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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별이 뜨는 밤 (109)화 (109/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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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9

    그럴 리가 없습니다!

    익제의 의문이 깊어지려는 찰나, 태자가 이선에게 눈길을 주었다. 그의 잇새로 묵직한 물음이 떨어졌다.

    “말해 보라. 그대가 군대부인에게 광무대군의 선물을 전달하였나?”

    광무대군은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 듯,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다 한 줌의 기대가 깃든 눈으로 이선을 응시했다.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든 그녀가 천천히 시선을 돌려 광무대군을 보았다. 마침내 그녀가 정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예, 태자 전하. 제가 광무대군의 심부름으로 군대부인께 선물을 전했습니다. 그 자리를 목격한 하인들도 여럿 됩니다.”

    그제야 그녀의 정체를 눈치챈 인애대군이 “과연.” 하고 의미심장한 혼잣말을 흘렸다. 

    “그래서, 그 선물이 무엇이었나?”

    광무대군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갔다. 그는 이선이 자신을 배신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의 편이었고, 그의 사람이었다.

    “군대부인께서 회임을 하셨기에 태아에 좋다는 약재를 선물로 전했습니다.”

    그러나 저도 모르게 긴장을 했던지, 광무대군은 그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 그렇지, 광무대군의 입술이 그렇게 달싹였다.

    동시에 익제의 눈매가 서늘한 빛을 띠었다. 그는 채선의 자매라는 그녀를 찌를 듯한 눈으로 쏘아보았다. 

    “그게 전부인가?”

    태자가 되물었다. 광무대군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그러게 제가 뭐라고…….” 하며 운을 떼는 찰나, 이선의 담담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결코 그 여인이 은원군의 아이를 낳아서는 안 된다. 행여 그 아이가 사내아이라면 더더욱. 이참에 싹을 잘라 버려야겠다. 은원군도, 그 아이도, 그리고 그 여인도.”

    “!”

    이선의 목소리는 그 말의 내용과 달리 한 점의 동요도 없이 평연했다. 그래서 그 충격이 한층 더 컸다.

    광무대군이 두 눈을 홉뜨며 숨을 삼켰다. 그리고 익제는 그녀의 꿍꿍이를 파헤칠 듯, 예리한 시선으로 이선을 응시했다.

    그녀가 싸늘한 침묵을 깨고 뒷말을 덧붙였다.

    “그리 말씀하시는 걸 들었습니다. 광무대군께서 신뢰하는, 달지라는 이름의 점술가와 나누는 대화였습니다. 그러면서 제게 선물 보따리를 챙겨 주셨습니다.”

    “거짓말입니다!”

    광무대군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무장이 태자의 곁으로 다가가 “점술가는 이미 도망치고 없었습니다.”라고 말했다.

    “네가! 네가 감히! 감히 나를!”

    광무대군이 악에 받친 얼굴로 치를 떨었다. 눈앞이 시뻘겋게 변했다. 말문이 막힌다는 게 이런 건가 싶었다. 그는 번들거리는 눈으로 이선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평온하게까지 느껴지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볼 따름이었다.

    “네가 너를 어찌 대했는데! 내가, 내가 네게 무엇을 주었는데! 그런데 네가 감히 나를 배신해!”

    광무대군의 볼살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움찔거리는 몸은 마치 팽팽하게 당겨진 화살처럼 당장이라도 그녀를 향해 튀어 나갈 것 같았다.

    익제는 관조자 같은 눈으로 무심하게 이선을 바라보았다. 

    광무대군을 배신했다? 왜? 가라앉는 배에서 탈출하는 것인가, 아니면 자매의 운명을 쥐고 흔든 자에 대한 복수인가.

    그의 눈매가 슥, 하고 가늘어졌다. 그녀가 채선과 쌍둥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마다 새삼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만약 이곳에 채선이 있었다면, 그녀는 쭈뼛거리며 주변의 눈치부터 살폈을 것이다. 제 한마디가 어떤 파장을 불러일으킬까, 걱정이 많은 얼굴로.

    그리고 익제는 그런 그녀가 좋았다.

    채선이 흉인의 별이든, 귀인의 별이든, 그에게는 어떤 의미도 없었다. 심채선이라는 사실만이 필생의 의미를 가졌다.

    “내, 너를 어찌 거두었는데! 결국 내 뒤통수를 치는구나! 내가 너를 거두는 게 아니었는데, 과연 흉인의……, 오호라.”

    거기서 말을 멈춘 광무대군이 이제야 어찌 돌아가는 영문인지 알겠다는 듯, 광기 어린 눈으로 그녀와 태자를 번갈아 보았다.

    “으하하하하! 설마 저 여인 때문입니까! 제 부인 때문에 저를 이리 짓밟으시는 겁니까! 저 여인이 갖고 싶어 그런 것입니까!”

    그의 웃음소리가 마른하늘을 뒤흔들었다. 인애대군이 저도 모르게 팔을 문질렀다. 오싹한 한기가 들었던 탓이다.

    광무대군의 입매가 비틀렸다.

    “저 여인이 어떤 이인 줄 아십니까! 저 여인은……!”

    사납게 소리치던 광무대군이 문득, 입을 다물었다. 그가 벌겋게 달아오른 눈동자로 이선을 노려보았다. 그녀가 담담한 표정으로 그를 마주보았다.

    히죽, 광무대군이 한쪽 입꼬리를 당겼다. 무슨 생각을 한 것인지,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익제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광무대군은 이선이 흉인의 별이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그 꿍꿍이가 무엇이든, 귀인의 별과 흉인의 별에 대해서는 함구할 모양이었다.

    그에게는 잘된 일이었다. 채선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많을수록 그녀가 안전하다는 뜻이었으니.

    “들라 하라.”

    태자가 다시 무장을 돌아보며 엄중한 명을 내렸다.

    광무대군을 지그시 쳐다보던 이선이 등을 돌렸고, 그녀와 교대라도 하듯 장수가 무언가를 들고 왔다.

    쪽문 너머로 사라지는 이선의 모습에서 눈을 뗀 익제가 그제야 태자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태자는 장수의 손에 들린 화살 한 대를 집었다. 그리고 광무대군이 잘 볼 수 있도록 높이 치켜들었다.

    햇빛을 받은 화살은, 그러나 반짝이지 않았다. 촉까지 검게 옻칠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무엇인 줄 아느냐.”

    “그것이…… 무엇입니까?”

    광무대군이 떨리는 목소리를 진정시키려 애쓰며 그리 물었다. 그는 뭉툭한 당혹감을 날카로운 분노에 감추었다. 

    태자가 그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천천히 말을 이었다.

    “네가 주최한 사냥제 날, 문효대군의 가슴을 꿰뚫었던 화살이다.”

    “!”

    광무대군이 처음 듣는 말인 양 두 눈을 부릅떴다. 그가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습니다!”

    익제는 광무대군의 표정을 예리하게 관찰했다. 인애대군이 두 눈을 크게 뜨며 화살을 노려보았다.

    “저것은…….”

    태자가 무장의 손에서 또 다른 화살 하나를 집어 들었다.

    “이것이 무엇인 줄 아느냐?”

    방금 전 화살과 똑같이 생긴 화살이었다. 촉까지 검게 옻칠이 된 화살. 광무대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싸늘한 공기가 목 뒤를 훑고 지나갔다.

    “군대부인을 발견한 날, 은원군의 등에 박혔던 화살이다. 어떠냐, 네 눈에 보기에도 두 화살이 같아 보이지 않느냐?”

    “말도 안 됩니다! 그 화살이 어찌……!”

    “그날 은원군에게 활을 쏜 괴한을 붙잡아다 문책을 했다. 그런데 이 화살이 쓰인 날이 또 있더구나.”

    광무대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빠르게 눈알을 굴렸다. 입안이 바싹 말랐다.

    저도 모르게 혀로 입술을 핥은 그가 초조하게 주먹을 쥐었다 폈다 했다. 그의 눈 밑이 움찔움찔 떨렸다.

    태자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가 건조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렇지 않은가?”

    그의 시선은 익제에게 꽂혀 있었다.

    광무대군이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그제야 문 앞에 서 있는 세 사람을 발견한 듯 잇새로 낮은 신음을 흘렸다. 

    익제가 두 사람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걸어온 그가 광무대군의 대여섯 걸음 옆에 섰다.

    “예, 태자 전하.”

    익제는 태자에게 예를 표한 후 묵직한 음성을 떨구었다. 그는 태자가 무슨 답을 듣고 싶어 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여름이 되기 직전, 제 부인이 하녀가 가져온 독차를 마시고 사경을 헤맸던 적이 있습니다.”

    독에 내성이 있는 채선은 사경을 헤매지 않았지만, 익제는 일부러 당시의 상황을 부풀렸다. 광무대군이 큭, 하고 나직한 숨을 삼켰다.

    “그 하녀를 잡아 누가 시킨 짓이냐, 배후를 문책하려고 하였는데.”

    잠깐 말을 멈춘 익제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광무대군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익제의 시선을 피하려 전방만 응시하고 있었다. 광무대군의 뺨이 실룩거렸다.

    “괴한이 쏜 화살에 맞은 하녀는 배후를 입 밖으로 내지 못한 채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그녀의 심장에 꽂혀 있던 화살이 검게 옻칠이 된 것으로, 태자 전하께서 지금 들고 계시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래. 이번에도 군대부인이란 말이지.”

    태자가 의미심장하게 중얼거렸다. 익제가 느릿하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행여 그가 채선에게 관심이라도 가질까, 우려스럽다는 듯이.

    “원래는 제가 마실 차였습니다. 같은 자리에 있던 부인이 우연히 제 찻잔에 든 차를 마시고, 그 같은 끔찍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흠.”

    상황이 광무대군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그가 무슨 말을 하려고 입을 여는 순간, 인애대군이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왔다. 그의 포 자락이 바람에 휘날렸다.

    “태자 전하!”

    노여움 가득한 인애대군의 부름에 태자와 광무대군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일전에 제가 석중교에서 자객의 공격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다행히 화살은 제가 아니라, 말 목을 꿰뚫었지요. 그때, 제 애마에 꽂힌 화살이 꼭 그리 생겼습니다. 그러니 넷 모두 같은 자의 소행이 아니겠습니까.”

    “!”

    그 말에 광무대군이 두 눈을 부릅떴다. 그는 제게 꽂히는 시선을 느끼곤 “아닙니다!” 하며 고개를 저었다.

    마치 늪 위에 서 있는 것처럼 발밑이 서서히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도망치려 하면 할수록 진창은 더욱 세게 그를 잡아당겼다.

    익제가 광무대군을 바라보며 나직하게 물었다.

    “광무대군께서는 하녀를 시켜 나를 독살하려 한 일이 없소?”

    익제의 담담한 물음에 광무대군은 또다시 나직한 신음을 삼켰다. 그가 형형한 눈으로 익제를 쏘아보며 입매를 일그러뜨렸다.

    “광무대군께서는 그날 밤, 내 부인을 향해 활을 당기라 명한 적이 정말로 없소?”

    “윽.”

    석중교에서의 사건은 그의 소행이 아니었다. 왜 아니겠는가. 그것은 익제가 꾸민 짓이었다.

    그러나 하녀를 시켜 차에 독을 타도록 지시한 것은 광무대군의 소행이 분명했다. 채선이 발견된 순간, 그녀의 등에 화살을 당기라 명한 것도 광무대군이 확실했다. 

    광무대군이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다만 이해할 수 없는 건 태자가 문효대군의 이야기를 꺼냈을 때, 경악한 듯이 놀라던 그의 얼굴이다.

    익제는 말없이 광무대군을 응시했다. 

    그게 만약 연기가 아니라면?

    그의 시선이 조용히 이동했다. 인애대군은 치밀어 오르는 희열을 삼키려 애쓰고 있었다. 

    그렇다면 문효대군을 죽인 것은 인애대군의 짓인가?

    답은 알 수 없었다.

    “들라 하라.”

    태자가 묵직한 음성으로 명령했다. 

    흠칫, 광무대군의 어깨가 떨렸다. 이번에는 또 무엇인가. 그가 긴장한 눈으로 쪽문을 바라보는 순간, 한 사내가 병사들 손에 끌려왔다.

    이미 문책을 험하게 당했는지 사내의 몰골이 엉망이었다. 본래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를 보는 광무대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광무대군이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벌어진 잇새에서는 어떤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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