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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별이 뜨는 밤 (107)화 (107/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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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7

    결정적인
    증거라 하시면……?

    말없이 허공을 응시하던 익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황이 그의 예측 범위를 벗어나고 있었다.

    “인애대군을 만나 봐야겠다.”

    “예, 출타 준비를 하겠습니다.”

    상황을 주시하던 원진이 “제가 모시겠습니다.”라며 앞장을 섰다. 이제 막 도성에 도착했지만, 여독 따위는 느껴지지 않는 말투였다.

    “주인님.”

    그때, 문밖의 하인이 또다시 익제를 불렀다. 겉옷을 걸치던 그가 등을 돌리며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이냐.” 하고 물었다.

    “한위대군께서 오셨습니다.”

    “한위대군께서?”

    익제는 옷을 입다 말고 눈살을 찌푸렸다. 의외의 인물이었던 탓이다. 오늘따라 예상하지 못한 일들이 잇따라 벌어졌다.

    그 사이, 방문이 열리며 창백한 안색의 한위대군이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우유부단한 그의 성정을 나타내듯 걸음걸이마저 비척비척, 위태로웠다. 

    익제가 금세 웃는 얼굴로 그에게 자리를 권했다.

    “한위대군께서 여기까지는 어쩐 일이오?” 

    나이는 그가 한위대군보다 많았지만, 한위대군은 황제의 아들이었다. 예의를 갖춘 그의 언행에 한위대군 또한 정중한 태도로 대꾸했다.

    “예, 형님. 다름이 아니라…… 군대부인께서 기운을 차리셨는지 안부를 물으러 왔습니다. 애꿎은 분께서 참혹한 일에 휘말리지 않으셨습니까. 게다가 홑몸도 아니라 하시니 마음이 좋지 않아 통 잠을 이룰 수가 있어야지요. 그래서 성가신 행동이라는 걸 알면서도, 제 마음 편하자고 이리 찾아오고 말았습니다.”

    익제가 한위대군을 빤히 바라보았다. 침통한 빛이 내려앉은 그의 얼굴에서 거짓이나 위선은 찾아볼 수 없었다. 눈 밑이 퀭한 걸 보니, 그의 말처럼 꿈자리가 사나웠던 모양이다.

    “덕분에 많이 회복하였소. 그보다.”

    거기서 잠깐 말을 끊은 익제가 희미하게 눈살을 찌푸리며 한위대군을 응시했다. 그가 무슨 일이냐는 듯, 두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초식동물 같은 눈동자가 익제를 마주보았다.

    “지금 영락궁으로 가야 할 것 같소.”

    “인애대군 형님께요? 무슨 일이 있습니까?”

    한위대군의 표정이 한층 더 영문 모를 빛을 띠었다. 아마도 소식을 듣지 못한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익제가 빠르게 뒷말을 덧붙였다.

    “태자 전하께서 정안궁으로 군사를 보냈다고 하오.”

    “태자 전하께서 광무대군 형님께요?”

    그렇지 않아도 핏기가 없는 얼굴이 한층 더 새파랗게 질렸다. 두 눈을 꾹 감았다 뜬 한위대군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감당할 수 없는 일에 그의 몸이 휘청거렸다. 원진이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가 머쓱하게 거두었다.

    애초에 한위대군은 황제의 자리에 욕심이 없었다. 황제가 되기에 그는 지나치게 겁이 많았고, 우유부단했다. 옥좌를 감당할 수 있는 그릇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7황자였다. 7황자라는 자리는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언제든 폭풍에 휘말릴 수 있는 위치였다.

    어떻게든 그 폭풍만큼은 피하고 싶었는데. 

    한위대군이 체념 어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 가시지요.”

    두 사람은 나란히 익제의 처소를 나섰다. 대문으로 향하는 동안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각자의 생각에 잠긴 채 묵묵히 걸음을 옮겼을 따름이다. 

    한위대군의 얼굴에 수심이 내려앉은 그때.

    “어?”

    그가 문득 걸음을 멈추더니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덩달아 그 자리에 멈춰 선 익제가 그를 따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한위대군의 시선 끝에는 화영이 있었다. 채선의 처소 쪽에서 걸어 나오는 걸 보니, 방금까지 그녀와 시간을 보내다 오는 모양이었다.

    익제를 발견한 그녀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다가와 다소곳하게 인사를 올렸다. 평소보다 얌전을 떠는 건 제 옆에 손님이 있는 탓이다.

    의뭉스러운 너구리 같으니라고, 익제가 그녀의 속내를 꿰뚫어 보며 형체 없는 비웃음을 흘렸다.

    “출타하시는가 봅…… 어라, 당신은!”

    그 순간.

    세상에서 가장 교양 넘치는 여인을 연기하던 화영이 불현듯, 두 눈을 크게 뜨며 한위대군을 향해 삿대질을 했다.

    그녀는 희멀건 사내가 어째서 익제와 함께 있는지 모르겠다는 듯, 어리둥절한 얼굴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쯧, 낮게 혀를 찬 익제가 그녀를 나무랐다.

    “손님께 그 무슨 무례한 행동이냐. 나를 부끄럽게 할 셈이구나.”

    “……죄송합니다.”

    그제야 화영이 난처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의 본성을 알게 된 이후, 그녀는 익제의 말에 단 한 번도 토를 달지 않았다.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녀를 맨몸으로 내쫓을 수 있는 냉혈한이었기 때문이다. 

    어디 그뿐인가. 그래 놓고 채선에게는 화영이 제 발로 돌아갔다며 달콤한 거짓을 속삭일 것이다. 걱정스러운 한숨을 쉬던 채선은 비로소 안도한 얼굴로 그의 품에 안길 테고.

    내가 그 꼴은 못 보지.

    “아니요, 괜찮습니다. 무례라니요.”

    화영이 고개를 숙인 채 입술을 삐죽이는데, 한위대군이 당혹스러운 얼굴로 익제를 만류했다. 

    슬그머니 눈동자를 굴린 화영이 다시금 한위대군을 힐끔거렸다. 그녀는 여전히 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의문을 가득 품은 눈동자가 한위대군을 천천히 훑어 내렸다. 그러다 더 이상 못 참겠는지 익제를 향해 조심스러운 물음을 던졌다.

    “그런데 은원군께서는 책방 주인과는 어떻게 아는 사이십니까?”

    “책방 주인?”

    조용히 그 말을 되뇌던 익제가 한위대군과 화영에게 차례로 시선을 주었다. 그의 눈동자가 느릿하게 움직였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아니고, 책방 주인이라니……. 아.

    문득,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최근 들어 화영이 책방에 자주 들락거린다던 채선의 말이었다.

    오호라, 그렇게 된 것이었군.

    익제는 화영의 그 한마디로 전후 사정을 완벽하게 파악했다. 그는 웃음이 비어져 나오려는 것을 참으며 짐짓 눈살을 찌푸렸다. 그의 잇새로 엄한 목소리가 떨어졌다.

    “책방 주인이라니. 이분은 한위대군이시다.”

    “!”

    일순, 화영이 눈이 주먹만 해졌다. 그녀가 입을 쩍 벌리고는 또다시 삿대질을 했다. 그러다 익제의 눈치를 살피며 슬그머니 손가락 끝을 구부렸다.

    “으, 아, 어.” 

    대신 반쯤 벌어진 입술 사이로 의미를 알 수 없는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한위대군이라니, 황제 폐하의 일곱 번째 아들? 누가? 저 희멀건 책방 주인이?

    보란 듯이 한숨을 내쉰 익제가 한위대군을 돌아보며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는 마치 철부지 여동생의 허물을 덮어 주는 자애로운 오라비 같았다.

    “송구하오. 내 사촌 여동생인데, 풍주에서 올라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세상 물정을 모른다오. 외숙께서 고명딸이라고 큰소리 한번 치지 않고 키운 탓에 곧 시집을 가야 할 나이에도 저리 천방지축이지 뭐요. 어느 사내가 데려갈는지, 쯧쯧. 한위대군께서 하해와 같은 아량으로 이해해 주시오.”

    “저는 정말로 괜찮습니다.”

    한위대군이 얼른 두 손을 내저었다. 면전에서 험담을 들은 화영이 두 눈을 세모꼴로 뜨다 익제와 눈이 마주칠세라 얼른 고개를 숙였다. 

    차라리 어린 시절부터 동고동락했던 사촌 오라비면 욕을 들어도 덜 억울하겠다. 저에 대해 쥐뿔도 모르면서 저리 친 오라버니 행세를 하니, 속에서 열불이 터졌다.

    그러고 나자, 새삼 채선이 불쌍했다. 꼬리 아홉 달린 익제의 정체도 모르고, 그의 얼굴만 보면 수줍게 미소 짓는 그녀의 신세가 말이다.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나라라도 팔아먹었나. 내가 더 신경을 써줘야겠어.

    “이해해주어서 고맙소.”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익제가 다급한 얼굴로 한위대군을 재촉했다.

    “이럴 때가 아니오. 서두릅시다.”

    “예.”

    그와 동시에 한위대군의 표정이 일변했다. 방금까지 희멀겋던 낯이 순식간에 새카매졌다. 

    화영은 왠지 심상치 않은 기색에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한위대군 역시 그녀를 향해 입술을 달싹이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적절한 때가 아니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녀를 일별한 한위대군이 살짝 고개를 숙이곤 걸음을 서둘렀다. 두 사람은 빠르게 화영의 시야에서 멀어졌다.

    ***

    “그렇지 않아도 자네들을 부르려 사람을 보낸 참이었네.”

    인애대군이 버선발로 달려 나와 익제와 한위대군을 맞이했다. 

    두 사람이 자리에 앉는 그 짧은 시간에도 그의 표정은 시시각각으로 변했다. 마치 변덕스러운 여름 하늘처럼 그의 기분을 종잡을 수가 없었다.

    “아무도 들이지 마라.”

    인애대군이 방 안의 하인에게 명령했다. 하인들이 문을 닫고 나가자, 휑한 방안에는 묵직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창을 두드리는 바람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익제는 결코 조급한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는 제 앞에 놓인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

    “태자 전하께서 정안궁에 군사를 보내셨다는데, 어찌 된 일입니까?”

    “그게 말이지.”

    인애대군은 쉬이 대답하지 않고 한참 뜸을 들였다. 별안간 입을 꾹 다문 그의 입꼬리가 실룩거렸다. 침통한 표정을 가장하였으나 실패하였다.

    “큼.”

    뒤늦게 헛기침을 한 인애대군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가 상체를 기울이며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태자 전하께서 결정적인 증거를 찾으신 것 같네.”

    “결정적인 증거라 하시면……?”

    생각에 잠긴 익제를 대신해 한위대군이 되물었다. 인애대군의 눈이 이채로 번득였다. 그가 한층 더 목소리를 낮추었다.

    “문효대군과 효성대군의 사망에 광무대군이 연관되어 있다는 증거 말일세.”

    “예?”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었다는 듯, 한위대군이 두 눈을 부릅떴다. 그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는 겁을 먹은 것 같기도 했고, 불안해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 말은…… 설마, 광무대군 형님께서?”

    한위대군이 차마 끝까지 말을 잇지 못하고 뒷말을 흐렸다. 인애대군이 무슨 그런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 질책 어린 시선을 던졌다.

    “광무대군이 주최한 사냥제에서 문효대군이 정체를 알 수 없는 화살에 맞아 사망하였고, 효성대군은 광무대군이 다녀간 이튿날 급체로 사망하였다. 너는 이 모든 게 우연이라 생각하느냐?”

    질문을 받은 한위대군이 무기력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는 대답 대신 침묵으로 일관했다. 

    인애대군이 한 말을 곰곰이 생각하던 익제가 눈살을 찌푸렸다. 뭔가 석연치 않았다. 

    무엇이 석연치 않냐고 물어보면, 딱히 대답할 말은 없었지만 묘하게 찜찜했다. 신발 안에 작은 돌멩이 하나가 들어 있는 것 같은 거슬림이었다

    문효대군의 사망에는 광무대군이 연관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사냥제를 핑계로 정적을 제거하는 건 꽤 고전적인 방법이었고, 익제 역시 인애대군이 주최한 사냥제에게 광무대군의 공격을 받은 적이 있으니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효성대군까지 연이어 사망하자, 미심쩍은 생각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그 교활하고 간특한 자가 이렇게 대놓고 일을 저지른다고? 자신에게 화살이 돌아올 걸 뻔히 알면서?

    익제가 천천히 눈동자를 움직였다. 그는 가늠하는 듯한 시선으로 인애대군을 응시했다.

    만약, 이 모든 게 인애대군의 간계라면?

    하지만 확신은 없었다. 인애대군의 계략이라고 하기에도 의심스러운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일을 명확하게 결론 내길 좋아하는 익제로서는 지금의 이 애매한 상황이 영 못마땅했다.

    “그래서, 그 결정적인 증거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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