하가 “저 지랄 맞은 말 같으니라고.”라며 풍오의 험담을 지껄였지만, 저 역시 침 벼락을 맞을까 그리 큰 목소리는 아니었다.

타박타박, 옆으로 걸어온 풍오가 그 자리에 다리를 구부리고 앉았다. 그리고 머리로 채선의 몸을 꾹꾹 밀었다. 어서 타라는 뜻이었다. 

이제까지 가만히 보고 있던 송하가 이것만큼은 양보할 수 없다는 듯, 한 발 앞으로 나서며 풍오를 나무랐다.

“부인은 홑몸이 아니시라 말을 타실 수 없어.”

헹.

풍오는 송하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연신 주둥이로 채선의 몸을 꾹꾹 눌렀다. 그깟 아이가 중요하냐, 제가 중요하냐, 시샘 어린 질문을 던지듯이.

채선이 난감한 표정을 짓던 그때.

“저놈의 말대가리가 주제도 모르고 까부는데, 오늘 저녁 식사는 말고기가 어떻소? 암말 일곱 마리가 동시에 임신을 하는 바람에 개체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터이니, 한 마리쯤 고기로 삶아 먹는다고 해도 티가 나지 않을 것 같소만.”

풍오가 태연하게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저만치로 떨어졌다. 그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풀밭에 코를 박고 풀을 뜯기 시작했다. 

송하와 화영이 고소하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오직 채선만이 안절부절못하며 풍오의 눈치를 살폈다. 익제가 그녀의 귓가에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리 걱정할 것 없소. 나와 풍오는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아는 사이니, 저놈도 농담임을 알 것이오.”

헹.

풍오가 저 멀리서 코웃음을 쳤다. 익제의 눈동자가 서늘하게 빛났다. 풍오가 다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풀밭에 주둥이를 묻었다.

“그런데…….”

화영이 불쑥, 입을 열었다. 그녀는 다른 곳을 쳐다보며 짐짓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겉옷을 벗어 채선의 어깨에 둘러주던 익제가 힐긋, 시선을 던졌다. 채선은 수줍은 양 두 뺨을 물들이고 있었다.

눈꼴 시린 듯 입술을 삐죽이던 화영이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 한위대군이라는 분은 다시 안 오시나요?”

“한위대군?”

채선의 시선을 받은 화영이 눈 둘 곳을 찾아 고개를 돌렸다. 채선의 고개가 모로 기울었고, 화영의 목소리가 한층 더 불퉁해졌다.

“아니, 뭐, 궁금하다는 게 아니라…….”

말을 하면 할수록 구차하다는 느낌이 들었는지 화영이 짜증스러운 기색으로 입매를 찌푸렸다.

“흠.”

침음을 흘리던 익제가 이내 픽, 하고 가벼운 웃음을 흘렸다. 채선이 그에게 의아한 눈길을 던졌다. 아마 제가 모르는 둘만의 이야기가 있나 보다, 하며.

바람에 흐트러진 그녀의 머리를 쓸어 넘긴 익제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리 궁금하면 한 번 찾아가 보든가.”

“궁금하긴 누가 궁금하다고 그러십니까!”

화영이 발끈했다. 그러다 익제의 서늘한 눈빛에 얌전히 꼬리를 내렸다. 여기는 풍주가 아니었고, 익제는 언제든 그녀를 빈손으로 쫓아낼 수 있었다.

“아마 지금쯤 한위대군의 마음이 좋지 않으실 게다.”

“……왜요?”

화영이 전혀 궁금하지 않다는 듯 퉁명스럽게 물었다. 그러나 쫑긋, 선 귀가 그녀를 배신했다.

“문효대군과 효성대군이 잇따라 사망하고, 그 배후에 광무대군이 있다고 밝혀졌으니 형제들의 난을 지켜보는 그분의 심경이 어떻겠느냐.”

“아.”

“자고로, 상대의 마음이 약해졌을 때 파고드는 것이 사랑을 쟁취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사랑을 쟁취하기는 누가! 그런 희멀건 책방 주인 따위! 말도 안 됩니다!”

화영이 대번에 반박을 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익제는 그녀에게 일말의 관심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채선을 돌아보며 온화하게 미소 지었다.

“처소 밖으로 나가지 못해 답답하지는 않소?”

“괜찮습니다. 화영과 송하가 말벗이 되어 주어 전혀 심심하지 않아요.”

“후원 산책을 하는 건 어떻소? 오는 길에 보니, 단풍이 절정을 이루었더군. 아마 며칠 뒤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오.”

“좋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후원의 가을이 궁금하던 참입니다. 익제님과 함께라면 더없이 기쁜 산보가 될 것 같습니다.”

“갑시다.”

익제가 그녀와 손을 잡고 나란히 걸었다. 저만치에서 풀을 뜯던 풍오가 힐끔, 고개를 들더니 뻔뻔한 얼굴로 그 뒤를 따랐다. 송하와 도영 역시 그림자처럼 두 사람을 수행했다.

잠시 멈칫하던 화영은 그들과 반대편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아랫입술이 삐죽, 튀어 나왔다.

“누가 걱정돼서 그러나? 책방 주인이라고 사람을 감쪽같이 속인 게 화가 나서 따지러 가는 것이지.”

아무도 듣지 않을 변명이 그녀의 발치로 떨어졌다.

채선은 멀어지는 화영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도로 익제에게 시선을 주었다. 묻는 듯한 그녀의 눈빛에 익제가 걸음을 멈추었다.

어느새 아치 다리의 한가운데에 선 그가 수면 위로 눈길을 주었다.

“저길 보시오. 연못에도 단풍이 짙게 들었소.”

그 말에 채선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빠졌던 이백중의 집 연못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크고 넓은 연못이었다. 어쩌면 연못이 아니라 호수라고 불러야 할지도 몰랐다.

잔잔하게 고여 있는 연못물 위로 붉고 노란 단풍잎이 일렁거렸다. 바람이 불 때마다 수면 위의 단풍이 너울졌다.

채선은 그 속에 비친 익제의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방금까지 다정하게 웃고 있던 그는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채선은 이따금씩 파문이 이는 그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바람은 잠잠했다. 그러나 곧 더 큰바람이 불어올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이것이 끝이 아닌 것 같은 불안한 느낌. 

“광무대군은 어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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