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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별이 뜨는 밤 (102)화 (10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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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2

    일어났소?

    “예.”

    그 말이 주문이라도 된 것처럼 또다시 긴 졸음이 몰려왔다. 좀 전처럼 정신을 잃은 건 아니었다. 이번에야말로 노곤한 잠이 쏟아졌다. 

    기나긴 하루였다. 잊고 있던 피로가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채선은 그의 가슴에 가만히 등을 기댔다. 익숙한 품이었다. 적당히 딱딱하고, 적당히 따뜻한. 

    그녀는 그의 심장 소리를 들으며 편안한 잠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

    익제가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 광무대군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가 당황한 표정으로 서둘러 말고삐를 당겼다. 광무대군을 태운 말이 조금씩 뒷걸음질을 쳤다.

    그때, 그의 등 뒤에서 태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태자는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던 듯 여상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일단 군대부인부터 데려가는 것이 좋겠군. 자네도 상처를 보살펴야 하지 않겠나. 나머지 일은 날이 밝은 뒤에 처리해도 늦지 않다. 내 호위무사들이 달려갔으니, 자네에게 활을 쏜 자도 곧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익제는 대답 대신 그를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태자를 믿을 수 있을까, 가늠이라도 하듯이. 

    막말로 그가 광무대군을 빼돌린다면, 익제는 두 눈 시퍼렇게 뜨고 그를 빼앗길 수밖에 없을 터였다.

    하지만.

    그의 말대로 지금은 품 안의 여인이 먼저였다. 익제가 한 손으로 채선의 허리를 단단히 끌어안고, 다른 한 손으로는 고삐를 쥐었다.

    “가자.”

    그가 풍오의 허리를 걷어찼고, 밤처럼 까만 흑마가 쏜살같이 내달렸다. 도영이 황급히 그의 뒤를 쫓았다.

    그곳에 남은 것은 타오르는 횃불과 불온한 침묵뿐이었다.

    ***

    “그, 그럼 뽑겠습니다. 많이 아프실 것입니다.”

    의원이 의자에 앉아 있는 익제를 보며 안절부절못하는 투로 양해를 구했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의원의 초조한 눈길이 익제의 옆얼굴을 향했다.

    침상 맡에 앉은 그는 잠든 채선의 손을 꼭 움켜쥐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단 한순간도 흔들리지 않았다. 

    익제는 잠시라도 눈을 떼면 그녀가 사라지기라도 할 것처럼 집요하고 끈질기게 그녀를 응시했다.

    그가 채선을 품에 안고 돌아왔을 때, 향덕원 사람들은 다 같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 약한 여인들은 소매에 눈물을 찍기도 했다.

    무사히 돌아오셨구나, 참으로 다행이다.

    그러다 뚜벅뚜벅 걸어가는 익제의 뒷모습에 그들의 낯이 도로 창백하게 질렸다. 그가 발을 내디딜 때마다 등에 박힌 화살이 움찔거리며 살을 헤집었다.

    “…….”

    정작 당사자는 아무렇지 않은데, 의원이 긴장한 얼굴로 연신 땀을 닦았다. 그는 행여 땀에 젖은 손에 화살대가 미끄러질까, 몇 번이고 옷자락에 자신의 손바닥을 문질렀다.

    그가 화살대를 잡으며 비장하게 읊조렸다. 

    “시작하겠습니다.”

    의원은 상처를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 화살이 들어간 방향 그대로 뽑으려 안간힘을 썼다. 그가 어금니를 꽉 깨물고 두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있는 힘껏 화살대를 당겼다.

    두둑.

    화살촉이 살점을 벌리며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의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익제는 어금니를 악물었다. 그의 이마에 식은땀이 번들거렸다. 고통을 참는 두 눈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 와중에도 익제는 신음 한 조각 흘리지 않았다. 찌푸린 눈으로 채선을 내려다보며, 그녀의 손등을 가만가만 어루만질 뿐이었다.

    투두둑.

    끝이 뾰족하고 뒷면이 넓적한 화살촉은 상대에게 깊은 상처를 내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살상 무기였다. 

    그리고 그것은 제 역할을 다했다. 벌어진 상처에서 피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주인님.” 

    한 가령이 안달복달하며 익제를 불렀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는 여전히 채선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의 이마에 굵은 핏줄이 섰다. 목에도 핏대가 도드라졌다. 어찌나 턱을 세게 다물었는지 으득, 하고 이 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

    그때, 채선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러기를 잠시, 이윽고 그녀가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깜빡깜빡.

    채선이 갈색 눈동자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멍한 눈동자는 이곳이 어디인가 생각하는 기색이었다. 

    그녀의 눈동자에 더럭, 불안함이 깃들었다. 어쩌면 아직도 광무대군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일까, 체념과 두려움이 스치고 지나가는 순간.

    “일어났소?”

    익제가 다정한 음성으로 그리 물었다.

    그 모습을 보던 의원이 뒤로 나자빠질 듯 기함했다. 생살에 박힌 화살을 뽑는데 웃을 수가 있다니, 수십 년 의원 생활을 하였지만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본래 화살을 뽑으려면 마취 효과가 있는 향을 피우고, 정신을 몽롱하게 만드는 아편을 먹인 후 치료를 진행하는 것이 정석이었다. 생살이 찢기는 고통은 온전한 정신으로는 견딜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익제는 그의 처치를 거부했다. 채선이 언제 잠에서 깨어날지 알 수 없다는 이유였다. 

    그는 그녀가 눈을 떴을 때, 그 갈색 눈동자에 가장 먼저 담기는 사람이 자신이길 바랐다.

    의원이 할 수 있는 건 익제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단번에 힘을 주는 것뿐이었다. 그가 입술을 잘근 깨물고 화살을 당겼다.

    “…….”

    두둑.

    화살촉이 마지막 살점을 가르며 쑥 하고 뽑혔다. 하아, 하아, 의원의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마치 목욕이라도 한 듯, 등이 축축했다.

    한 가령이 안쓰러운 얼굴로 주먹을 움켜쥐었고, 송하가 참혹한 광경을 보다 못해 고개를 돌렸다.

    화살이 뽑힌 자리에서 울컥울컥, 피가 터져 나왔다. 의원이 서둘러 지혈을 하려 하였으나, 익제가 눈빛으로 그를 만류하였다. 의원이 뜨악한 표정으로 물러섰다.

    “?”

    그제야 인기척을 느낀 채선이 고개를 돌려 의원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가 누구였더라, 흐릿한 기억을 더듬었다. 

    분명 낯설지 않은 얼굴인데.

    막 생각이 나려던 찰나, 익제가 보드라운 목소리로 그녀를 나무랐다.

    “눈을 뜨자마자 다른 사내를 보는 법이 어디 있소?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데.”

    “!”

    그제야 채선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일순, 그녀의 눈매가 울 듯이 일그러졌다. 그와 동시에 잊고 있던 기억이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사냥꾼이 파놓은 덫에 몸을 숨긴 것과 말 등 위에서 본 그의 얼굴.

    그렇구나. 돌아왔구나.

    익제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방 안 풍경이 익숙했다. 그곳에 서 있는 이들의 얼굴이 낯익었다. 

    비로소 채선이 안심한 표정으로 입꼬리를 당겼다. 금방이라도 깨어질 듯 희미한 미소가 그녀의 입가에 걸렸다.

    “오실 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너무 늦었소.”

    익제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것은 등 뒤의 통증 때문은 아니었다. 그녀가 느낀 두려움과 불안이 서늘한 예기가 되어 그의 심장을 난도질한 탓이었다.

    채선은 가만히 한 손을 뻗었다. 그녀가 익제의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으며 눈매를 찌푸렸다.

    “예상보다 일찍 오셨습니다. 내일쯤 제가 향덕원 문턱을 넘어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하는 게 제 계획이었거든요. 그런데 어찌하여 이리 땀을 흘리십니까?”

    그녀의 눈동자가 그의 목을 따라, 어깨, 가슴으로 이동했다.

    “어찌하여 옷을 벗고 계시구요.”

    익제는 제 얼굴에 머문 채선의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 그녀의 손바닥에 자신의 뺨을 비볐다.

    “옷을 갈아입던 참이었소.”

    “그렇습니까?”

    “그 이유 말고 또 무슨 이유가 있겠소?”

    채선의 시선이 한 걸음 뒤에 서 있는 의원을 향했다. 

    그는 연신 안절부절못하는 태도로 익제의 등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사이에도 붉은 피가 그의 등 줄기를 따라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 광경이 참혹했다.

    “윽.”

    송하가 터지는 울음을 삼키려 입술을 깨물었다. 연산댁이 그런 그녀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갔다. 한 가령이 입을 꾹 다문 채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의원.”

    마침내 그가 누구인지 생각이 난 모양이었다. 채선의 입에서 그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의원이 있습니다.”

    그녀의 물음에 익제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대의 몸이 상한 데가 없는지 확인하러 온 것뿐이오.”

    “아이는…….”

    그 말에 채선이 더럭, 겁에 질린 표정으로 익제를 올려다보았다.

    말 등에 태워져 험한 산길을 달렸다. 오두막에서 탈출하기 위해 젖 먹던 힘까지 다 썼다. 비탈길에서 굴러떨어졌고, 사냥꾼의 덫에 숨어 정신을 잃기도 했다.

    잘못되려면 잘못될 구석이 너무도 많았다. 코끝을 스치는 비릿한 피 냄새가 불길한 예감을 부채질했다.

    익제가 그녀의 손바닥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무사하다는군.”

    “아……! 다행입니다.”

    채선이 눈물을 글썽이며 자신의 배 위로 손을 가져갔다. 가장 큰 걱정을 던 듯, 그녀의 안색이 눈에 띄게 차분해졌다. 

    마음이 놓이자, 그녀의 눈꺼풀이 다시 무거워졌다. 채선이 깜빡깜빡, 느리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익제가 그녀의 손등에 까칠한 입술을 문질렀다.

    간지러운 듯, 조용한 웃음을 터뜨리는 채선의 목소리가 길게 늘어졌다.

    “이상하게 자꾸만 잠이 옵니다. 방금까지 자다가 깼는데요.”

    “그럴 만도 하지. 고단한 하루였지 않소. 아직 새벽녘이니 좀 더 눈을 붙이시오. 긴 얘기는 날이 밝으면 그때 합시다. 내가 여기 있겠소. 그러니 안심하고 주무시오.”

    “예.”

    채선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까무룩, 깊은 잠속으로 빠져들었다.

    “무엇 하는가.”

    한 가령이 나직한 목소리로 의원을 다그쳤다. 퍼뜩 정신을 차린 의원이 흘러내린 피를 닦으며 지혈을 시작했다. 바닥에 고인 피로 발밑이 축축했다.

    그러나 익제는 채선의 손바닥에 입술을 묻은 채 물끄러미 그녀를 내려다볼 뿐 눈썹 한 번 찌푸리지 않았다. 지켜보는 의원의 얼굴이 참담하게 구겨졌다.

    마침내 처치가 끝났을 때, 익제가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방 안에 있는 하인들을 향한 명령이었다.

    “함구하라.”

    그것이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인지, 눈치채지 못할 만큼 어리석은 자는 없었다. 그는 채선에게 자신이 다친 것을 말하지 말라고 명했다. 

    하인들이 대답 대신 고개를 조아렸다.

    ***

    “송하야.”

    “……예, 말씀하십시오. 군대부인.”

    채선은 송하의 깍듯한 태도가 난감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의 나무랄 데 없는 정중함에서 어쩐지 거리감이 느껴졌던 탓이다.

    채선의 갈색 눈동자가 이리저리 구르다 옆에 앉은 화영을 향했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화영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도와줄 수 없다는 뜻이었다.

    결국 체념의 한숨을 내쉰 채선이 툭, 하고 말을 뱉었다.

    “미안하구나.”

    그녀의 말에 “읍.”하고 젖은 숨을 삼킨 송하가 일부러 퉁명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허공을 노려보는 눈매가 뾰족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군대부인께서 제 목숨을 구해주셨는데, 미안하시다니요. 제가 절을 해도 모자랄 판입니다.”

    그 감사의 말이 또 어쩐지 원망처럼 들렸다. 그리고 채선은 자신의 짐작이 크게 틀리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송하야.”

    채선이 다시 한번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살며시 손을 잡았다. 거칠고 건조했다. 얼마 전까지 채선의 손이 그랬던 것처럼 궂은일과 찬물에 익숙한 손이었다.

    송하는 느닷없이 잡힌 손에 당황한 듯 주춤거렸다. 방금까지 날카롭던 그녀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

    채선의 잇새로 다정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만약 네게 무슨 일이 생겼다면, 나는 지금 이렇게 웃을 수 없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네가 무탈한 게 다행한 일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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