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 개의 별이 뜨는 밤 (108)화 (108/131)
  • 16645625082597.jpg

    108

    그래, 귀인이 되고 싶구나.

    익제의 물음에 인애대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가 상체를 뒤로 물리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거기까진 알아내지 못했네. 워낙 극비리에 진행된 일이라서 말이지. 허나, 곧 알 수 있을 걸세.”

    거기서 잠깐 말을 끊은 인애대군이 희미한 열기가 깃든 눈으로 익제를 바라보았다.

    “자네 앞에서 이런 말을 하는 건 애석하지만, 군대부인을 납치한 죄보다 황족을 살해한 죄가 더 크네. 만약 그가 두 대군의 죽음에 관련되어 있다는 증거만 나온다면, 아무리 광무대군이라도 법망을 피해갈 수 없을 걸세.”

    인애대군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는 얼굴을 했다.

    익제가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치밀어 오르는 조소를 삼켰다.

    채선의 납치보다 황족의 죽음이 더 큰 죄다?

    익제에게는 그깟 황자들의 목숨보다 채선의 안위가 더 중요했다. 그들이 죽어 나자빠지든 말든, 그는 그녀의 손가락에 난 거스러미에 더 마음이 쓰였다.

    그에게는 채선이 황제였고, 황족이었다.

    “예.”

    하지만 익제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호랑이는 토끼 한 마리를 사냥할 때도 가장 결정적인 순간을 기다리는 법이다.

    아직은 몸을 낮추어야 할 때였다. 기회가 왔을 때 전력으로 내달리려면 힘을 비축해 둘 필요가 있었다.

    익제가 천천히 고개를 떨구었다. 속내를 감추는 그의 눈동자가 어둡게 침잠했다.

    좀이 쑤신 얼굴로 엉덩이를 들썩이던 인애대군이 결국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두 사람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럴 게 아니라, 당장 정안궁으로 가보세. 거기 가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 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한위대군이 내키지 않는 듯 미적거렸다. 

    “태자 전하께서 하시는 일인데, 저희가 끼어들면…….”

    “에잉, 쯧.”

    못마땅하게 혀를 찬 인애대군이 “대범하지 못하기는.” 하고 불평을 터뜨렸다. 그가 옷자락을 떨치며 걸음을 옮겼다.

    “가기 싫거든 말게. 나 혼자서라도 갈 테니.”

    ***

    쨍그랑.

    “!”

    탁자 위의 경대를 떨어뜨린 채선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옆으로 밀어놓는다는 것이 그만 힘을 너무 주었나 보다. 거울이 깨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아이고, 이를 어째!”

    송하가 깜짝 놀란 얼굴로 달려왔다. 사고를 친 채선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두 눈을 크게 뜨고 채선의 위아래를 살피던 송하가 잠시 후,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친 곳은 없으십니까?”

    “다치진 않았는데 거울이…….”

    “다친 곳이 없으신 게 중요하지 이깟 거울이 뭐 그리 대숩니까. 주인님께 말씀드리면 경대 정도야 한 수레를 사 주실 겁니다.”

    “한 수레까지는 필요 없는데. 얼굴이 하나니 거울도 하나만 있으면 돼.”

    그렇게 말하며 채선이 허리를 굽혔다. 그녀가 산산조각이 난 유리를 주우려 손을 뻗었다. “욕심이 그리 없으셔서…….”라고 대꾸하던 송하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고함을 질렀다.

    “안 됩니다! 움직이지 마세요!”

    “!”

    흠칫.

    채선이 저도 모르게 그 자세 그대로 멈추었다. 송하가 눈을 흘기며 얼른 거울 조각을 줍기 시작했다.

    “그러다 손이라도 베면 어쩌시려구요.”

    “내가 그 정도로 조심성이 없진 않…….”

    다, 는 말은 송하의 뾰족한 눈초리에 목구멍 안으로 기어들어 갔다. 하긴, 거울을 깨 놓고 할 말은 아닌 것 같았다.

    채선이 풀 죽은 얼굴로 다시 고개를 떨구는데, 송하가 대수롭지 않게 덧붙였다.

    “부인께서 손을 다치시면 제가 주인님께 꾸중을 듣습니다. 저는 주인님 눈 밖에 나고 싶지 않습니다.”

    “아무리 익제님이라도 내 실수로 다친 것인데, 어찌 네게 잘못을 묻겠느냐.”

    “몰라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부인께서 거울에 손을 베기라도 했다간 그 고사리 같은 손에 상처를 냈다며 경을 칠 것입니다.”

    “……나를 놀리는 것이로구나.”

    채선이 한층 더 풀 죽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힐긋, 눈동자만 들어 송하를 흘겨보는 기색이 꽤 원망스럽다.

    송하는 비어져 나오는 웃음을 삼킨 채 짐짓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부인을 놀리다니요? 그런 말씀 마세요! 주인님께서 들으실까, 두렵습니다.”

    “나를 놀리는 것이야.”

    채선의 목소리가 삐죽거렸다. 그제야 송하는 웃음을 터뜨리며 마지막 거울 조각을 주웠다. 그리고 걸레로 바닥을 꼼꼼히 훔쳤다.

    “하지만 주인님 눈 밖에 나고 싶지 않다는 건 진심입니다. 제가 부인을 잘 모신다며, 주인님께서 어찌나 자주 상을 내리시는지. 어휴, 이러다 저희 집이 동네 제일가는 부자가 될까 봐 무서울 지경입니다.”

    “그러니?”

    처음 듣는 말이라는 듯 채선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송하가 여태 그것도 모르셨냐는 듯 크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예. 그러니 부인께서는 제게 넝쿨째 굴러 들어온 호박…… 아차, 말이 너무 과하였지요? 음, 아! 그렇지! 호박이 아니라 귀인입니다, 귀인! 그러고 보니, 저희 엄니께서 올해 초에 저자에 들렀다가 제 신년 운세를 봤는데, 남쪽에서 귀인이 나타날 거라 하였답니다. 어디 보자, 부인이 계셨다는 섬이 도성의 남쪽에 있습니까?”

    “귀인이라.”

    채선은 시선을 떨어뜨리며 생각에 잠겼다. 아마 자신은 송하의 귀인이 아닐 것이다. 아니, 그녀는 누구의 귀인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 귀인이 되고 싶구나. 내 너의 귀인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마.”

    “이미 귀인이시래도 그러셔요.”

    송하가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며 마저 걸레질을 했다. 채선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저도 귀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곁에 있는 이들을 행복하게 만들려 노력하다 보면 다른 이들은 아니라도 그들에게만큼은 귀인이 될 수 있을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노력해 보고 싶었다. 흉인이라는 말에 더 이상 주눅 들지 않고, 귀인이 되어 보고 싶었다.

    “?”

    일순, 그녀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기분 탓인지, 커다랗게 박동하는 또 하나의 심장이 느껴진 탓이었다. 

    채선은 저도 모르게 배 위로 손을 가져가며 희미한 웃음을 흘렸다. 그것이 마치 저도 행복하게 해 달라는 요구처럼 들려 그녀는 약속이라도 하듯 “그래, 그러마.” 하고 중얼거렸다.

    다행히 최선을 다하는 것은 그녀의 특기였다.

    ***

    세 사람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정안궁에 도착했다. 인애대군은 당장이라도 대문 안으로 뛰어 들어가고 싶은 기색이었으나, 남들 눈을 의식하며 침착하게 한위대군을 기다렸다.

    정안궁 주변에는 사람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거짓말 조금 보태어 사방 백 리 안에는 인적이 뚝 끊긴 듯했다.

    창을 든 병사들이 대문 앞을 지켰고, 검을 든 병사들이 담장을 에워싸며 삼엄한 경계를 펼쳤다.

    문 앞에 선 병사가 불청객을 향해 딱딱한 시선을 던졌다. 인애대군의 호위가 먼저 그들에게로 걸어가 세 사람의 정체를 밝혔다.

    “인애대군과 한위대군, 그리고 은원군이시네.”

    “!”

    쟁쟁한 인물들의 등장에 병사들이 굳은 얼굴로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그들은 행여 책이라도 잡힐세라 바짝 기합을 넣었다.

    인애대군의 참을성은 길지 않았다. 그는 미적거리는 한위대군을 기다리지 못하고, 결국 저 혼자 정안궁의 문턱을 넘었다. 익제는 느릿느릿, 그의 뒤를 따랐다. 

    한위대군이 갈등에 휩싸인 표정으로 비척비척 걸어왔다. 그는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고 싶지 않은 듯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대로 돌아가 따스한 침상에 몸을 묻고 싶었다. 서책만 있다면, 세상사와 상관없이 두문불출할 수 있는 이가 그였다.

    그러나 세상이 그런 그를 가만히 놓아두지 않았다. 결국 한위대군은 무거운 다리를 질질 끌며 정안궁의 문턱을 넘었다.

    끝을 가늠할 수 없는 화려한 저택은 마치 초상집 같았다. 

    수많은 사람이 있을 텐데도 인기척 하나 느껴지지 않았고, 그 흔한 말소리나 웃음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안개가 낀 듯 눅진한 공기가 집 안을 뒤덮었다.

    가장 앞서 걷던 인애대군이 불현듯, 걸음을 멈추었다. 익제가 덩달아 그 자리에 멈춰 서며 고개를 들었다.

    반쯤 열린 문 너머로 넓은 뜰이 펼쳐져 있었고, 병사들이 그 주변을 동그랗게 둘러쌌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태자와 광무대군이 서 있었다. 

    태자는 섬돌 위에서 뜰아래에 있는 광무대군을 내려다보는 중이었고, 광무대군의 성난 기색으로 그를 올려다보는 중이었다.

    살얼음 위를 걷는 것처럼 아슬아슬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것 같은 적막이 이어지던 그때.

    “태자 전하!”

    별안간 광무대군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몹시 분개하고 억울한 얼굴로 태자를 올려다보았다. 주먹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세 사람은 그 자리에 멈춘 채로 태자와 광무대군을 지켜보았다. 섣불리 끼어들 수 없는 팽팽한 분위기가 느껴진 탓이었다.

    열변을 토하는 광무대군의 잇새에서 침이 튀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입니까! 제가 군대부인을 납치한 게 아니라고 몇 번이나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아니, 설령 제가 군대부인을 납치했다고 한들, 이 수많은 병사는 무엇이란 말입니까! 아무리 태자 전하라 하여도 저를 이리 대하실 수는 없습니다! 폐하께서는 이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힐긋, 문 앞에 선 세 사람을 일별한 태자가 다시 광무대군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가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내가 오늘 이곳에 있는 이유는 군대부인 때문이 아니다.”

    그 말에 광무대군이 깊이 침묵했다. 짚이는 바가 많은 그는 마른침을 꿀꺽 삼킨 뒤에야 태자의 의중을 물었다.

    “그렇다면 무슨 연유입니까?”

    “허나.”

    잠깐 말을 끊은 태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군대부인의 일도 그냥 넘어갈 순 없긴 하지.”

    반쯤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태자가 찌를 듯한 시선으로 광무대군을 응시했다. 태자의 속내를 읽지 못한 광무대군이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그날, 은원군이 그리 말했다. 네가 군대부인에게 태아가 사산되는 약을 선물로 주었다고 말이다. 그것이 사실이더냐?”

    “태자 전하께서는 그 말을 믿으십니까? 이 아우보다 한 다리 건너 사촌의 말을 더 믿으시냔 말입니다!”

    “사실이 아니다?”

    “억울합니다! 제 선의를 그런 식으로 곡해하다니요. 분명 은원군이 저를 모함하는 것입니다. 최근 그가 인애대군 형님과 어울리더니, 둘이서 짜고 제게 누명을 덮어씌우는 것입니다. 그 속셈이야 뻔하지 않습니까!”

    그 말을 듣던 인애대군이 “저런.” 하며 못마땅한 목소리를 흘렸다. 당장이라도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 것 같은 그의 팔을 익제가 붙잡았다.

    태자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옆에 서 있던 무장이 누군가에게 눈짓을 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광무대군은 입을 다물고 그의 눈치를 살폈다.

    오래지 않아, 병사가 한 여인을 데리고 왔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눈매를 좁히며 그녀를 응시하던 광무대군이 마침내 그 얼굴을 알아보고는 두 눈을 부릅떴다.

    “그대가 왜!” 

    “저 여인이 누군가. 낯이 익은 것 같기는 한데.”

    인애대군이 익제에게 귓속말을 했다. 그러나 익제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가늘게 뜬 눈으로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을 따름이다.

    심이선.

    그 여인의 이름을 입속으로 중얼거리며.

    저 여인이 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