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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별이 뜨는 밤 (104)화 (104/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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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광무대군.

“인애대군께서 오셨습니다.”

한 가령의 말에 익제가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자신을 영락궁으로 부르지 않고 그가 직접 여기까지 온 걸 보니, 어지간히 똥줄이 탄 모양이었다.

이제쯤 올 줄 알았다. 익제는 채선을 핑계로 두문불출하는 중이었고, 인애대군은 그런 그를 기다려줄 만큼 참을성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경황이 없는 그를 부를 수도 없으니 남은 선택지는 하나, 제 발로 향덕원의 문턱을 넘는 것뿐이었다.

“모셔라.”

“예.”

문이 열리자마자, 인애대군이 성급한 걸음으로 들어왔다. 자리에 앉은 그는 익제에게 인사를 건넬 여유도 없이 즉각 본론부터 꺼냈다.

“부인은 깨어나셨나? 그래, 군대부인을 납치한 이가 누구라고 하던가? 그자의 얼굴을 보았다고 하던가?”

질문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익제는 대답 대신 하녀가 가져온 찻잔에 손을 뻗었다. 너무 뜨겁지도, 그렇다고 너무 차갑지도 않은 미지근한 온도의 찻잔이 그의 손을 데웠다.

“왜 아무 말이 없나? 부인께서 무어라고 하던가? 응? 어서 말해 보게.”

인애대군이 애가 닳은 얼굴로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그는 채선의 상태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고, 오직 범인이 누구인지만 중요한 듯 보였다.

익제가 찻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한 모금, 소리 없이 차를 들이켠 그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인애대군에게 시선을 주었다. 

인애대군이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익제가 무심하게 입술을 달싹였고, 인애대군은 그의 입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광무대군.”

“광……!”

인애대군이 미처 말을 잇지 못하고 두 눈을 홉떴다. 그 사이로, 익제의 담담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광무대군께서 복면을 쓴 괴한과 함께 오두막으로 찾아왔다고 하더군요. 그녀를 납치한 괴한과 함께 말입니다. 그 후, 부인은 자력으로 탈출했다고 합니다.”

“아!”

인애대군이 나직한 탄성을 흘렸다. 그것은 오랫동안 염원하던 일이 마침내 이뤄진 것 같은 숨죽인 탄성이었다.

그러고 나서야, 자신의 행동이 경망스러웠다고 판단한 것인지 그가 짐짓 침통한 표정을 꾸며냈다. 미간을 찌푸린 인애대군이 돌다리를 두들겨보듯 신중하게 물었다.

“광무대군이……, 확실한가?”

“예.”

익제의 대답을 들은 인애대군은 찻잔에 손을 대지도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엇이 그리 급한지 그가 허둥지둥 방을 나섰다. 

“이런 극악무도한 일이! 내 이 사태를 좌시할 순 없네. 당장 태자 전하를 찾아가 이 일의 배후를 고변할 것이네.”

“태자 전하께는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인애대군이 방을 나가다 말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가 삐걱삐걱, 고개를 돌렸다.

그는 익제와 태자 사이의 관계를 가늠하려는 듯 눈매를 좁혀 떴다. 자신의 편이라 생각했던 익제가 행여 딴마음을 먹지는 않았는지 의심하는 게 분명했다.

“벌써 말씀을 드렸다?”

익제가 그의 속내를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그러나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양 대수롭지 않은 태도로 대꾸했다.

“예, 오늘 아침에 사람을 보내셨길래 사건의 정황을 서신으로 적어 보냈습니다. 제 등에 박힌 화살도 가져가셨습니다.”

“태자 전하께서 사람을 보내셨다……. 하긴, 그냥 넘어갈 만한 사안은 아니지.”

그제야 익제가 화살에 맞았단 사실을 떠올렸는지, 인애대군이 한참이나 늦은 안부를 물었다.

“그렇지 않아도 소식을 듣고 걱정하던 참이었네. 그래, 몸은 괜찮은가.”

“예. 걱정해주신 덕분에 운신은 할 수 있습니다.”

“그나마 다행이네.”

고개를 끄덕이던 인애대군이 “흠.”하고 침음을 흘렸다. 생각에 잠긴 얼굴로 바닥을 내려다보던 그가 이윽고 고개를 치켜들었다.

인애대군의 눈매가 단호한 빛을 띠었다.

“그래도 태자 전하를 찾아뵈어야겠네. 이럴 때일수록 황족 한 명 한 명의 목소리가 중요한 법이니 말일세.”

광무대군은 황제의 아들이었다. 그 자체로 웬만한 죄는 묻지 못하는 치외법권이었다는 말이다. 그러니 인애대군의 말처럼 다른 황족들의 여론이 중요했다.

다른 황족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씁쓸하긴 했지만.

“아니지.”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인애대군이 익제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방을 나섰다.

“이럴 게 아니라, 태자 전하께 가는 길에 한위대군부터 만나야겠군.”

그를 배웅한 한 가령이 방으로 돌아왔다. 익제가 찻잔을 물리며 그에게 시선을 던졌다.

“원진은 어디쯤이라더냐?”

“내일이면 도착한다고 합니다.”

“그래.”

잠시 허공을 응시하던 그가 문득, 두 눈을 가늘게 떴다. 그의 잇새로 딱딱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지금 즉시 부인의 처소에 경비를 강화하라. 모든 사병을 그곳에 투입해도 좋다.”

“예.”

한 가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익제의 속내를 읽은 탓이었다. 궁지에 몰린 광무대군이 어찌 나올지는 세 살배기 어린애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한 가령은 지체하지 않고, 곧장 방을 나섰다. 감히 안주인을 납치하고, 태중의 아기씨를 해하려 하다니, 노인의 주름진 얼굴이 모처럼 서슬 퍼런 기색을 띠었다. 

인사를 하던 하인들이 그의 엄혹한 표정에 놀라 슬금슬금, 자리를 피했다.

***

처소를 나서려던 채선은 제 앞을 막아서는 도영의 행동에 의아한 듯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녀의 동그란 눈을 내려다보던 도영이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갑갑하시겠지만, 당분간 처소 안에서 머물러 주십시오.”

채선은 말없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바보가 아니었고, 바깥에서 무슨 일인가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높은 확률로 그녀와 관련된 일일 것이다.

채선은 소리 없는 한숨을 삼키며 돌아섰다. 이럴 때는 시키는 대로 따르는 편이 나았다. 저 때문에 괜히 죄 없는 사람들을 힘들게 하지 않으려면.

돌아서던 그녀가 힐긋, 눈동자만 돌려 도영의 안색을 살폈다. 늘 빙글빙글 웃고 다니는 그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지니, 마치 딴사람이 된 것 같았다.

“……몸은, 괜찮소?”

그녀의 물음에 도영은 “예.”하고 짧게 대답했다. 그는 더 이상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 무 자르듯 단호한 말투에 채선이 시무룩하게 머리를 떨구었다.

이상했다. 군대부인쯤 되면 천하를 호령하진 못하더라도 여러 사람 위에 군림하는 자리인데, 그녀는 여기저기 눈치 볼 곳이 많았다.

도영도 송하처럼 마음이 상했나 봐. 저이의 마음은 또 어찌 풀어준담.

채선의 축 처진 어깨를 보던 도영이 별안간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는 마음이 상한 게 아니었다. 스스로를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무사의 자존심으로 살아가는 그는 채선을 버리고 살아 돌아온 스스로가 비굴하게 느껴졌다. 게다가 익제의 등에 화살이 꽂히는 모습을 멀뚱히 보고만 있었다.

두 번의 실수.

그러나 누구도 그의 죄를 묻지 않았다. 그래서 더더욱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아무도 그를 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스스로 자신의 죄를 물어야만 했다.

도영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앞서가는 채선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착잡하게 가라앉았다. 다음 순간, 그가 비장하게 이를 사려 물었다.

더 이상의 실수는 없다.

그가 스스로에게 다짐할 때였다. 한 걸음 앞서 걷던 채선이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왜 그러셔요, 부인?”

도영의 눈치를 살피며 그녀의 뒤를 따르던 송하가 얼른 채선의 곁으로 뛰어갔다. 그리고 그녀의 시선을 쫓았다.

채선은 그 자리에 풀썩, 쪼그리고 앉아 툇마루 아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잇새로 놀란 듯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쥐구멍이 있구나.”

“쥐구멍이요?”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에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던 송하가 덩달아 채선의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과연 주먹만 한 쥐구멍이 하나 있었다.

“향덕원처럼 큰 저택에는 쥐구멍이 없을 줄 알았거든. 신기하구나.”

“신기할 게 뭐가 있습니까? 군대부인께서 곱게 자라셔서 모르시나 본데, 큰 저택일수록 쥐가 많습니다. 먹을 게 풍족하거든요.”

그 말에 채선이 빙긋, 웃음을 머금었다. 그녀는 곱게 자라지 않았다. 쥐보다 더한 것도 많이 보았다. 

사람 먹을 음식도 부족한 부엌에서 곡식을 축내는 생쥐와 싸움을 했던 적도 여러 번이다. 허니, 새삼스러울 것은 없었다. 

다만, 부끄러울 때마다 그리 찾아도 보이지 않던 쥐구멍이 이곳에 있어 눈길이 갔던 것뿐이었다.

송하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채선을 부축했다.

“쪼그리고 앉지 마십시오. 아기씨한테 안 좋습니다. 하인들에게 쥐구멍이란 쥐구멍은 싹 다 메꾸라고 할 테니,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아니야, 그럴 것 없다.”

채선이 송하와 함께 나란히 걸음을 옮기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고사리 같은 손이니, 작은 몸이니 하며 낯부끄러운 말을 늘어놓는 익제의 목소리가 쟁쟁했다.

“쥐구멍이 있는 편이 낫겠어. 조만간 또 필요해질 것 같거든.”

알쏭달쏭한 그녀의 발언에 송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체 쥐구멍을 어디다 쓴단 말인가. 

그러다 불현듯, 무슨 생각을 떠올린 것인지 채선을 향해 미심쩍은 시선을 던졌다.

“설마 또 도망가실 생각은 아니시지요? 아무리 군대부인이라도 쥐구멍으로 나가실 수는 없을 겁니다. 게다가 주인님께서 담장의 오얏나무를 베어 버리셨습니다. 예전처럼 나무를 타고 도망가실 수도 없을 거예요.”

“그런 게 아니다.”

“으으음.”

채선이 깜짝 놀란 얼굴로 얼른 손을 저었다.

“정말로 아니라니까.” 

“으으음.” 

그러고도 한참 동안 의심의 시선을 풀지 않던 송하가 방문을 열며 말했다.

“하긴, 그 덕분에 괴한의 손에서 무사히 도망을 치셨으니 다행이긴 합니다. 도망치는 재주 하나는 기가 막히세요. 듣자 하니, 사냥꾼의 덫에 걸리셨다면서요? 아니, 발밑도 보지 않고 무얼 하신 겁니까? 행여 아기씨한테 무슨 일이 생겼으면 어쩔 뻔하셨습니까?”

“아니, 빠진 게 아니라 내 발로…….”

채선의 변명은 송하의 잔소리에 묻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녀의 동그란 눈매가 시무룩하게 처졌다. 이제야 향덕원으로 돌아온 실감이 났다.

***

“나를 만났다? 하하하, 군대부인께서 엄혹한 일을 겪으신 탓에 기억이 혼란스러운 모양입니다. 있지도 않은 일을 사실처럼 얘기하다니.”

광무대군이 일그러진 입매로 억지웃음을 지었다. 태자와 인애대군, 한위대군, 그리고 익제가 그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황족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공식적인 모임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비공식적인 회합도 아니었다. 황족들이 모두 모였다는 것만으로도 이 자리는 그만큼의 무게를 가졌다. 

익제는 한발 물러선 자세로 무심하게 상황을 관조했다. 그들 사이에서 소용돌이치는 검은 흉계들이 손바닥 보듯 훤히 읽혔다. 

인애대군은 이번 일로 광무대군을 쳐내려 작정을 했고, 광무대군은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발버둥을 쳤다.

태자는 이 사건을 통해 황제의 자질을 시험받는다 여기며, 한위대군은 행여 제 발등에 불똥이 떨어질까 노심초사했다.

광무대군이 좌중을 둘러보며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다. 그의 목소리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태자 전하, 군대부인이 저를 알아보았다는 것부터가 이상합니다. 저는 그녀와 직접 대면한 기억이 없는데, 군대부인은 어떻게 제 얼굴을 알아보았단 말입니까? 은원군의 혼례식에서도 먼발치에서 잠시 머물다 갔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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