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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별이 뜨는 밤 (106)화 (106/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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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태자가 아닌가?

“운이 좋아 광무대군이 잘못 된다 하여도 그녀 하나 빼내는 것은 일도 아니니, 너무 걱정 마시오. 내 어찌 부인의 근심을 알고도 모른 체할 수 있겠소.”

“익제님…….”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듯, 채선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녀는 수많은 감정이 담긴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미안함과 감사함, 애틋함과 서러움, 그녀의 눈동자에 그 모든 것들이 녹아 있었다.

익제가 다 알고 있다는 듯 자애로운 표정으로 한발 다가왔다. 그가 가만히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채선은 그의 배에 얼굴을 묻고 조용한 숨을 흘렸다. 투둑투둑 떨어지는 빗소리가 적막한 방안을 가득 채웠다.

불현듯, 불운한 그녀의 삶에 어찌 이리 큰 행운이 찾아왔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어느 날 갑자기 그가 사라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도.

흉인의 별 아래에서 태어난 그녀의 운명을 생각하면 그리 가능성이 없는 일도 아니었다. 

“!”

채선이 더럭, 겁에 질린 얼굴로 그의 옷자락을 붙들었다. 질 좋은 군청색 비단이 그녀의 손안에서 구겨졌다. 

그러나 채선은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고, 그를 붙든 손에 좀 더 힘을 주었다. 두 번 다시 놓치는 일이 없도록.

익제의 시선이 잠시 그녀의 손길에 닿았다가 흩어졌다. 

***

달지는 찌푸린 눈으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비가 갠 하늘이 어수선했다. 별이 자리를 바꾸는 중이었다. 이럴 때는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 그가 장담할 수 있는 건.

“지는 별이군. 애석하다, 애석해. 천하를 손에 넣을 줄 알았던 광무대군이 결국 이렇게 사라지다니. 이게 다 그자, 은원군 때문이라니.”

달지가 침통한 표정으로 혀를 찼다. 뒷짐을 지고 하늘을 올려다보던 그가 미련을 떨치려는 듯 고개를 돌렸다.

꾸물거릴 때가 아니었다.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떠나야 했다. 자칫하다가는 저까지 엮일 수도 있었다. 그가 다급하게 등을 돌리던 그 순간.

“도망이라도 치는 것이오?”

귀에 익은 목소리가 날아왔다. 달지는 천천히 몸을 틀었다.

희미한 달빛 아래 아름다운 여인이 서 있었다. 마치 달에서 놀던 선녀가 잠시 지상에 내려온 것 같은 신비로운 모습이었다

허나, 그러면 뭘 하는가. 흉인의 별인데.

달지는 속으로 혀를 차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이선을 향해 못마땅한 목소리를 뱉었다.

“도망이라니.”

“아니오?”

“크흠.”

정곡이 찔려 대답이 궁해진 달지가 머쓱한 얼굴로 헛기침만 했다. 그는 저를 빤히 쳐다보는 이선과 눈을 맞추며 얇은 입술을 달싹였다. 

“그래서 광무대군께 고하기라도 하려고 그러십니까?”

“그럴 리가.”

이선이 우스운 농담을 들었다는 듯 입꼬리를 당겼다. 

달지는 그 모습을 빤히 쳐다보았다. 보면 볼수록 흉인의 별이라는 게 아쉬운 여인이었다. 

가라앉는 배에 타고 있으면서도 저 담대한 모습이라니. 아니면, 흉인의 별이기에 이토록 사람을 매혹시키는 것인가.

그것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것만큼이나 의미 없는 질문이었다.

“잠이 오지 않아 산책을 나왔는데, 겁먹은 생쥐처럼 꼬리를 말고 도망가는 모습이 보여 물어본 것뿐이오.”

“이, 이……!”

겁먹은 생쥐라니.

화를 내려던 달지가 주위를 둘러보며 입을 다물었다. 소란을 피워 봤자 좋을 게 없었던 탓이다. 그는 오늘 밤,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 작정이었다.

광무대군의 별은 하루가 다르게 빛을 잃어가고 있었고, 그가 천하를 제패할 일은 요원해 보였다. 기우는 배에서는 한시바삐 탈출하는 게 현명했다.

“그리 용한 점술가가 자신의 운명은 보지 못하오?”

그것은 일이 이렇게 될 때까지 어떻게 보고만 있었냐는 뜻이다. 이선의 신랄한 물음에 그가 혀를 찼다. 그녀를 이곳으로 데려온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달지, 그였기 때문이다.

그의 예언이 그녀를 세상으로 끌어냈다. 

그러나 이선의 어조에는 원망이 담겨 있지 않았다. 일견 담담하게까지 느껴지는 그 물음에 달지가 겸연쩍은 투로 대답했다.

“원래 중이 제 머리를 못 깎는 법입니다.”

말을 뱉고 보니 더욱 구차했다. 잘난 척 거드름을 피우며 귀인과 흉인 운운하였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두 사람을 혼동하고 말았으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못 본 척해주십시오.”

그 말을 남기고 걸음을 떼던 달지가 문득, 그 자리에 멈추었다. 그가 또다시 느릿하게 등을 돌렸다.

이선은 노란 달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비가 그친 뒤라 구름에 반쯤 몸을 숨긴 처연한 달이었다. 그녀의 얼굴에 희미한 달그림자가 내려앉았다.

달지는 마치 홀린 듯이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광무대군이 귀인의 별을 납치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잠을 통 못 주무시더니, 이제는 자신의 운명이 걱정되어 잠이 오지 않습니까?”

이선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캄캄한 밤하늘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달지가 아쉬운 듯 또 한 번 혀를 찼다.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귀인과 흉인이었다.

당연하다. 난세가 있어야 영웅이 있고, 영웅이 있어야 귀인이 있으며, 귀인이 있어야 흉인이 있는 법이었다. 세상의 모든 일은 물고 물리며 순리적으로 운행했다.

두 별 중 하나를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더없이 고귀한 귀인의 별이라 여겼고, 세상이 자신의 손에 떨어질 거라 자만했다. 

오래지 않아, 그가 천하를 주무를 수 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묘하게 엉킨 운명이 그의 뒤통수를 쳤다.

“걱정 마십시오.”

달지가 불쑥, 입을 열었다. 그제야 하늘을 올려다보던 이선이 천천히 시선을 떨어뜨렸다.

“부인의 별은 아직 빛을 잃지 않았으니 말입니다.”

이선의 눈매가 살짝 일그러졌다. 흉인의 별이 빛을 잃지 않았다는 게 무슨 뜻일까. 그녀는 좋아해야 할지, 싫어해야 할지 모를 얼굴로 물끄러미 그를 응시했다.

그녀의 속내를 눈치챈 달지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여기서 죽을 운명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것으로 끝이라는 듯, 그가 등을 돌렸다. 그는 두 번 다시 그녀를 돌아보지 않았고, 곧장 어둠 속으로 몸을 감추었다.

이선은 그가 사라진 풀숲 너머를 지그시 응시했다. 아마 두 번 다시 만날 일이 없을 터였다. 아쉬움도, 미련도 없는 이별이었다.

발아래에서 풀벌레가 시끄럽게 울었다.

*** 

“괜찮으십니까? 아프시면 말씀하십시오.”

의원이 상처 부위에 약을 바르며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익제는 어금니를 깨문 채 장계에 눈을 두었다. 씁쓸한 약초 냄새가 방안을 가득 채웠다.

‘제가 의관을 입혀 드릴까요?’

오늘 아침, 수줍은 얼굴로 그리 말하던 채선의 얼굴이 떠올랐다. 

옆구리를 찔러야 겨우 절을 하던 그녀가 어쩐 일인가, 익제가 의외로운 눈을 했다. 그가 이게 웬 떡인가, 하며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요. 그 고사리 같은 손으로…….”

하지만 그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고사리 운운하는 말에 슬그머니 뺨을 붉히며 쥐구멍을 찾던 채선이 갑작스러운 침묵에 의아한 눈을 했다.

“오늘은 되었소. 부인도 몸이 성치 않을 터인데.”

“저는 괜찮습니다.”

그녀의 대답에 익제가 내심 혀를 찼다. 채선이 옷을 갈아입혔다가는 등 뒤에 난 상처를 들키고 말 것이다. 

날이면 날마다 오는 기회가 아니었다. 익제는 아까운 기회를 날렸다는 사실에 눈살을 찌푸렸다. 

행여 실망한 그녀가 두 번 다시 옷을 입혀주지 않는다고 할까, 그가 성마르게 덧붙였다.

“내가 걱정이 되어서 그렇소. 산속을 헤매느라 고사리 같은 손이 상하지 않았소.”

“……예에.”

또다시 등장한 고사리에 채선이 부끄러운 표정으로 시선을 떨구었다. 그녀는 내가 봐둔 쥐구멍이 있는데, 라는 말을 중얼거리느라 입매를 찡그리는 익제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끝났습니다.”

의원이 한발 물러서고, 옷을 든 하녀가 다가왔다. 익제는 그녀가 입혀주는 옷에 팔을 끼웠다.

그때, 문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주군, 원진입니다.”

이제야 그가 도착한 모양이었다. 익제가 의원과 하녀에게 물러가라는 손짓을 했다. 방으로 들어온 원진이 익제에게 인사를 올렸다.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주군. 아, 평안하지는 않으셨겠군요. 얼마 전에 있었던 불미스러운 사건은 오는 길에 전해 들었습니다.”

“그건 됐고.”

익제는 원진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본론부터 꺼냈다. 오랜만에 만나는 사이치곤 인사가 참으로 건조했다.

“풍주의 상황은 어떤가?”

“이백중 어른께서 금세 상황을 파악하시고 군권을 장악하셨습니다. 괜한 약조를 한 탓에 늘그막에 사서 고생을 한다며 투덜거리시긴 하는데, 천하를 호령하던 명장이 어디 가겠습니까. 하루 만에 군사들을 쥐락펴락하시더군요. 머지않아, 일당백의 전사들이 될 것입니다.”

당시의 모습을 떠올리던 원진이 내심 혀를 내둘렀다. 이백중은 노장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바로 어제까지 현역에 있던 장수 같았다.

“혹, 말이 새어 나갈까 싶어 병사들에게는 그분이 이백중 어른이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주군을 위해 움직일 때, 그분의 명성이 한 몫 단단히 할 것입니다. 병사들에겐 살아 있는 전설이나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그래. 고생했다.”

익제는 이백중의 고집스러운 얼굴을 떠올렸다. 제가 해놓은 말이 있으니 차마 물리지는 못하고, 불평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을 고집스러운 모습이 눈앞에 선했다.

꼴좋군.

그가 비죽, 조소를 흘릴 때였다. 벌컥, 기척도 없이 문이 열렸다.

“주인님!”

한 가령이 그답지 않게 언성을 높이며 방 안으로 뛰쳐 들어왔다. 

들라는 명도 기다리지 못하고 헐레벌떡 달려온 한 가령의 모습에 익제가 눈살을 찌푸렸다. 원진 역시 그에게 의아한 시선을 던졌다.

“무슨 일인가?”

나직한 목소리가 한 가령을 향했다. 허억, 헉, 가쁜 숨을 내쉬던 그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앙상한 어깨가 거칠게 들썩였다.

“병사들이, 지금 병사들이 정안궁으로 쳐들어갔다고 합니다.” 

병사들이 광무대군을 덮쳤다?

한 가령의 말을 되뇌던 익제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그의 머릿속에 몇 가지 상황이 그려졌다. 그중 가장 가능성이 높은 건.

“누구의 사병이라 하더냐? 인애대군이냐?”

하지만 한 가령은 고개를 저었다. 마른침을 삼킨 그가 두 눈을 번득이며 대답했다. 

“사병이 아닙니다. 도성을 지키는 중앙군입니다.”

“중앙군이라 하면…… 태자가 아닌가?”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익제의 미간이 좁아졌다.

이제 막 도성에 도착한 원진이 영문 모를 얼굴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다 심상찮은 분위기를 느끼곤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이럴 때는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가는 탓이다.

간신히 숨을 가다듬은 한 가령이 빠르게 말을 이었다. 

“예, 그렇습니다. 다만, 무슨 연유인지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이제 막 도착한 소식이라 더 이상의 정보가 없습니다.”

태자가 광무대군에게 칼을 겨누었다. 왜?

익제의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 추측들이 난무했다. 가능성이 낮은 것들을 하나씩 제하고 나자, 마침내 한 가지 가정만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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