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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어먹을 귀인
그건 거짓이 아니었다. 첫날, 되바라진 태도로 그녀를 무시했던 송하는 어느새 채선에게 둘도 없는 소중한 이가 되어 있었다.
때로는 언니처럼, 때로는 동생처럼 그녀는 혼자된 채선의 곁을 살갑게 지켜주었다. 익제가 그녀를 의심하고 있던 그 시절에도.
아마 익제에게 한 가령이 그렇듯, 제게는 송하가 그럴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를 지키는 것 또한 주인의 몫일 터였다.
그 마음을 송하라고 모를 리 없었다. 다만, 주인의 목숨을 담보로 살아난 스스로에게 화가 난 것뿐이었다.
남들의 손가락질을 두려운 건 아니었다. 저로 인해 채선이 위험을 자초했다는 사실이 참담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부인께 무슨 일이 생겼다면 저는…….”
송하의 목소리가 바르르 떨렸다. 그녀는 눈물을 글썽이며 차마 뒷말을 잇지 못했다.
채선이 그런 그녀를 올려다보며 빙긋, 웃었다.
“아무 일 없이, 이렇게 무사히 돌아오지 않았느냐.”
“!”
그 말에 송하가 한층 더 원망스러운 눈으로 채선을 노려보았다. 운이 좋았다. 무사히 돌아올 확률보다 그렇지 못할 확률이 더 높았다.
그녀의 뾰족한 눈초리를 눈치챈 채선이 서둘러 덧붙였다.
“나도 아무 때나 그러진 않는다. 다 생각이 있어서 그리한 것이었다.”
“생각이요? 도대체 무슨 생각이요? 다시 또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그때도 그리하실 겁니까? 하찮은 목숨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 불구덩이를 향해 걸어 들어가실 거냔 말입니다.”
“으음…….”
채선이 송하의 손을 슬그머니 놓으며 시선을 피했다. 아니라는 말이 선뜻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거짓말에 서툴렀고, 앞으로도 송하를 모른 체할 수 없을 터였다.
채선은 아직도 자신의 결정이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광무대군은 그녀를 원했고, 털끝 하나 다치지 않은 상태로 데려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니 그 상황에서는 애꿎은 목숨이 죽어 나가는 것을 지켜보느니, 제 발로 잡혀가는 편이 나았다. 게다가 전세가 명확히 기운, 불리한 상황에서는 더더욱.
대답이 궁해진 그녀가 은근슬쩍 화영을 돌아보았다. 시무룩한 그녀의 얼굴을 보던 화영이 짙은 한숨을 흘렸다.
채선은 도성의 높은 부인을 연기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녀의 본성이었다.
졌다.
화영은 흉내조차 낼 수 없었다. 돌아가야지, 여긴 내 자리가 아니구나, 그녀가 씁쓸한 얼굴로 웃음을 흘렸다.
채선이 그런 화영을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던 그때.
“군대부인.”
송하가 어금니를 꽉 깨문 채 으스스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채선이 화영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다시 송하를 돌아보았다. 동그란 눈꼬리가 아래로 축 처졌다.
“하지만…….”
“어찌 앉아 계시오? 아직 몸이 성치 않을 터인데. 혹, 화영이 부인을 귀찮게 하는 것이오? 부인의 말벗이나 하라고 도성에 남겨두었는데, 쓸모가 없다면 당장 풍주로 돌려보내야겠소. 안 그래도 밥만 축내고 있는 꼴이 못마땅했는데.”
등 뒤에서 익제의 자애로운 목소리가 날아왔다. 말의 내용은 썩 자애롭지 않았지만 말이다.
인기척도 없이 등 뒤까지 다가온 그의 모습에 채선이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그러다 한 박자 늦게 입술을 달싹였다.
“아니요, 아닙니다! 제가 걱정되어 안부를 물으러 들른 것뿐입니다. 송하도 그렇고, 은원군께서도 그렇고…… 걱정이 너무 많아요. 이래 봬도 엄청 튼튼한데.”
“그 작은 몸으로 그렇게 큰 고초를 겪었는데, 어찌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있겠소?”
“그 작은, 으…….”
오랜만에 당하는 낯간지러운 공격에 채선이 앓는 소리를 흘렸다. 그녀가 힐끔힐끔, 눈동자를 굴려 두 사람의 눈치를 살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화영이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내가 밥을 먹으면 얼마나 먹는다고. 더러워서 돌아간다, 돌아가. 내 두 번 다시 향덕원이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나 봐라.
익제가 스윽, 무심한 눈동자를 던졌다.
“…….”
물끄러미 응시하는 그의 시선에 두 사람은 눈치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공손한 인사를 남긴 채 방에서 물러났다.
그곳에는 두 사람만이 남았다.
채선과 익제.
채선은 눈 둘 곳을 찾지 못해 애꿎은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렸다.
익제의 시선은 마치 형체를 가진 것처럼 묵직했다. 그의 눈길이 닿는 곳마다 벌레가 기어가듯 온몸이 간지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익제는 그녀 몰래 조용히 주먹을 말아쥐었다. 그의 눈동자가 새카맣게 가라앉았다. 비로소 그가 잃을 뻔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실감이 났던 탓이다.
노을이 내린 것 같은 발그스름한 뺨을, 도라지꽃처럼 수줍게 흔들리는 손가락을, 그러면서도 애정을 담아 저를 올려다보는 눈동자를, 하마터면 두 번 다시 못 볼 뻔하였다.
그 사실을 상기할 때마다 그는 마치 까마득한 절벽 위에 서 있는 것처럼 심장이 선득해지곤 했다. 그와 동시에 처절한 무력감이 그를 덮쳤다.
고작 그녀 하나도 온전히 지킬 수 없는 스스로에 대한 무력감.
그가 지닌 한 줌짜리 권력은 권력이 아니었다. 그녀를 빼앗겨도 자신의 힘으로 광무대군을 처단하지 못하는 권력은 더 이상 권력이 아니었다.
그는 더 큰 힘을 손에 넣고 싶었다.
누구도 그녀를 탐낼 수 없는 절대 권력.
행여 누군가 그녀를 탐낸다면,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그를 단죄할 수 있는 막대한 권력.
그 자리는.
“익제님……?”
채선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를 불렀다. 그제야 짧은 상념에서 벗어난 그가 다시금 부드러운 시선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채선이 안도한 듯 어깨를 떨구며 물망초 같은 웃음을 되돌렸다.
그녀의 웃음.
불현듯, 익제가 목울대를 울렸다. 그래, 저것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그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설령, 그것이 반역이라 불리는 일생일대의 도박이라도.
그가 칼날처럼 서늘한 결심을 품을 때.
“아.”
채선이 무언가 생각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익제는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속내를 잠재우고 짐짓 온화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자신의 모습이 가증스러웠지만, 그는 채선을 곁에 두기 위해서라면 어떤 위선도 떨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것이…….”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그녀가 다시 한번 고개를 갸웃거렸다. 채선의 잇새로 미심쩍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날, 광무대군이 저를 보고 귀인이라 하였습니다.”
“…….”
익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생각이 많은 눈으로 채선을 바라보았을 뿐이다.
귀인.
빌어먹을 귀인.
이전에는 흉인이 그의 발목을 잡더니, 이제는 귀인이 그의 손아귀를 벌려 그녀를 빼앗아가려 했다. 그에겐 귀인이나 흉인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차라리 채선이 발에 채는 돌멩이처럼 흔한 여인이기를 바랐다. 타인의 길운과 불운을 관장하는 대단한 존재가 아니라, 아무 능력도 없는 필녀이기를.
그리하여 누구도 그녀를 탐내지 않고, 누구도 그녀를 꺼리지 않기를 진심으로 원했다.
그의 긴 침묵을 무어라고 생각했는지 채선이 얼굴을 붉히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녀의 동그란 눈매가 아래로 처졌다.
“하, 하긴 말이 안 되긴 하죠? 제가 귀인이라니……. 귀인이었다면 애초에 이런 일이 생기지도 않았을 텐데 말이죠. 분명 광무대군이 무언가를 잘못 알았을 겁니다. 아니면, 제가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거나요. 맞아요, 어쩌면 이선의 얘기를 하고 있었는지도 몰라요.”
채선이 멋쩍은 표정으로 시선을 피했다. 입 밖으로 뱉고 나서야 그것이 얼마나 얼토당토않은 말인지 새삼 실감이 났던 탓이다.
내가 귀인이라니.
어째서 그 말을 믿었을까, 그녀는 뒤늦은 부끄러움에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쥐구멍을 찾아보았지만, 휘황찬란한 대저택에 쥐구멍 같은 게 있을 리 없었다.
익제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자상하게 속삭였다. 마치 어리석은 아이를 어르듯, 달콤한 목소리가 나붓이 날아 그녀의 귓가에 내려앉았다.
“그자가 무언가 잘못 알았나 보오.”
“예, 그런가 봅니다.”
채선은 붉어진 뺨을 숨기려 슬쩍,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귓불과 목덜미가 발갛게 달아올라 아무 소용이 없었지만 말이다.
익제가 그녀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는 두 번 다시 채선을 빼앗길 마음이 없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그녀에게 거짓을 속삭일 수도 있었다.
설령 그것이 그녀의 마음에 무거운 짐이 된다고 해도.
그가 마치 속죄라도 하듯, 천천히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채선이 깜짝 놀라 그의 팔을 붙들었다. 그녀의 잇새에서 경악성이 터졌다.
“익제님!”
그러나 그는 개의치 않고 그녀의 손을 잡았다. 연약한 동물처럼 가련한 표정으로 채선의 손등에 뺨을 비빈 익제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나는 그대가 귀인이든, 흉인이든 상관없소.”
“……예. 알고 있습니다.”
채선이 머뭇머뭇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부인이 흉인의 별이라 하여도 나는 그대가 어찌하지 못할 만큼 대단한 사람이오.”
“예.”
채선이 작은 웃음을 터뜨리며 또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그녀를 구원해준 한마디였다.
“마찬가지로, 설령 부인이 귀인의 별이라 하여도 나는 그대가 어찌하지 못할 만큼 대단한 사람이오.”
“아…….”
채선의 잇새로 나직한 탄성이 터졌다. 그녀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를 정도로 아둔하지 않았다. 그는 정말로 채선이 귀인이든, 흉인이든 상관이 없는 것이었다.
그는 그녀의 불운을 꺼림칙하게 느끼지 않는 것처럼 그녀의 행운을 탐내지도 않았다. 그건 그녀를 다른 무엇도 아닌, 심채선으로 여긴다는 뜻이었다.
심채선.
그녀조차 까맣게 잊어가는 그 이름을 상기시켜주는 사내.
“……예.”
채선이 울 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또다시 그녀를 구원했다. 아주 손쉽게 그녀를 진흙탕 속에서 쑥 끌어 올렸다.
채선은 그의 다정함에 위로받았고, 그의 온화함에 의지했다. 그로 인해 그녀는 오롯이 심채선이 될 수 있었다.
익제가 천천히 한 손을 뻗었다. 엄지와 검지로 채선의 턱을 움켜쥔 그가 지루할 만큼 느리게 얼굴을 들었다.
눈꺼풀을 파르르 떨던 채선이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눈이 감기는 순간, 두 사람의 입술이 맞닿았다.
따뜻했다.
아니, 뜨거웠던가.
채선은 몽롱해지는 의식 사이로, 맞닿은 입술의 감촉을 잊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러다 강아지풀처럼 보드랍게 입술을 문지르는 익제의 행동에 간지러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평소와 같은 격정적인 입맞춤은 아니었다. 그녀를 집어삼킬 듯 사납게 휘몰아치는 입맞춤도 아니었다. 부리를 맞댄 어린 새처럼 가볍디가벼운 입맞춤이었다.
그런데도 두 사람의 열기가 몸속 깊숙한 곳을 데웠다.
그 순간, 채선은 제 안의 무언가가 녹아내리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늦봄의 응달처럼 끝끝내 해빙하지 않던 얼음이 기어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
턱을 움켜쥐고 있던 손가락이 옆으로 이동했다. 익제가 은근한 손길로 그녀의 뺨을 쓸어내렸다.
채선이 그의 손에 뺨을 비볐다. 조금 전, 그가 그랬던 것처럼.
커다랗고 딱딱한 손이 움칫하더니, 이내 그녀의 뺨을 넉넉하게 움켜쥐었다. 그의 엄지가 눈꺼풀을 훑고 나서야 채선은 자신이 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니, 우는 것이 아니다. 꽁꽁 얼어 있던 응어리가 녹아 물이 되어 흘러내리는 것이다.
그날의 입맞춤은 조금 뜨거웠고, 또한 조금 짰다. 아마도 그녀는 그 순간의 감촉을 영원히 잊을 수 없을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