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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잃지 않았습니다.
낯짝도 두껍군.
익제는 속으로 그의 험담을 지껄였다.
모르는 사람이 듣기에, 광무대군의 말은 일견 타당해 보였다. 혼례식 전, 채선은 그의 집에 머물며 태부의 조카가 될 준비를 했지만, 그 사실을 아는 이는 없었다.
그의 속내를 모를 리 없는 익제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기억 못 할지도 모르겠지만, 문효대군의 상을 치를 때 광무대군을 뵈었소. 국대부인이 태자 전하께 문효대군을 살해한 자의 정체를 밝혀 달라고 읍소할 때 말이오.”
“큭.”
미처 생각지 못한 공격에 광무대군이 낮게 신음했다. 그는 수면 아래로 잠잠하게 가라앉아 있던 그 날의 일이 떠오르자, 초조한 표정으로 낮게 혀를 찼다.
그가 성마른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얼마 전까지 익제를 두고 형제만큼이나 가까운 사촌이라며, 정중하게 대하던 그의 말투가 최소한의 예의만 갖추었다.
지켜보는 눈이 없었다면 아마 그 최소한의 예의도 차리지 않았을 터였다.
“그리 먼발치에서 본 것만으로 내 얼굴을 어찌 정확하게 기억한단 말이오?”
“그뿐만이 아니오. 국대부인을 위로하기 위해 월성궁을 찾았을 때, 광무대군을 같은 방 안에서 대면했다고 하였소. 벌써 잊으셨소? 여섯 번째 부인과 함께 월성궁을 찾으셨던 날을 말이오. 그 자리에 인애대군의 부인이신, 선우부인도 함께 있었을 것이오.”
그 말은 삼자대면도 가능하다는 뜻이었다.
“으윽.”
광무대군이 눈매를 일그러뜨리며 나직한 신음을 흘렸다. 어째서 그 일을 잊고 있었을까.
제 손으로 제 무덤을 판 것 같은 낭패감에 주먹을 부들부들 떨던 그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몇 번이나 말하지만, 나는 그날 집 밖으로 나간 적이 없대도 그러시오. 은원군도 그날 밤, 나를 만나러 오지 않았소.”
“제가 간 것은 꽤 이른 밤이었고, 광무대군께서는 한참 후에 등장하셨소.”
광무대군이 말을 하는 족족 익제가 받아쳤다. 광무대군의 얼굴이 점점 붉어지더니, 기어코 그의 입에서 노성이 터져 나왔다.
“그 말은 나를 의심한다는 뜻이오! 밤중에 찾아온 것이 누군데, 적반하장이오. 단잠에 빠진 와중에 은원군이 찾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허둥지둥 달려 나갔더니, 이제 와 그것으로 나를 음해할 셈이오!”
“그때, 광무대군께서 입고 있던 옷은 외출복이었소. 신발에는 진흙이 묻어 있었고, 밤송이 가시가 박혀 있었지. 침수에서 막 나온 차림새는 아니었소.”
“!”
일순, 광무대군이 두 눈을 부릅떴다. 생각지도 못한 사실을 지적받은 그가 명백히 당황한 티를 냈다.
그 사이에 그걸 보았단 말인가. 아니, 애초에 그것을 확인하러 왔던 것인가.
태연한 익제의 얼굴에 광무대군의 심장이 서늘하게 식었다. 불현듯, 그가 자신의 앞길을 가로막을 거라던 달지의 예언이 되살아났다.
광무대군은 불길한 생각을 몰아내려 한층 더 성난 음성을 뱉었다.
“정 그러면 하인들에게 물어보시오! 그들이 내가 침수에 들었다는 사실을 증명해 줄 것이오!”
“자네 집 가신들의 말을 어찌 믿는단 말인가? 그리고 군대부인은 어찌하여 자네 집 뒷산에서 발견된 것인가? 그것도 설명해야 할 것이네.”
“형님!”
인애대군이 익제를 거들고 나서자, 광무대군이 대뜸 눈을 부라렸다. 그는 당혹스러운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갔다.
그가 태자를 향해 입을 열었다.
“억울합니다, 태자 전하. 어찌 한 쪽의 말만 듣고 판단을 하겠습니까? 군대부인이 얼마 전, 아이를 잃은 데다 연이어 참혹한 일을 겪은 탓에 정신이 멀쩡하지 못한 모양입니다. 하긴 어미가 아이를 잃었는데, 어찌 정신이 온전할 수 있겠습니까?”
한마디로 채선이 미쳤다는 거다.
픽, 익제의 잇새로 웃음이 샜다. 그 기척을 눈치챈 광무대군이 성난 시선을 던졌다. 익제가 그를 마주보며 건조하게 대꾸했다.
“아이는 잃지 않았습니다.”
“!”
그 말에 광무대군뿐 아니라 인애대군까지 놀란 얼굴을 했다.
태자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익제에게 눈길을 준 그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군대부인이 유산을 했다는 안타까운 소식이 내 귀에까지 들리던데, 사실이 아니란 말인가?”
“예, 태자 전하.”
익제가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가 담담하게 뒷말을 이었다.
“광무대군께서 여섯 번째 부인을 통해 회임 축하 선물을 보내셨습니다. 태아에게 좋은 약재라고 하였지요. 허나, 제가 그것을 아무런 검증도 없이 부인에게 먹였겠습니까?”
“하지만 그녀는……!”
광무대군이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자신의 여섯 번째 부인이 채선의 언니라는 말을 하려면, 그녀를 태부의 조카로 위장한 사연까지 털어놓아야 했다.
방 안에는 짧은 침묵이 흘렀다.
오직 익제만이 여유로운 눈으로 그들을 둘러보았다. 그것은 평소 분위기를 파악하고, 몸을 낮추던 그의 행동과는 사뭇 달랐다.
그래서 기묘했다. 조용히 숨죽이고 있던 한위대군마저 의외로운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태자 전하, 그러니 애초에 제 부인이 아이를 잃어 정신을 놓았다는 가정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태자와 인애대군, 한위대군의 시선이 이번에는 광무대군을 향했다. 그 속에 섞인 의혹을 눈치챈 광무대군이 뒤늦게 버럭 고함을 질렀다. 그는 명백히 당혹스러워하고 있었다.
“그 말은 무슨 뜻이오? 설마 내가 군대부인을 유산시키려는 목적으로 약을 타기라도 했다는 말이오? 대체 왜!”
“글쎄요.”
“아닙니다, 형님. 아닙니다, 태자 전하! 설마 은원군의 말을 믿으시는 건 아니겠지요? 무엇보다 증거가 없지 않습니까, 증거가!”
“그날 광무대군께서 보내신 약재는 그대로 보관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은원군이 사악한 약재를 탔을지 어찌 입니까! 태자 전하, 이건 모함입니다! 억울합니다!”
광무대군이 카랑카랑, 목소리를 드높였다. 그의 낯빛이 초조하게 바뀌었다. 그가 눈알을 굴리며 형제들의 동의를 구했지만, 누구도 선뜻 입을 열지 않았다.
크윽, 그가 신음을 흘리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어찌할까.
익제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광무대군을 응시했다. 애초에 그의 계획은 광무대군이 이 일과 아무런 상관이 없음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그런 후에 자신의 손으로 직접 그의 숨통을 끊으려고 했다.
온전한 복수.
되로 받은 것은 말로 갚아 주어야 직성이 풀렸다.
하지만 간신히 되찾은 이성으로 냉정하게 생각하자, 의심의 눈초리가 제게 쏠릴 게 분명했다. 그는 여기서 존재감을 드러내선 안 됐다.
아직은 아니었다. 멀리 봐야 했다. 채선을 지키기 위해, 더 큰 권력을 손에 넣기 위해 지금은 다른 이의 힘을 빌려야 할 때였다.
익제가 분한 듯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자신의 무력함이 뼈에 사무칠 정도로 아프게 다가왔다.
그때, 인애대군이 마침 생각난 듯 태자에게 시선을 주었다.
“태자 전하, 은원군에게 활을 쏜 괴한은 잡으셨습니까?”
그 말에 광무대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물끄러미 그를 응시하던 태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자를 문책하고 있으니 곧 배후가 밝혀질 것이다.”
그의 마지막 말이 쿵, 하고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동상이몽 속에서 각자의 머릿속이 바쁘게 움직였다.
***
투두둑.
빗방울이 처마를 두드렸다. 열린 창 너머로 비에 젖은 나뭇잎이 하나, 둘, 떨어졌다. 아마도 이 비가 그치고 나면, 계절이 좀 더 깊어질 것이다.
채선은 멍한 눈으로 처마 끝에 고인 빗방울을 응시했다. 혼자가 되는 순간이면 어김없이 이선의 얼굴이 떠올랐다.
마지막으로 그녀를 보았던 날, 제 눈물을 닦아주던 다정한 손길이 생생했다.
실은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아니, 믿고 싶지 않다는 말이 좀 더 정확할 것이다. 이선이 저를 해하려 하다니.
다른 누구도 아닌 그녀가, 다른 누구도 아닌 저를.
“이선아…….”
“추운데 어찌하여 창을 열고 있소? 이제 겨울이 코앞이라 날씨가 제법 쌀쌀하오.”
어느새 방으로 들어온 익제가 창가로 걸어가더니, 곧장 창문을 닫아걸었다. 그가 천천히 등을 돌렸다. 알 수 없는 시선이 그녀를 응시했다.
매번 인기척 없이 다가오는 게 익숙해질 법도 하련만, 채선은 그때마다 놀란 토끼처럼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곤 했다.
그녀가 뒤늦게 인사를 건넸다.
“오셨습니까?”
익제가 두꺼운 담요를 가져와 그녀의 어깨 위에 덮어 주었다.
춥지는 않았지만 채선은 수줍은 듯 시선을 떨구며 그의 마음을 어깨에 걸쳤다. 뺨이 후끈하게 달아오르는 것이 담요 때문인지, 그의 눈빛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녀가 쓸데없는 상념을 몰아내려는 듯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가신 일은 잘 끝나셨습니까?”
가신 일.
그 말을 머릿속으로 되뇌던 익제가 채선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아마도 광무대군의 처분이 정해졌냐는 물음일 것이다.
“그가 자신의 범행을 부인해 결론이 나지 않았소.”
“그렇습니까.”
채선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담담하게 대꾸했다. 오히려 그가 순순히 자신의 죄를 자백한다면, 그게 더 놀라운 일일 것이다.
배후가 밝혀졌을 때, 광무대군은 어떤 벌을 받게 될 것인가.
아마 그녀가 생각하는 것만큼 퍽 대단한 처분은 아닐 것이다. 그는 황제의 아들이었고, 채선보다 신분이 높았기 때문이다.
‘그저 착하게만 살아라. 길게 보면, 결국은 선한 사람이 이기는 법이거든. 그것이 세상의 이치란다.’
어릴 적, 아비는 그녀를 무릎에 앉혀 놓고 그렇게 말했었다. 끝내는 선한 사람이 이긴다고, 그것이 세상의 순리라고 말이다.
얼마나 길게 봐야 할까요, 아부지.
말없이 그녀를 내려다보던 익제가 불쑥, 입을 열었다. 그의 잇새로 다정한 물음이 흘러나왔다.
“자매가 걱정되오?”
“아, 아닙니다.”
채선은 뜨끔한 얼굴로 얼른 고개를 저었다. 염치가 있다면, 익제에게 이선이 걱정된다는 말은 할 수가 없었다.
솔직히 이선이 걱정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녀가 한 짓은 용서할 수 없지만, 그녀는 채선에게 하나 남은 가족이었고, 어린 시절의 기억을 공유하고 있는 분신과도 같았다.
두 사람 사이에 엮인 인연의 실은 가위로 싹둑, 잘라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함께한 시간만큼 겹겹이 쌓이고 꼬인 끈은 강철보다 더욱 단단했다.
그러나 그것은 채선의 사정일 뿐, 익제에게 이선을 용서해 달라는 말은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염치없는 부탁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않았다.
이선은 여전히 익제의 반대편에 서 있었고, 광무대군이 몰락하지 않는 이상 두 사람은 같은 선상에 설 수 없을 터였다.
그런데 그때.
“걱정 마시오.”
익제가 부드럽게 말했다. 채선이 힐끔, 눈동자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광무대군이 그리 쉽게 쓰러질 자는 아니오. 그러니 부인의 자매도 당분간은 별일이 없을 것이오.”
“……예.”
채선은 이번에도 씁쓸하게 고개를 떨구었다. 그의 말처럼 광무대군은 쉽게 무너질 자가 아니었다. 어떻게 해서든 바득바득 살아날 것이다.
그 말은 앞으로도 익제가 고단할 거란 뜻이었다. 그녀의 눈매가 걱정스러운 빛을 띠었다.
이선보다 그가 더 걱정된다면, 그녀는 무어라고 저를 나무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